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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25화 (125/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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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씹. 여기는 또 어디야?”

비다르는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갑자기 바닥이 열리면서 아래로 떨어진 것까지는 알겠는데 여기가 어디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더 짜증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짙게 깔린 어둠 때문에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부릅떴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쓰읍, 그 뭐냐. 신성력인가, 그걸 좀 써야 되겠는데.”

비다르는 다른 영웅들과 달랐다. 전능자에 대한 믿음은 없고 돈에 대한 욕심만 있었다. 성배기사에게 성배의 힘을 나누어 받고 신성력을 다룰 수 있게 됐지만 제대로 써본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몸을 단단하게 만들고 근력을 늘리는 것에만 써본 탓에 두 눈에 신성력을 집중하는 일은 몹시 서툴렀다.

“지금 제대로 되고 있는 건가?”

두 눈이 빛나고 있지만 주변에 깔린 어둠은 잉굴라트의 강력한 힘 때문에 생성된 것이기에 신성력으로도 투시할 수 없었다. 물론 비다르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뭐가 좀 보이는 것 같은데?”

어쨌거나 바로 발밑도 안 보이던 상태에서 근처 몇 발자국 정도의 거리는 보이게 됐으므로 움직이는데 지장은 없었다. 비다르는 제법 낙천적인 인간이었다. 여유는 힘에서 나오는 법이다. 성배기사가 아니면 그 누가 그를 상대하랴. 무서울 것이 없으니 초조할 것도 없었다.

비다르는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한참 걷다가 어디선가 나는 시체 썩는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냄새가 너무 고약해서 코를 막아도 억지로 뚫고 들어올 정도였다. 씨발, 대체 뭐야? 너무 지독한 냄새에 화가 났지만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이 컴컴한 어둠 속에서 정처 없이 걷는 것은 너무나 지루하다. 시야가 가려져도 냄새는 맡을 수 있으니 저 악취를 따라가면 뭐라도 나올 것이었다.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하, 이거 내가 일등으로 도착하는 거 아냐? 아이, 그럼 어쩔 수 없지. 엔디미온 대신해서 착한 일 좀 해볼까.”

혼자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걷던 비다르는 점점 짙어지는 악취에 미소를 지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뭐가 나올 것 같았다. 그는 더 빠르게 걸으면서 코를 킁킁거렸다. 코 안을 찌르는 듯한 악취는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후각을 괴롭혔다.

“어?”

빠각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발에 밟혀 바스라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누르스름한 가루와 조각들이 있었다. 손가락으로 만져보자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뼈였다. 비다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언가 천장에 닿을 듯 쌓여있었다. 이번에는 만져볼 것도 없었다.

시체들, 그것도 악귀들의 시체들. 비다르는 이곳이 지하무덤 안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백 년 전에 사제들은 이곳에 수많은 악귀들의 시체를 보관하고 전능자에게 기도를 올리고 성수와 성유로 사악한 기운을 정화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매일 같이 쏟아지는 악마와 악귀들의 공세에 성문이 박살났고 홍수가 난 것처럼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며 다가오는 사악한 군세를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트라바는 한동안 악마와 악귀들에게 점령당했고 성기사들이 다시 탈환했을 때는 이미 손 쓸 방도가 없이 오염돼 있었다. 그들은 트라바를 버리고 다른 도시를 구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그때의 시체들이 제대로 정화되지 못한 채로 아직 이곳에 남아있는 이유였다.

“그러니까 잘 좀 막지. 며칠만 버티라니까, 쯧.”

혀를 찼지만 트라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다르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옅게 묻어 있었다. 백 년 전의 영웅은 입맛이 쓴지 몇 번 더 쩝쩝 소리를 냈다.

“이거 역겨운데 나갈 때 다 태워버리고 갈까.”

지금은 트라바가 버려져 있어도 언젠가는 다시 사람들이 살게 될 것이다. 그때를 위해 지금 악귀들의 시체를 태워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비다르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이 넓은 공간의 중앙에 무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도사리고 있는 것은 끈기 있게 비다르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 열매가 가장 맛있게 익었을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참고 또 참으며 자신의 기운을 억누르고 있었다.

비다르는 웃었다. 흰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야, 너 혼자냐?”

악마가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들켰음에도 침착하게 몸을 일으키고 비다르와 마주했다.

악마는 그리 크지 않았다. 보통 사람보다 두 배 정도 컸을까. 악귀보다는 컸지만 악마치고는 작았다. 그러나 그 단단한 몸과 울퉁불퉁한 근육들, 네 개나 되는 주먹을 보면 이 악마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동그란 얼굴에 대각선으로 교차하여 쫙 갈라지는 입, 그리고 그 안에 보이는 무수히 많은 이빨들. 무섭다 못해 기괴한 모습이었다. 악마는 자신의 생김새를 이용해 위협을 가하고 있었지만 비다르의 웃음은 오히려 짙어질 뿐이었다.

“심심하던 차에 잘 만났다.”

“날 만났으니 이제 심심하지 않을 거다. 이곳은 지하무덤. 악귀들의 시체 말고도 다양한 시체들이 있지.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시체 역시 셀 수 없이 많이 있다. 너도 곧 그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니 기뻐해라.”

“이해가 안 가는데.”

비다르는 철컥철컥 소리를 내면서 강철 주먹을 꽉 쥐었다가 이완하기를 반복했다.

“네가 날 무슨 수로 죽일 건데?”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여기 오는 자들은 전부 그랬지. 그리고 전부 다 내 주먹에 맞고 죽었다.”

새끼, 자신감은 자기가 더 넘치네. 비다르는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너 재밌네. 기분이다. 다섯 수까지 양보해주마. 한 번 덤벼 봐.”

“······뭐?”

“너 공용어 모르냐? 요즘 악마들은 공용어 공부 안 해? 다섯 수 양보해주겠다고. 이해가 안 돼?”

“자신감이 넘치는 거냐, 아니면 멍청한 거냐. 악마를 상대로 다섯 수나 양보한다고? 멍청한 놈! 넌 내 주먹 한 대도 버티지 못할 거다!”

“혓바닥 길다 길어. 내가 좀 잘라 줘?”

도발에 넘어간 악마는 바로 뛰어나갈 자세를 잡았다. 그는 누르면 누를수록 더 강한 반발력으로 튀어나가는 고무처럼 자세를 한껏 낮췄다가 엄청난 기세로 뛰쳐나갔다. 가만히 보고 있떤 비다르도 입을 오므려 오오 소리를 냈다. 그만큼 빨랐다.

“어디 몇 대나 버티나 한 번 볼까!”

첫 번째 공격이 비다르의 몸에 직격했다. 오른쪽 상단의 주먹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비다르의 두 주먹을 깨부술 기세로 힘껏 후려쳤다. 상대가 보통의 격투가였다면 그 다음 공격은 왼쪽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손은 두 개니까.

하지만 악마는 달랐다. 그는 손이 네 개였고 그것은 같은 방향에서 한 번 더 주먹을 휘두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오른쪽 하단의 주먹이 배를 노렸다. 얼굴에만 방어를 집중한 허점을 노리고 배를 향해 날아갔다.

아무리 비다르라도 갑작스러운 공격에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는 흡 소리를 내면서 배에 힘을 잔뜩 주었지만 강렬한 충격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악마는 크게 웃으며 왼쪽 상단의 주먹을 휘둘렀다. 이미 한 번의 공격으로 흐트러진 방어 자세를 완전히 깨트리려고 했다. 아직 비다르의 방어는 굳건했지만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얼굴이 안 된다면 바로 배를 노리면 되니까. 또 한 번 배에 꽂히는 깔끔한 타격. 비다르의 몸이 들썩거렸다. 주먹이 네 개라는 것은 그만큼 다음 공격이 돌아오는 간격이 짧다는 뜻이었다. 순식간에 네 번의 공격을 하고도 다음 주먹이 벌써 준비돼 있었다.

이번에 악마가 노릴 곳은 비다르의 얼굴이었다. 배에 두 번이나 주먹을 맞은 충격, 그리고 얼굴을 노렸던 두 번의 공격 때문에 비다르의 방어 자세는 완전히 흐트러져 있었다. 어디를 때려야 할 지 바로 눈에 들어왔다.

자세가 흐트러져서 훤히 열린 얼굴. 여기다, 여기를 때리라고 말하는 듯한 저 얼굴. 저곳에 한 방 먹이면 이 싸움은 끝이 난다. 비다르는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고 그대로 잉굴라트의 새로운 병사가 될 것이다.

단단한 주먹이 망치를 휘두르는 것처럼 부웅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그러나 하나가 아니었다. 주먹 하나는 얼굴을 노리고 다른 하나는 배를 노렸다. 악마는 주먹이 네 개나 된다는 점을 적극 활용했다.

악마는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했지만 이변은 없었다. 오른쪽 상단의 주먹은 얼굴에 꽂혔고 오른쪽 하단의 주먹은 배에 꽂혔다. 두 주먹이 깔끔하게 비다르의 몸을 때렸다. 멍청한 놈. 별 것도 없으면서 허세나 부리다니. 악마가 입을 쩍 벌려 웃음 비슷한 것을 지으며 승리를 자축할 때였다.

“에라이, 기분이다. 선심 써서 여섯 대까지 맞아줬다.”

얼굴에 꽂힌 주먹을 밀어서 목을 부러트리려고 했다. 배에 꽂힌 주먹을 밀어서 내장을 찢어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무거운 바위가 길을 막은 것처럼 주먹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악마는 일이 잘못됐음을 느꼈다. 주먹에 맞았음에도 고개를 똑바로 들고 자신을 쳐다보는 비다르의 시선에 오싹함을 느꼈다. 도망쳐야 한다. 다음을 노려야 한다.

하지만 늦었다.

“다섯 수를 양보한다고 하면 누구나 자기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처맞기 전까지는 말이야.”

뒤로 뻗은 다리, 바닥을 단단히 딛고 선 다리, 최대한 뒤로 당긴 주먹, 터질 듯한 힘을 축적하고 있는 어깨, 그리고 크게 웃고 있는 얼굴.

공기를 찢으며 날아간 것은 처음에는 화살이었고 그 다음에는 작살이었으며 마지막에는 철퇴였다. 직선으로 곧게 날아간 주먹이 악마에 얼굴에 부딪치는 순간 입이 찢어지고 수많은 이빨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무자비하고 압도적인 힘은 얼굴을 박살내고 뇌를 흔들었다.

인식 범위를 넘어선 충격은 뇌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악마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빨이 부러지는 고통도, 얼굴이 박살나는 고통도, 뒤로 날아가는 몸의 부유감도. 그리고 자신의 죽음조차도.

“뭐야?”

비다르는 주먹에 맞고 날아가 벽에 부딪친 악마의 시체를 보았다. 어찌나 강렬한 충격이었는지 몸이 완전히 짓뭉개져 있었다. 마치 토마토를 벽에 던진 것처럼 말이다. 형태를 알아볼 수도 없게 변한 악마를 보고서 얼굴을 찡그렸다.

“야, 인마! 나는 여섯 대 맞아줬는데 너는 한 대 맞고 죽으면 어떡해? 짜증나네, 진짜.”

비다르는 악마의 시체에 침을 뱉어주고는 혀를 한 번 찼다. 죽이기 전에 길이나 좀 물어볼걸. 후회하면서 발을 떼는 순간 서늘한 살기가 이마를 스쳐지나갔다. 무언가 있다.

“거기 누구냐!”

오른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 어둠 속에서 농후한 살기가 느껴졌다. 비다르가 압박감을 느낄 정도면 상당한 실력자라는 뜻이었다. 그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이번에는 좀 싸울 만한 상대가 나타났는걸.

“내가 누구냐고?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에라이, 씨발. 비다르의 입에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긴장했던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야, 라이오넬! 나야, 나! 비다르! 그래도 이런데서 만나니까 좀 반갑다?”

“오, 비다르인가? 나도 반갑네. 혼자인가?”

“그래, 너도 혼자냐?”

“음, 아무래도 모두 뿔뿔이 흩어져버린 모양이군.”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비다르가 슬쩍 라이오넬의 몸을 확인해보니 싸움의 흔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그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비다르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는지 몰라도 잉굴라트 하나 잡는데 너랑 나 둘이면 충분하겠지. 길만 찾으면 되는데 어두워서 뭐가 보이질 않네.”

“걱정하지 말게, 비다르. 길이라면 내가 알고 있으니.”

“길을 안다고? 네가?”

라이오넬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나는 장님이라네. 이런 어둠에는 익숙하지. 다시 말해서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것에 적합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소리일세!”

“그럴 듯한 소리기는 한데······.”

비다르는 자신 있게 걸어가는 라이오넬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저 새끼 저거 믿어도 되는 거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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