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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24화 (124/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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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벼라!”

우렁찬 외침은 적들을 도발하는 효과가 있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악귀들은 곧장 엔디미온에게 덤벼들었다가 날아오는 척추에 맞고서 바닥을 굴렀다. 어떤 것들은 즉사했지만 어떤 것들은 얼굴이 찌그러졌어도 다시 일어났다. 잉굴라트의 사술 덕분이었다.

엔디미온은 겁도 없이 덤비는 악귀의 머리를 손으로 붙잡아 으스러트렸다. 그리고 힘껏 잡아당겨서 척추를 뽑았다. 이제 양손에 척추를 하나씩 든 그는 빠르게 휘두르며 전진했다. 거친 회오리에 갈려나가는 것처럼 악귀들이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쓸려나갔다.

양손의 적의 척추를 하나씩 들고 휘두르는 것은 마치 거칠 것 없는 야만전사처럼 보였다. 악귀들의 몸에서 튀어나오는 질척한 살점과 뼛조각들을 정면에서 맞으며 성배기사는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이 한심한 것들! 상대는 겨우 한 명인데 뭘 쩔쩔매는 거냐!”

뒤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악마가 노성을 지르며 움직였다. 하반신이 뱀인 그는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손에 들고 있던 창을 힘껏 내질렀지만 애꿎은 부하들만 몇 마리 죽였을 뿐이었다. 바닥을 박살낸 창이 다시 뽑혀서 사출을 준비했다. 공격은 빨랐다. 마치 화살을 쏘는 것처럼. 만약 엔디미온이 아니었다면 공격에 맞아죽었을 것이다.

“넌 기습 말고는 할 줄 모르는 거냐. 비겁하기 짝이 없군.”

엔디미온의 말에 악마는 부리를 크게 벌리며 소리쳤다.

“시끄럽다! 싸움에 비겁하고 말고가 어디 있나! 이기는 것이 전부다! 이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애초에 나는 악마인데 당연히 비겁한 거 아니냐!”

생각해보니 그러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에 든 척추를 빙그르르 돌렸다. 양쪽에서 달려드는 악귀들을 사술로부터 해방시켜주며 악마를 향해 말했다.

“마침 잘 됐다.”

“잘 되기는 뭐가 잘 돼?”

엔디미온은 악마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시선이 이상하게 소름끼쳐서 악마는 저도 모르게 뒤로 조금 물러났다.

“덩치가 크면 척추도 크겠지. 잠깐 빌려가마. 이 성가신 놈들 먼저 처리하고 돌려주겠다.”

“뭐? 이 미친놈아! 척추를 빌려 가면 나는 어쩌라고! 세상에 척추 없이 살아있는 생물도 있더냐!”

“누가 뺏어간데? 잠깐만 쓰고 돌려주겠다고.”

“시끄럽다! 더 들을 것도 없군! 여기서 죽여주마!”

화가 난 악마가 창을 내질렀다. 빠르고 묵직한 공격이었지만 엔디미온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는 바닥을 박차고 빠르게 악마에게 접근했다. 손에 들고 있던 척추를 휘두르자 오히려 척추가 부러지고 말았다. 그래도 악마라고 악귀보다는 몸이 튼튼한 모양이었다.

“하하하! 이 멍청한 놈! 그깟 악귀들의 뼈 따위로 내게 상처 하나 입힐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악마가 웃었지만 엔디미온은 무시하고 왼쪽 손에 들고 있던 척추를 휘둘렀다. 이번에도 척추가 부러졌다. 악마가 더 크게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엔디미온이 척추가 부러지고 남은 날카로운 끝부분으로 악마의 하반신을 찔렀기 때문이다.

그는 암벽등반이라도 하는 것처럼 부러진 뼛조각을 이용해 악마의 몸 위를 타고 올랐다. 뛰어난 상체 근력을 바탕으로 길을 걷는 것처럼 악마 몸 위를 성큼성큼 올라갔다. 순식간에 허리 위까지 올라온 엔디미온을 보고서 악마가 몸을 흔들었다.

“이 빌어먹을 놈! 떨어져라!”

악마가 창을 들지 않은 손으로 엔디미온을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쇄도하는 손을 향해 뼛조각을 찔렀다. 그 다음 공중제비를 돌듯이 한 바퀴 회전해서 손등 위에 올라탔다가 다시 위로 훌쩍 뛰었다.

노리는 것은 악마의 목. 발차기로 일격에 부러트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청색의 빛이었다. 어둠으로 가득한 이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빛이었다.

공중에서는 움직임이 부자유하다. 제대로 방어 자세를 잡기도 전에 엄청난 기세의 빛이 엔디미온의 몸에 직격했다. 방망이에 얻어맞은 것처럼 뒤로 날아간 엔디미온은 벽에 부딪쳐 큰 흔들림을 만들어냈다. 바닥으로 떨어진 그는 빛에 맞은 가슴에서 쓰라림을 느꼈다. 일개 악마 따위가 한 공격치고 제법 큰 타격이었다.

빛에 맞은 가슴은 검게 그을렸고 약간 우묵해진 느낌이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곳곳의 근육들이 뻐근했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들어 악마를 보았다. 그의 세 번째 눈, 이마에 달린 그 눈에서 빛이 발사된 것이었다.

“새끼, 좀 치네.”

엔디미온은 먼지 털어내듯 가슴의 그을음을 툭툭 쳐냈다. 어깨를 한 번 빙글빙글 돌리고 뒷덜미를 손으로 몇 번 주물렀다. 그는 악마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했다. 상당히 강력한 공격이었고 일격에 맞은 것이 성배기사가 아니라 보통의 성기사였다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내가 좀 도와줄 수도 있소.”

“일없다. 저 따위 적을 상대로 성검을 뽑으면 그게 부끄러운 일이지.”

시간도 없으니 빨리 끝내야지.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하자 몸 전체에 신성력이 넘실거렸다. 은은하게 빛이 나는 몸은 본래보다 조금 더 커진 것처럼 보였다. 전력을 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출력만으로도 악마를 압도하기에는 충분했다.

악마는 엔디미온이 움직이기 전에 끝장을 보려고 했다. 이마의 눈이 빛나면서 다시 광선을 발사했다. 눈부신 빛이 시야를 가릴 정도로 환하게 번쩍였지만 엔디미온은 도망치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두 다리로 바닥을 딛고서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 끝에 충만한 신성력이 모였다. 빛과 빛의 대결이었다. 충분히 피할 수 있음에도 엔디미온은 정면에서 부딪치는 것을 택했다. 주먹이 직선으로 곧게 날아갔다. 서로를 향해 달려가는 빛은 금세 충돌했다.

악마는 굉음을 기대했을 것이다. 빛과 빛이 부딪쳤으니 당연히 발생했어야 할 굉음을. 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빛이 빛을 갈랐다. 성배로부터 흘러나온 신성한 빛은 거짓된 빛을 처단하는 징벌의 창이었다. 악마의 이마에서 뿜어져 나온 광선은 엔디미온의 주먹에 부딪쳐 좌우로 갈라지더니 곧 힘없이 사라졌다.

악마가 눈을 부릅떴다. 그의 직감은 여기서 멍청하게 있으면 죽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 했다. 아직 손에는 창이 남아있었다. 그의 장기는 번개처럼 빠른 창술이었고 지금이 바로 그 실력을 발휘할 때였다.

시위에서 튕겨져 나가는 화살처럼 창이 사출했다. 공기를 찢고 바람을 가르며 엔디미온을 향했다.

“빛을 쏘는 것도 안 통했는데.”

주먹은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멈추지 않았다. 반쯤 날아갔던 주먹은 그대로 직선 운동을 이어나갔다. 노리는 것은 창의 끝부분.

“이딴 게 통할 거라고 생각한 거냐.”

악마는 세 개의 눈을 모두 크게 떴다. 창의 끝부분이 우그러졌다. 그러나 우그러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주먹과 부딪친 충격은 창의 끝부분에서부터 창대까지 착실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찌그러지고 깨지고 부러졌다. 악마의 자랑이었던 커다란 창은 고물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처참히 박살났다.

사방으로 날아가는 창날 조각의 소리가 요란했다. 신성한 빛을 정신 사납게 반사하던 창날 조각 사이로 보이는 것은 주먹을 굳게 쥐고 있는 엔디미온이었다. 숨이 막혔다. 본능적인 일이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잠깐만 기다리라고!”

악마가 손을 흔들면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그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바로 거리를 좁히며 주먹을 날릴 준비를 했다. 악마는 자신의 미래가 보였다. 주먹에 맞고 배를 뚫려 비참하게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기다리라니까! 너 주인님을 만나러 온 게지? 내가 길을 가르쳐주마! 주인님께 가는 길을 가르쳐주겠다고! 그러니까 살려줘!”

악마의 처절한 외침이 엔디미온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여전히 주먹을 들고 있었지만 그래도 더 다가오지는 않았다. 악마는 반색했다. 그래, 이런 조건이면 거래를 안 할 수가 없지!

“잉굴라트가 있는 곳을 가르쳐주겠다고?”

“그래! 내 주인님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마! 너희들은 지금 길을 잃고 여기까지 온 거겠지? 당연히 그럴 거다. 이곳은 아주 어둡고 개미굴처럼 길이 복잡하니까. 내 도움이 없으면 주인님을 찾기도 전에 지쳐서 쓰러질 걸?”

“하나만 묻자. 내 일행들은 어디에 있지?”

“네 일행들? 아마 너희들처럼 지하무덤 안을 배회하고 있을 거다. 운이 나쁘다면 다른 악마들에게 잡아먹혔을지도 모르지. 너희들도 바보처럼 지하무덤 안을 뺑뺑 돌기만 하는 것은 싫겠지? 그러니 나와 거래하자. 내가 주인님께 가는 길을 가르쳐주마.”

“나보고 악마를 믿으라는 거냐.”

악마는 최대한 비굴한 얼굴로 말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이봐, 악마라고 거짓말만 하는 건 아니야. 그리고 내 도움이 없다면 넌 결코 주인님께 갈 수 없다. 지하무덤 안에서는 주인님의 힘 때문에 반드시 길을 잃게 돼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주인님께 갈 수 없다는 소리지.”

“흐음, 그래서 잘못된 길로 들어왔던 것인가. 잉굴라트의 힘이 대단하기는 하군. 아무리 별의 힘이 약해지는 지하 안이라고 해도 내 힘을 억누르다니.”

에투앙이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엔디미온이 말했다.

“그럼 잉굴라트에게 가는 방법을 말해봐라.”

“잠깐. 그 전의 마법의 맹세를 하자. 우리가 솔직히 서로를 신뢰할 만한 사이는 아니잖나.”

악마는 엔디미온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법의 맹세를 하도록 하지. 네가 정보를 준다면 널 해치지 않겠다. 내 이름과 전능자에 대한 신앙심을 걸고서 맹세하겠다.”

“나 역시 영혼군주에 대한 충성심과 나의 심장에 걸고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맹세하겠다.”

악마와 엔디미온의 머리 위로 작은 빛이 번쩍였다. 마법의 맹세가 이루어졌다는 증거였다. 엔디미온이 악마를 해치지 않겠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악마는 그제야 안심하며 말했다.

“내 창의 조각을 가져가라. 영혼군주를 모시는 열 악마의 무기는 모두 주인님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비록 지금은 부서져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지만 잠시 동안은 네가 길을 잃는 것을 막아줄 게다.”

“난 악마를 믿지 않지만 마법의 맹세를 했으니 거짓은 없겠군. 알겠다.”

엔디미온은 부러진 창 조각을 집고서 악마에게서 멀어졌다. 그가 맹세를 어기고 악마를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마법의 맹세가 내리는 징벌은 성배기사에게도 부담스러웠다. 그것은 질서라고 불리는 세상의 근간과 관련된 것이기에 아무리 성배기사라고 해도 함부로 어길 수는 없었다.

악마는 안도했다. 살았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하나의 사실이 있었다.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것이라도 자세히 보면 분명히 틈이 있다는 사실을.

“비아네.”

나직한 부름. 발자국 소리. 그리고 서늘한 살기. 악마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처음에는 서늘했다가 그 다음에는 불이 붙은 듯 뜨거웠다. 바닥으로 떨어진 악마는 아직 꼿꼿이 서 있는 자신의 하반신을 보았다. 세상에 단 여섯 뿐인 교황의 기사는 악마 하나쯤은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었다. 기습적으로 벌어진 공격에 악마는 정말 바보처럼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런 그를 엔디미온은 나직하게 말했다.

“약속은 지켰다. 내가 널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 말이야.”

“이, 이, 이 개 같은, 새, 끼······.”

허리가 끊어져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악마에게 돌아온 것은 싸늘한 조롱뿐이었다.

“믿을 사람을 믿었어야지, 이 멍청한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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