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베로니카는 얼얼한 엉덩이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움직여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컴컴하다 못해 심연 같은 어둠이었다. 자기 몸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육체는 사라지고 오직 영혼만이 남은 것 같은 느낌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일단은 빛이 있어야 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손끝에 마력을 집중하자 빛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비추지 못했다. 분명 빛이 존재하기는 하는데 주변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본래 어둠 속에서 빛이 발생하면 둥근 빛을 중심으로 빛무리가 생기고 주변에 환한 광채를 뿌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검은 도화지 위에 그려진 흰색의 공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것은 이 어둠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란 뜻이었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베로니카는 당황스러움보다 호기심이 먼저였다. 마법사란 자들이 본래 그랬다. 진리의 탐구자, 지식의 여행자, 호기심의 수호자.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알려고 하고 신기한 것이 있으면 연구하려고 했다. 빛이 어둠에 잡아먹힌 것도 아니고 이 공간 안에 실존하면서도 빛이 빛으로서 기능하지 않는 상황은 학자의 탐구열에 불을 붙이기 충분했다.
손 안에서 빛나되 빛나지 않는 빛을 이리저리 굴리던 베로니카는 두 손가락으로 그것을 집어서 머리 위로 들었다. 한쪽 눈을 감고서 초점을 맞추려는 것처럼 빛을 전후 방향으로 움직였다. 한참 그러고 있다가 손가락에 힘을 주자 빛이 바사삭 바스라졌다. 빛의 가루들이 쏟아졌으나 그것 역시 아무것도 비추지 못했다.
“상당히 강력한 사술이 주변에 작용하고 있네.”
이곳으로 떨어지기 전에 있던 곳 역시 어두웠으나 그곳에서 마법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으니 무언가 술수가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럼 누가 사술을 부렸을까. 정답을 생각해볼 것도 없었다. 잉굴라트일 게 뻔했으니까.
“그럼 이제 어쩐다. 솔직히 나 혼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데.”
베로니카는 영웅도 아니고 뭣도 아니다. 당연히 바이올렛의 발가락 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력이었고 백 년 전의 마법사들과 비교해도 약해빠졌다. 그런 그녀가 잉굴라트의 은거지 안에서 혼자 돌아다녀봤자 맞이할 결과는 비참한 죽음뿐일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이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악마와 악귀들을 만날 가능성이 있었다. 애초에 이곳은 잉굴라트의 영역이었고 어디에 있든 위험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반드시 찾아내리란 보장은 없었다. 차라리 자신이 찾아다니는 것이 위험하기는 해도 더 나은 선택이었다.
결정을 굳혔으니 남은 것은 행동뿐이었다. 베로니카는 심호흡을 한 번 한 후에 한 걸음 내딛었다. 단지 한 걸음 걸었을 뿐인데 다리가 몹시 무거웠다. 자기 몸조차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범인에게는 아주 큰 각오를 요하는 일이었다. 만약 이 상태에서 적이라도 나타난다면?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으,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베로니카 힘내라, 힘내라!”
자기 자신을 응원하면서 또 한 발자국 움직였다. 긴장감이 몸을 휘감았다.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다리는 모래 바닥에 빠지는 것만 같았다. 본능적인 두려움은 확실히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아무것도 없는데 보통 때보다 몇 배는 더 민감해진 감각이 경보를 울렸다.
착각일까? 심한 두려움이 만들어낸 잘못된 경보일까? 아니다. 무언가 있다!
“흐앗!”
베로니카는 바로 몸을 던져서 바닥을 굴렀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방금 전 자신이 있던 자리를 무언가 스쳐지나갔다는 것은 알았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 무언가 무기 같은 것을 휘둘렀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방금 전 위험을 모면한 것은 순전히 요행이었다. 다음 공격에도 똑같은 요행을 바라는 것은 힘들었다. 공격이 어디서 날아올지는 모른다. 그럼 어디서 날아오든 상관없게 모두 막아버리면 된다. 재빠르게 마법을 사용해 보호막으로 몸을 보호했다. 거칠어진 호흡을 억지로 가다듬으며 다음 공격을 기다렸다.
쨍그랑! 보호막을 만들고 단지 몇 초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 유리처럼 깨지고 말았다. 악귀가 몇 마리나 달라붙어도 잠깐 동안은 공격을 막아줄 수 있는 보호막인데 단 일격에 깨진 것이다. 태어난 이후로 가장 빠르게 심장이 뛰는 중인 베로니카는 보호막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바닥을 굴렀다.
또 다시 부웅 하는 소리. 직감 덕분에 이번에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케흐흑, 재빠르구나.”
경망스러운 목소리였다.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악귀가 아니라 악마였다. 악마가 무리를 지어서 다니는 일은 드무니 근처에 있는 것은 한 마리뿐일 것이다. 베로니카는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항할 의지가 없어져서가 아니다. 악마를 속이기 위해서다. 저쪽은 그녀가 주변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모른다. 만약 주변을 두리번거렸다면 악마는 그녀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면 끝장이다. 지금보다 더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할 것이고 그러면 습격의 전조를 알아차릴 수가 없다. 저항조차 못하고 죽게 된다는 뜻이다.
식은땀이 흘렀다. 그것도 비 오듯이. 베로니카는 지금 상대하고 있는 악마가 허접한 수준이란 것을 알았다. 어둠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녀를 아직까지 죽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수준이 낮은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겁이 났다. 지금까지 뷔브르나 로아니스, 아르말락 같은 강력한 악마들과 싸웠지만 지금이 가장 겁이 났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랐으니까. 영웅들이 반드시 이길 거라는 확신이, 자신이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 대악마의 적자들을 상대로도 겁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실수하면 반드시 죽는다. 긴장으로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케흑, 난 요정을 죽일 때가 가장 즐거워. 케흐흑, 요정들 비명이 가장 아름답거든.”
아니, 왜 이 새끼도 요정 타령이야. 베로니카는 마른 침을 삼키며 온 정신을 귀에 집중했다. 중요한 것은 소리다. 소리를 들으면 악마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
탁탁 하는 발자국 소리. 지금 뛰었다. 몇 초 뒤에 여기까지 도달할까. 1초? 2초? 고민할 새는 없었다. 그럴 시간에 몸을 던져야 했으니까. 볼 수는 없지만 몇 번이나 바닥을 구른 탓에 옷이 더러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다음 공격이 날아왔다.
이번에도 몸을 던져 바닥을 굴렀다. 몇 바퀴나 굴렀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신물을 꾹 삼키며 억지로 마법을 발동했다. 다시 한 번 쨍그랑 소리가 나며 보호막이 깨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베로니카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분명 공격이 이어질 것이다. 침 한 번 삼키는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공격은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공격이 날아오는 일은 없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몸을 일으킬 때였다.
몸을 때리는 엄청난 충격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무언가 단단한 막대기 같은 것이 그녀의 배를 후려갈긴 것이다. 호흡이 가빠지고 위장 안에 든 것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안전하게 뒤에서 마법만 날렸던 베로니카가 버티기에 이런 육체적 고통은 너무나 강렬했다.
“우웁!”
목구멍 끝에서 맴돌던 신물이 입 안까지 밀고 들어오자 결국 참지 못하고 걸쭉한 것을 뱉어냈다. 베로니카는 켁켁 기침을 하면서 침을 질질 흘렸다. 고통스럽다. 이게 악마와의 싸움인가? 이 고통스러운 것을 영웅들은 매일 같이 했단 말인가?
“케흐흑, 알겠다, 알겠어.”
악마가 그 경망스러운 목소리로 웃었다.
“너, 아무것도 안 보이는구나. 케흐흑,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공격은 한 번도 하지 않고 자꾸 도망치기만 하다니. 케흐흑, 그걸 알았으니 이제 서두를 것 없지. 널 더 고통스럽게 괴롭혀줄게.”
베로니카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억울해서 죽을 수 없었다. 내가 왜 죽여야 하는데. 난 안 죽어. 난 절대로 안 죽어.
“커헉!”
또 한 번 내장을 뒤흔드는 고통이 휘몰아쳤다. 베로니카는 뒤로 발랑 넘어진 채로 손을 버르적댔다. 또 온다. 본능이 경고했다. 반사적으로 발동한 보호막은 한 번의 공격은 막아냈지만 그 다음 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베로니카의 몸이 붕 떴다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녀는 손으로 바닥을 밀어내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다음은 같은 광경의 반복일 뿐이었다. 몸을 던져 바닥을 구르거나 보호막으로 공격을 막았다. 그러나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막는 것보다 맞는 것이 더 많았다. 베로니카는 이제 몸 곳곳이 멍투성이가 됐다. 근육들이 찢어질 것 같았고 관절들이 삐걱거렸다. 호흡이 가빴고 식은땀이 비오듯 흘렀다.
누가 보아도 그녀가 불리했다. 악마는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며 심리적인 압박감을 주었다.
“케흑, 넌 다른 요정들처럼 비명을 지르지 않아서 아쉽군. 하지만 괜찮아. 난 요정을 울리는데 전문가거든. 케흐흑.”
이제 끝이다. 둘 다 같은 생각을 했다. 이 상황에서 당연히 드는 생각이었다. 베로니카는 힘겹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실력 있는 사냥꾼들은 말이야······.”
갑작스럽게 입을 여는 베로니카 때문에 악마가 잠깐 걸음을 멈칫거렸다. 그러나 곧 다시 움직였다. 무슨 헛소리를 하든 상관없었다.
“언제나 함정을 설치하지. 그리고 그 안으로 사냥감을 살살 유인해서 끌고 온단 말이야. 그런데 웃긴 건 사냥감은 그 사실을 모른다는 거야. 자기가 사냥꾼을 궁지에 몰았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자기가 함정에 빠진 거지.”
악마는 씩 웃는 베로니카의 얼굴을 보았다. 이 주변에 함정이 설치됐다는 말인가? 하지만 무슨 수로? 애초에 함정을 깔 시간조차 없었지 않나?
“아직 모르겠어? 지금 있는 그 자리가 네가 죽을 자리라는 소리야. 사냥하는 건 네가 아니야. 사냥꾼은 나야.”
허세다. 분명히 허세다. 악마는 콧방귀를 뀌며 베로니카에게 달려들었다. 허세가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베로니카는 깜짝 놀란 얼굴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입꼬리를 당기며 웃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내가 사냥꾼이라고.”
베로니카가 쿵 하고 세게 발을 굴렀다. 그 순간 바닥에서 무언가 솟아올랐다. 한두 곳이 아니었다. 수많은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솟아올랐다. 어둠 안에서도 주변을 볼 수 있는 악마의 눈에는 분명히 그랬다. 반사적으로 화들짝 놀랐지만 그의 몸이 마법에 의해 무자비하게 찢겨나가는 일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것은 단순한 빛의 기둥이었으니까. 이 어둠 안에서 아무 효과도 없는 그저 빛의 기둥.
“케흐흑, 뭐야? 아무것도 아니잖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지.”
베로니카는 검지로 악마를 겨누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 마력이 집중됐다. 악마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베로니카는 이 어둠을 투시할 수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무슨 수로 정확하게 자신을 겨냥하고 있지?
“내가 왜 바보 같이 바닥을 굴러다녔게? 네 공격 때문에? 그것도 맞지. 하지만 꼭 그것 때문은 아니야.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서였어. 내가 마력을 뿌리면 바로 반응해서 발동할 수 있게 만든 마법진 말이야. 잠깐 사이에 그려야하니까 큰 마법은 쓸 수 없지만 그 정도 마법은 거뜬하지.”
빛 때문이다. 악마는 깨달았다. 베로니카가 자신을 겨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빛 때문이다. 이 공간의 어둠은 잉굴라트의 사술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마법의 빛조차 그 힘을 잃었다. 하지만 빛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서 주변을 비추지 않는 것뿐이지 빛 자체는 존재했다. 빛이 있는 그 공간만큼은 흰색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곳의 어둠은 검은 도화지와 같다. 그리고 악마는 그 검은 도화지 위를 돌아다니는 그림자고. 하지만 만약 도화지의 일부를 흰색으로 물들인다면? 무수히 많은 빛의 기둥들로 일정한 공간을 흰색으로 바꾸어버린다면? 악마가 그 위를 지날 때 형체만은 드러나지 않을까?
“케흐흑! 헛수고다, 헛수고! 이따위 것으로 뭘 할 수 있다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빛의 기둥으로 뭘 할 수 있어!”
“아니, 그거면 충분해.”
베로니카의 손가락이 정확히 악마를 겨누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주먹만큼 커진 마력 덩어리가 있었다. 악마는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어디로 도망쳐도 그는 다시 어둠 뒤에 몸을 숨길 수 없었다. 베로니카는 망설임 없이 마법을 발사했다. 그리고 그것은 악마의 미간을 정확히 관통했다.
일격이었다. 머리가 완전히 박살난 악마는 수많은 빛의 기둥 아래에서 숨이 끊어졌다. 베로니카는 그런 악마를 향해 씹어뱉듯 말했다.
“별 것도 아닌 게 까불어. 내가 영웅들 따라다니면서 먹은 짬이 얼만데?”
베로니카는 바닥에 쓰러진 악마가 떨어트린 봉을 집었다. 엄청 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작아서 그녀가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호신용으로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야, 이거 가져간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