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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23화 (123/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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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가자고.”

엔디미온의 목소리는 늘 그러듯 무심했다. 비아네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뒤를 따랐다. 짙게 깔린 어둠은 거리감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한참 걸은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얼마 걷지 않았고 몇 발자국 움직이지 않은 것 같은데 뒤를 돌아보면 어디까지 왔는지 모르게 되었다.

충만한 신성력으로도 뚫기 힘든 어둠이었다. 비아네는 두 눈에 신성력을 집중했지만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를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엔디미온은 그것보다 더 멀리 볼 수 있었지만 이 어둠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둠 때문에 움직임이 자연히 느려졌다. 또한 끝 모를 길은 사람을 쉽게 지치게 만들었다. 이것은 곧 목적 없는 달리기와 같았다. 똑같은 거리를 달리더라도 목적지가 명확한 것과 무작정 달리는 것은 달랐다.

물론 혹독한 훈련을 버티고 수없이 많은 목숨의 위기를 넘어온 비아네가 이 정도로 앓는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그의 다리는 아주 튼튼했고 심장은 활력을 뿜어내는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이대로 하루 종일 걷는다고 해도 그는 결코 지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끈기와 인내였다. 성기사와 성배기사는 두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었다.

“한 가지 여쭈어볼 것이 있습니다만······.”

오랜 침묵을 깬 것은 비아네였다. 이 지루함을 떨쳐내기 위해 수다를 떨려는 것은 아니었다. 엔디미온의 등 뒤에 있는 성배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목구멍 안에서 맴돌던 질문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입 안까지 올라온 것이다.

머금은 말은 결국 뱉어야 했다. 도로 삼킨다고 해도 잠시일 뿐 불현듯 다시 튀어나올 것이다.

“뭐냐.”

굴곡 없는 목소리였다. 서늘하지만 엔디미온의 얼굴과 더없이 잘 어울려서 비아네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혹시 정체에 대해서 물어도 되겠습니까?”

세상에 등 뒤에 성배의 모습을 그리고 다니는 사람이 또 있을까. 독신자(篤信者)들이 모인 여명교단에서도 그런 자는 없었다. 성인이라 불린 자들 중에서도 없었다. 영웅들이 사라지고 더는 성녀가 나오지 않게 된 지금의 시대에 그 누가 성배를 등에 지고 다니겠는가.

비아네는 알아야 했다. 이 남자가 성배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를.

“내가 누구냐고?”

엔디미온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뒤로 돌아서 비아네의 얼굴을 보았다. 감은 듯 작은 눈, 눈 하나를 앗아간 기다란 흉터, 굳게 다물린 입, 우뚝한 코. 전능자가 내린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었던 고행자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정체를 알려줄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 잠들지 못한 망령이 머물 자리는 없었으니까.

“내가 똑같은 질문을 한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내 대답은 언제나 같다. 나는 전능자의 종복이자 가시밭길 위의 고행자다. 단지 그뿐이다.”

“그럼 등 뒤의 성배에 대해 물어도 되겠습니까?”

“내가 성배기사인지 궁금한 거냐.”

비아네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턱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성배기사십니까?”

엔디미온은 웃었다. 호기심 많은 꼬마를 보는 어른 같은 웃음이었다.

“아니다.”

“아니라고요······.”

비아네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백 년 전의 성배기사가 지금까지 살아있을 리가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으면서 아쉬움을 느꼈다. 그 어떤 성기사가 가장 위대한 영웅의 귀환을 반기지 않을까. 성기사가 아니더라도 그 누가 돌아온 성배기사를 싫어할까. 질색을 하는 것은 오직 악마숭배자들뿐일 것이다.

“그럼 다시 가자.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다.”

두 사람은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얼마 움직이지 않고서 다시 멈추었다. 갈림길이 나타난 탓이었다. 양쪽 길 다 짐승의 목구멍을 보는 것처럼 끝없는 어둠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엔디미온의 허리춤에 매달린 성검이 흔들렸다.

손잡이 끝부분이 오른쪽을 가리켰다. 성검은 길 잃은 수도자들의 수호성이었으니 언제나 옳은 길만을 가리켰다. 비아네 모르게 정답을 알려주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는 모습이 우스워서 엔디미온은 작게 웃었다.

웃음소리를 들은 비아네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당연히 괜찮지. 갑자기 왜?”

“뜬금없이 웃기에 많이 지치신 줄 알았습니다.”

돌려서 말하기는 했지만 비아네는 엔디미온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에 지쳐서 실성한 게 아닌가 의심했던 것이다. 엔디미온은 손을 저으며 오른쪽 길로 들어갔다.

“이 길이 맞는 겁니까?”

“날 의심하는 거냐.”

“아니, 그런 것은 아니고······.”

비아네는 말끝을 흐렸다. 그의 감은 이쪽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는 중이었지만 감히 엔디미온에게 대들 수는 없었다. 비록 엔디미온이 자신은 성배기사가 아니라고 했지만 등에 있는 성배가 진짜라면 몹시 비범한 인물임은 분명했다.

어쩌면 성배기사를 대신하는 새로운 전능자의 종일지도 모르지. 비아네는 혼자서 여러 생각을 하면서 엔디미온의 뒤를 따랐다. 길을 가면 갈수록 좌우의 벽이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어둠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길이 커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보통 길이 커지면 그 끝에는 넓은 공간이 나타나는 법이다.

이 길이 맞는 건가? 비아네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안광이 켜졌다. 하나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하나, 그 다음은 셋, 다음은 열, 스물, 마흔, 일흔, 백. 수많은 안광들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반사적으로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엔디미온과 비아네는 즉시 제자리에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어둠 속에서 다섯 쌍의 안광이 뛰쳐나왔다.

“크아아아아아앙!”

아무리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몸은 해야 할 일을 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주먹이 첫 번째 악귀의 머리를 부쉈고 다른 쪽 손이 악귀의 목을 붙잡고 바닥에 내던졌다. 또 하나의 악귀는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들기에 손으로 잡고 그대로 크게 찢어버렸다.

서걱서걱하는 소리는 비아네가 검으로 악귀들을 썰어버리는 소리였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악귀 다섯 마리를 해치우고 정면을 쳐다보았다. 수많은 안광들 중에서 유독 크게 빛나는 안광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형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무언가 커다란 크기를 가진 것이었는데 악귀들을 헤치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반신은 뱀이고 상반신은 거인의 것이었다. 머리는 새였는데 이마에도 눈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청색의 안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악마는 손에 들고 있던 창으로 엔디미온을 겨누며 말했다.

“여기가 어디로 감히 들어오느냐, 이 불경한 침입자들아!”

쩌렁쩌렁한 고함에 벽이 흔들릴 정도였다. 엔디미온과 비아네는 몸이 굳은 것처럼 가만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 엿보였다. 악마는 부리를 벌리고 껄껄 웃었다.

“흐흐흐. 그래, 두려우냐? 당연하겠지! 이곳은 영혼군주의 영역이며 나는 주인님의 뜻을 받드는······ .”

“뭐야, 씹. 여기가 아니잖아. 잉굴라트는 어디 가고 무슨 허섭스레기가 있어.”

“······충직한 하수인이자 믿음직스러운 부하, 아니, 뭐? 뭐? 씹? 허섭스레기?”

이번에는 오히려 악마가 당황했다. 지금 중요한 자기소개 중인데 씹? 허섭스레기? 악마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엔디미온과 비아네는 저들끼리 대화했다.

“아니, 오른쪽 길이 맞다면서요?”

“나도 맞는 줄 알았지. 에투알, 이게 뭐야. 여기가 아니잖아. 길을 제대로 알려줘야지, 이 무능한 성검아.”

“이럴 수가!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오! 나는 길 잃은 수도자들의 수호성! 틀린 길을 가리킬 리가 없소!”

“헉! 뭐야! 검이 말을 하잖아요! 이거 저주 받은 거 아닙니까?”

“떽! 저주라니! 내가 누구인지 알고 망발이오! 나는 위대한 전능자의 칼날이자 호수의 여왕의 일부이며······.”

“······.”

엔디미온과 비아네, 그리고 성검이 저들끼리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모습을 본 악마는 조용히 창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내질렀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지만 엔디미온과 비아네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피한 후에 곧바로 전투 자세를 잡았다. 엔디미온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비겁하게 기습이냐. 역시 악마답군.”

“······이 빌어먹을 놈아! 비겁하게 기습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내 말을 무시한 거잖나! 아니! 자기소개 같은 것은 다 집어치워! 곧 죽을 놈들한테 그게 무슨 소용이냐! 가서 죽여! 저 빌어먹을 놈들을 다 죽이라고!”

흥분한 악마가 창을 휘두르자 악귀들이 엔디미온과 비아네에게 달려들었다. 백 마리도 넘는 악귀들을 두 명이서 상대해야 하건만 긴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비아네는 혼자서 악마 서넛도 상대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엔디미온은 말할 것도 없었고.

제일 먼저 달려든 악귀가 비아네의 검에 목이 잘렸다. 엔디미온은 짤막하게 말했다.

“나는 오른쪽, 너는 왼쪽.”

두 사람은 역할을 나누고서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엔디미온은 세찬 물살처럼 몰려드는 악귀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무모한 짓이었겠지만 그는 아니었다. 네발짐승처럼 생긴 악귀들이 엔디미온의 팔과 다리를 물었다. 하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작은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주먹으로 악귀 몇 마리를 때려눕힌 후에 코를 찌르는 악취에 미간을 좁혔다.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어디선가 썩은 내가 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싸움을 멈출 수는 없었다. 엔디미온은 두 주먹을 휘두르고 또 휘둘러서 악귀들을 수도 없이 박살냈다.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아서 이런 식으로 싸우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성검을 뽑으면 금방 끝이 나겠지만 겨우 악귀들을 상대로 성검을 뽑는 것은 소 잡는 칼로 닭을 잡는 꼴이었다.

엔디미온은 왼쪽에서 달려드는 악귀의 머리를 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힘껏 잡아당겼다. 본래는 그냥 머리를 뽑아서 죽일 생각이었는데 생각한 것 이상으로 부드럽게 뽑혀 나왔다. 그래서 문제였다. 머리만 뽑힌 것이 아니라 척추까지 모두 뽑혀 나왔으니까.

“오우, 엔디미온. 그건 좀 역겨운 것 같소······.”

“뭐야, 이거. 몸이 왜 이리 약해.”

그는 발밑에 떨어진 악귀의 시체를 보았다. 자세히 보니 시체의 상태가 이상했다. 몸 곳곳에 뼈가 드러나 있었고 가죽 역시 상태가 나빴고 뼈에 붙은 살점에는 구더기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방금 죽은 시체의 상태라고 하기에는 이상했다.

“잉굴라트가 되살린 악귀들이로군.”

영혼군주 혹은 사령술사. 그것이 잉굴라트의 별명이었다. 어디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난다했더니 이것 때문이었나. 본래 악귀들은 겁이 없지만 한 번 죽었다가 되살아난 시체들은 더욱 겁이 없었다. 수많은 악귀들이 학살당하고 척추까지 뽑히는 것을 봤음에도 악귀들을 쉬지 않고 달려들었다.

엔디미온은 정면에서 달려드는 악귀를 향해 반사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방금 뽑은 악귀의 척추가 채찍처럼 악귀의 얼굴을 가격했다. 의도했던 공격은 아니었지만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뼈는 튼튼해서 마음에 드네.”

엔디미온은 오른손에 든 척추를 휘두르면서 척추 하나를 더 뽑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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