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27화 (127/199)

127

“키에에엑!”

라우렌시오가 손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불꽃이 일어나고 바람이 불었다. 불꽃은 악귀들을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태웠으며 바람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들의 살점을 찢고 뼈를 잘랐다. 악귀들의 공격은 거대한 바위에 달걀을 던지는 것과 같았다. 아무리 부딪쳐도 바위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는 것이다.

마법으로 열댓 마리의 악귀들을 해치운 후에 남은 것들은 직접 검을 들고 상대했다. 라우렌시오의 현란한 검술은 그가 요정기사라 불리게 된 이유였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악귀들의 목을 떨어트리고 그들의 거짓된 생명을 빼앗았다. 잉굴라트의 사술로 되살아난 악귀들은 그제야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흠, 이 근처에는 아무도 없는 건가.”

라우렌시오는 한숨을 내뱉었다. 갑작스럽게 이곳에 떨어진 것까지는 괜찮은데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영웅들이야 어디에 떨어지든 알아서 잘 살아남겠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성기사들이었다. 그들의 이 시대의 성기사치고 강력하지만 그들만으로 잉굴라트를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어중간한 강력함이 위험 요소였다. 만약 그들이 이곳의 악마들에게 당한다면? 그래서 잉굴라트의 부하가 되어 다시 나타난다면? 귀찮은 일은 늘리지 않는 것이 제일이었다. 라우렌시오는 일단 성기사들부터 찾기로 했다.

“아가씨야 마법사니까 잘 할 거고.”

베로니카에 대한 믿음은 그녀가 마법사라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라우렌시오가 딱히 마법사가 성기사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마법사인 동시에 성기사인 그는 이런 변칙적인 상황에서 베로니카가 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정말 지독한 어둠이군.”

자기 몸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 이곳으로 떨어지기 전에 있던 곳도 어두웠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라우렌시오는 마법으로 빛을 만들어냈지만 아무 효과도 없는 것을 보고 몸 안의 신성력을 운용했다. 요정의 뛰어난 시력과 충만한 신성력이 결합하자 그런대로 시야가 확보됐다. 그래도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자신이 이 정도인데 성기사들은 정말 자기 발밑만 보고 다니는 수준일 것이다.

한바탕 악귀들을 학살하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라우렌시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성기사들을 찾으려고 애썼다. 지하무덤은 넓었다. 트라바는 이 근방에서 사악한 것들과 수많은 싸움을 했고 자연히 많은 양의 시체들이 발생했고 그것들을 처리할 공간을 마련해야 했다. 사악한 것들의 시체를 성벽 주변에 방치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숨을 쉬기 힘들어했다.

아무리 라우렌시오라도 이곳의 지리를 모두 알 수는 없었다. 그는 애초에 자신이 떨어진 곳의 위치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직감을 믿고 전진할 뿐이었다. 하지만 별로 바람직한 생각은 아니었다. 아무리 걸어도 그가 만나는 것은 성기사들이 아니라 악귀들뿐이었으니까.

그들을 학살하고 전진하고 또 한 번 학살하고 전진하고 그것을 여러 번 반복했다. 라우렌시오의 육체는 아직 활력이 넘쳤으나 그의 정신은 짜증을 내고 있었다. 이 의미도 없는 짓거리를 언제까지 해야 하지?

“제기랄, 인내심을 시험하는군.”

짜증이 나서 벽을 발로 한 번 찼을 때였다. 갑자기 쿠구궁 소리가 나면서 벽의 일부가 회전했다. 라우렌시오는 놀란 얼굴로 벽을 쳐다보았다. 벽이 반쯤 회전하면서 공간이 생겨났다. 잘은 모르지만 방금의 발차기로 숨겨져 있던 통로를 발견한 것 같았다.

라우렌시오는 작게 환호하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심각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얼굴을 찡그리며 주변을 둘러보자 수많은 시체들이 있었다. 이곳은 지하무덤이었으니 시체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시체들의 상태였다. 무려 백 년이면 살점이 모두 썩어 문드러지고 뼈만 남아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시체들은 흉한 모습이기는 해도 뼈 곳곳에 살점이 아직 남아있었다. 무언가 사술이라도 부린 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잉굴라트의 짓이군.”

시체들은 목소리에 반응했다. 죽은 듯 가만히 있던 시체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대부분 악귀들의 시체였는데 거구의 시체 하나는 악마였다. 본래부터 강력한 힘을 가진 악마가 잉굴라트의 사술로 인해 되살아났으니 얼마나 더 강해졌을 것인가.

“덤벼라, 이 사악한 것들아!”

영웅의 외침은 악귀들을 자극했다. 이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악마가 뼈만 남은 손을 휘두르자 악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라우렌시오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살아있을 때보다 느려졌지만 공격은 더욱 묵직해졌다. 라우렌시오의 손에서 불꽃이 일었다. 불을 뿜는 용처럼 사방으로 불꽃을 흩뿌린 후에 검을 뽑았다.

불꽃에 집어삼켜졌던 악귀들은 고통을 모르는 것처럼 움직였다. 물론 몇 발자국 움직이지 못하고 몸이 으스러졌지만. 라우렌시오는 그 모습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백 년 전 바이올렛 다음 가는 마법사였던 그가 날린 마법이 악귀들을 일격에 절명시키지 못한 것은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사악한 기운이 마법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있는 것이다.

라우렌시오는 마법 대신에 검을 뽑았다. 그리고 몸 안의 신성력을 검에 집중시켰다. 마법보다는 검술이 더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날카로운 검으로 악귀 하나의 목뼈를 잘랐을 때였다.

“전능자를 위하여!”

“승리를 쟁취하라!”

우렁찬 고함과 함께 무언가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열댓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서 악귀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은 보병 부대 사이로 돌진한 기병들처럼 악귀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양떼를 습격하는 늑대들 같기도 했다. 악귀들이 저항했지만 그들의 이빨은 단단한 방어구를 뚫을 수 없었으며 그들의 뼈는 번쩍이는 검을 막아줄 수 없었다.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악귀들이 뼛조각과 질척한 살점으로 변했다. 그리고 성기사들은 즉각적으로 상대를 수정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뼈만 남은 거대한 악마였다. 악마의 머리뼈는 이 어둠에도 지지 않고 초록색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머리뿐이었지만 악마가 손에 들고 있던 뼈로 만든 창으로 바닥을 쿵 치자 초록색 불꽃이 온몸을 휘감았다.

단지 위협용이 아니라 정말로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불꽃이었다. 그것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악마에게 새로운 갑옷이 되어주었다. 초록색으로 빛나는 불꽃의 거인이 창을 크게 휘둘렀다. 성기사들은 신성력으로 보호막을 만들어냈으나 일격에 깨졌다. 그러나 그 사이에 그들은 안전하게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갑옷과 신성력으로 몸을 보호한다고 해도 불꽃의 거인과 싸우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그럼에도 성기사들은 두려움 없이 돌격하려고 했다. 그들의 전능자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심은 어떠한 두려움으로도 무력화시킬 수 없었다.

“이 시대의 성기사들은 수준이 바닥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성기사들의 저돌적인 돌격을 보던 라우렌시오가 웃었다.

“전부 다 그런 건 아닌 모양이군.”

그가 도와주지 않더라도 성기사들은 되살아난 악마를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잉굴라트와의 싸움을 목전에 두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전력을 보존해야 했다. 라우렌시오는 손을 뻗어 악마를 겨누었다. 그의 손에서 서늘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성이 난 것처럼 창을 휘두르던 악마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단순히 느려지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불꽃의 기세가 약해지고 뼈가 얼어붙고 있었다. 성기사들은 뒤를 돌아보았다. 라우렌시오였다. 그가 마법으로 냉기를 뿌려대고 있었다.

“움직임은 내가 막겠다! 해치워!”

성기사들은 대답도 없이 다시 싸움에 집중했다. 신성력이 가득 담긴 무기는 악마에게 효과적이었다. 뼈를 부수고 불꽃을 꺼트렸다. 라우렌시오와 성기사들의 협공을 받은 악마는 곧 쓰러졌고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

“다친 사람은 없나?”

라우렌시오는 성기사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라우렌시오를 보고만 있었다.

“당신들을 다시 만나게 되서 다행이야. 혹시 낙오된 사람은 없나? 없으면 이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을 찾아보자고. 잉굴라트와 싸우려면 한 명이라도 많은 게······.”

“우리는 마법사 따위의 말은 듣지 않는다!”

“······뭐?”

“어디 감히 마법사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냐!”

라우렌시오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었다. 이 새끼들이 미쳤나? 뭐라는 거야? 물론 그는 이 시대의 성기사들이 마법사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백 년 전에는 성기사와 마법사가 서로 서로 협력했지만 지금은 마법사를 얕잡아보는 것이 생각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어린 친구가 어찌 마법 같은 사술에 빠졌을꼬, 에잉 쯧. 마법보다는 검술이 든든하지, 아암.”

가장 나이가 많은 성기사가 혀를 찼다. 그래봤자 라우렌시오보다 어리겠지만.

“거기에 이 친구 요정이로군! 요정에다 마법사라! 하!”

그건 또 언제 봤대. 라우렌시오는 기가 차서 말했다.

“아니, 요정인 건 또 무슨 문제야?”

“우리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는 성배기사의 정신을 잇는 자들이다! 성배기사께서 요정은 믿지 말라고 하셨지!”

엔디미온이 후배들 다 배려놨네. 가만히 보니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에는 요정이 한 명도 없었다. 정말 착실하게 성배기사의 말씀을 따르는 집단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성배기사는 요정을 차별하지는 않았는데.”

성배기사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것은 그와 함께 활동했던 요정기사일 것이다. 성배기사가 요정을 싫어하기는 했어도 차별하지는 않았다. 모든 요정을 싫어했던 것도 아니고. 그리고 애초에 그 사실은 백 년 전에도 몇몇 사람들만 알던 것인데 이들이 그 사실을 왜 알고 있단 말인가?

“그래, 우리도 그래서 요정을 차별하지는 않는다. 다만 싫어할 뿐이지!”

잘못된 가르침이 멀쩡한 성기사들을 요정혐오자로 만들고 말았다. 엔디미온의 죄가 컸다. 라우렌시오는 이제 더 할 말 없다는 듯이 저들끼리 성큼성큼 걸어가는 성기사들의 뒤를 얼른 쫓아갔다.

“잠깐! 너희들끼리 가면 위험해! 이곳은 잉굴라트의 사술의 영향을 받고 있다! 바른 길을 찾으려면 나와 같이 가야 해!”

성기사들은 그 외침을 무시했다. 라우렌시오는 혀를 차며 그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고 십 분 뒤에 다시 그들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 짓을 몇 번 더 반복했다.

“······.”

“내가 말했지, 길을 찾으려면 나랑 같이 가야 한다고.”

같은 곳을 몇 번이나 뱅뱅 돌던 성기사들은 드디어 라우렌시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잉굴라트의 사술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길을 잃게 만들었다. 하지만 라우렌시오의 마법이 있으면 사술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성배기사께서 말씀하시길, 세상에는 착한 요정도 있다. 다만 드물 뿐.”

“좀 닥치고 따라와.”

“알겠다.”

라우렌시오는 자신이 아이들을 인솔하는 선생님이 된 것 같았다. 성기사들은 근엄한 얼굴로 라우렌시오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한참 전진했지만 그 사이에 다른 사람들과 만나지는 못했다. 잉굴라트와 싸우려면 모두가 모여야 했다. 라우렌시오는 추적 마법으로 다른 사람들의 위치를 찾아보려고 했다. 그가 정신을 집중했지만 이곳의 어둠이 추적을 방해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정면에 막다른 길이 나타났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다른 길은 없었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내가? 라우렌시오는 납득할 수 없어서 정면의 벽을 손으로 만졌다. 그게 실수였다. 조금만 침착했다면 하지 않았을 실수.

“너희들이 제일 먼저 왔구나.”

세상이 반전했다. 어떤 빛도 뚫을 수 없는 어둠이 뒤집혀 환한 빛이 되었다. 광활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끝도 없이 늘어선 시체들의 군세였다. 숫자가 몇이나 될까? 천 마리? 만 마리? 셀 수도 없었다. 겨우 열 몇 명이서 상대하기에는 너무 많았다.

그리고 군세의 중심에는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자가 있었다. 눈을 번득이면서 침입자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성기사들은 갑자기 변한 주변 풍경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고 라우렌시오는 허탈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씨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