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라우렌시오는 험한 말을 별로 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누구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코를 간질이는 먼지에 재채기가 나오는 것처럼 반사적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적들과 그들을 지배하는 영혼군주 잉굴라트. 침착함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강대한 존재였다. 그가 지하무덤에 숨어 세력을 불리고 있을 거라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는 일이었지만 설마 이 정도까지 군세를 불렸을 줄이야.
어디를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게 늘어선 잉굴라트의 군세 때문에 모두가 바짝 긴장했다. 영혼군주가 부리는 병사들은 모두 구역질나는 냄새와 사악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이미 한 번 죽었다가 잉굴라트의 힘에 의해 되살아난 존재들이었다.
악마와 악귀들의 시체도 많았지만 군세의 대부분은 이리저리 몸이 뒤틀린 이형의 존재들이었다. 라우렌시오는 그들이 트라바에 살던 사람들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잉굴라트가 이만큼이나 거대한 군세를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은 도시 곳곳에 묻힌 시체들을 되살렸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놈. 죽은 자는 마땅히 안식을 얻어야 했다. 그들의 안식을 방해하는 짓은 어떤 이유에서든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내 거처가 마음에 들기 바라겠다, 전능자의 개들이여.”
어스름한 새벽의 물기 어린 안개처럼 축축하며 죽은 자의 숨결처럼 스산한 목소리였다. 성기사들은 자신의 무기를 꼭 쥐면서 성호를 그었고 라우렌시오는 고개를 들어 잉굴라트의 모습을 보았다.
악마답게 거인과 같은 덩치를 가지고 있었고 손에는 뼈로 만든 지휘봉을 들고 있었다. 지휘봉 위의 뼈만 남은 손가락은 검은색 수정을 꼭 쥐고 있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영혼군주의 군세에 끊임없이 힘을 전하고 있었다. 잉굴라트의 몸은 다른 악마들과 다르게 검은색 로브로 가려져 있었다. 머리에는 강철로 만든 투구를 쓰고 있었고 거기에 달린 쇠사슬을 아래로 치렁치렁하게 내리고 있었다.
투구 안에서 새빨간 안광이 빛나고 있었으니 누구나 대악마의 적자라고 인정할 만한 생김새였다. 성기사들 역시 잉굴라트의 위압적인 모습에 잔뜩 긴장했다. 하지만 라우렌시오는 지금 당황하고 있었다. 저것은 그가 기억하는 잉굴라트의 모습이 아니었다.
“잉굴라트! 이 비열한 사령술사! 같잖은 사술로 날 속이려 들지 마라! 네 본모습을 드러내!”
잉굴라트가 고개를 움직여 라우렌시오를 응시했다. 그는 불타는 듯한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백 년의 시간은 아주 길지. 그 긴 시간 동안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나. 내 본모습을 드러내라고? 날 봐라, 요정기사야. 이게 지금의 내 본모습이다.”
잉굴라트가 자신의 육체를 감상하라는 듯 두 손을 들어보였다. 로브의 소매가 젖혀지고 앙상한 손목뼈가 드러났다. 라우렌시오가 기억하는 잉굴라트의 모습은 거대한 덩치를 이용해 군세의 선두에 서서 직접 적의 목숨을 수확하며 그 자리에서 즉시 시체를 되살리는 야만적인 사령술사였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을 보라. 말라비틀어진 듯한 손가락뼈, 바람이 불면 로브가 몸에 달라붙어 드러나는 갈비뼈의 윤곽, 강철 투구 안에 있는 잿빛의 머리뼈까지. 건장했던 육체는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앙상한 겨울나무 같은 모습뿐이었다.
대체 백 년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런 꼴이 됐단 말인가. 라우렌시오는 다른 악마들과 다르게 오히려 더 약해진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진심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대체 꼴이 왜 그런 거냐? 이해할 수가 없군. 설마 이 지하에서 너무 많은 힘을 써서 그런 거냐?”
군세의 규모를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만큼 많은 군세를 만들어내고 또 유지하려면 아무리 잉굴라트라도 많은 힘을 소모해야 했으니까.
“내가 대전사 칼라딘과 싸웠을 때.”
잉굴라트는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나?”
“내가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흐흐흐 하는 웃음소리가 소름끼쳤다.
“그때의 나는 수많은 군세를 이끌고 있었다.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많았지. 아마 악마들 중에서 내 세력이 가장 컸을 거야. 내가 가진 힘의 특성상 당연한 일이지. 나는 한 손에는 도끼를 들고 다른 손에는 검을 들고서 성기사들의 머리를 깨부수고 머리 없는 시체들을 그 자리에서 되살렸다. 내 세력은 싸우면 싸울수록 불어났지. 그때의 나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강인한 육체, 강력한 권능, 강대한 세력. 전부 다 가졌으니 거칠 것이 없었지.”
라우렌시오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잉굴라트의 군세는 조금도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마치 이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다행인 일이었지만 이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열댓 명의 성기사들과 요정기사 한 명만으로 과연 막아낼 수 있을까?
그가 걱정하는 사이에 잉굴라트가 다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나는 칼라딘을 이기지 못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언제나 승리했다. 승리하고 승리하며 또 승리했다. 그런 나에게 있어서 그 한 번의 패주가 어떤 의미였을 것 같나? 싸움이 끝나고 내 육신에 남은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날이 상한 검과 부러진 도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영혼의 상처가 나를 괴롭게 했다. 단 한 번의 패배, 그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나는 겁쟁이처럼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그리고 깨달았지.”
살점 하나 남지 않은 매끈한 머리뼈의 가장 어두운 곳, 눈알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새빨간 안광은 금방이라도 끓어넘치려는 용암처럼 넘실댔고 사악한 기운은 먹잇감을 노리는 승냥이처럼 사나웠다.
“부족했던 것이다!”
라우렌시오는 깨달았다. 잉굴라트는 단지 모습만이 달라진 게 아니었다. 그를 구성하는 심지, 단단한 뼈 안에 들어있는 그 영혼이 달라진 것이었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잉굴라트인 동시에 새로운 존재였다. 사령술사 잉굴라트가 아니라 영혼군주 잉굴라트였다.
“각오가! 강해지기 위해서 내 살과 뼈를 기꺼이 내주겠다는 각오가!”
쩌렁쩌렁한 외침은 모두의 귀를 찢을 듯한 기세였다. 영혼군주는 보이지 않는 심장을 움켜쥐려는 것처럼 앙상한 손가락뼈를 움직였다.
“또한 부족했던 것이다!”
잉굴라트가 드디어 한 발자국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수많은 군세가 한 발자국 움직였다. 일사분란하게 동시에 내딛는 한 발자국은 거대한 소리가 되어 성기사들의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집념이! 이기기 위해서 무엇이든 하겠다는 집념이!”
쿵! 쿵! 쿵! 군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동시에 내딛는 발걸음은 거인의 것보다 더 무거웠다. 성기사들은 침을 삼키며 각자의 무기를 들었다. 그들은 이 싸움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잘 알고 있었다. 승산은 낮았고 분명히 이곳에서 모두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싸우지 말아야 할 이유는 아니었다.
“날 봐라! 라우렌시오! 내 모습을 봐라! 나는 승리하기 위해 내 살과 뼈를 내줄 각오가 되어 있다! 이기기 위해서 무엇이든 하겠다는 내 집념이 나를 영혼군주로 만들었다! 나는 많은 것을 잃었지만 또한 많은 것들을 얻었다!”
영혼군주의 군세가 점점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성기사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들의 실력은 특등기사 이상이며 단신으로 악마를 상대할 수 있지만 그래도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아무리 우수한 실력이라도 압도적인 물량을 상대로는 의미가 없었다.
잉굴라트는 그들의 반응에 만족했는지 흥분을 누그러트리고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너희들이 있는 공간을 봐라. 아무것도 없는 이 백색의 공간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곳은 지하무덤 안인데 어째서 이런 공간이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나 많은 군세를 이곳에 전부 수용할 수 있었을까?”
성기사들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라우렌시오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잉굴라트는 그가 대답하기 전에 먼저 말했다.
“그것은 이곳이 내가 만들어낸 공간이기 때문이지. 이곳은 내 의지에 따라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다. 때로는 사토가 바람을 타고 날리는 사막일 수도 있고.”
갑작스럽게 부는 황색의 모래바람과 부드럽게 아래로 발을 잡아당기는 모래바닥, 그리고 밑동이 가는 거대한 바위까지. 어디를 보아도 황량한 사막의 모습이었다. 성기사들이 놀라는 사이에 잉굴라트가 또 한 번 사술을 부렸다.
“때로는 아무것도 없는 바다 위일 수도 있고.”
물이 차올라 발목을 적셨다. 처음에는 발목이었지만 빠르게 차오르는 바닷물은 이제 정강이를 적시고 있었다. 성기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이 정도 빠르기라면 잠시 뒤면 그들 모두가 머리끝까지 물에 잠길 터였다. 잉굴라트가 웃었다.
“칼바람이 부는 설산 위일 수도 있지.”
물에 젖었던 몸을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성기사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싸라기눈이 쏟아지는 이곳은 지금 메마른 설산 위였다.
“나는 이곳의 신이다. 너희들은 신역에 침범한 불신자들이고. 이번에는 어떤 곳을 보여줄까. 무시무시한 용암이 끓는 화산? 아니면 불꽃처럼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열국?”
세상은 다시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공간으로 변했다가 꾸물거리며 다른 모습으로 변하려고 했다. 하지만 변신을 꾀하려던 공간은 무언가에 잡아찢긴 것처럼 풍경이 무너지며 맨얼굴을 드러냈다.
“간악한 사술로 남을 현혹시키려고 하지 마라. 우리는 전능자의 종이며 그 거룩한 뜻을 받드는 자들이다.”
라우렌시오의 빛나는 손이 불꽃을 뿜으며 한때 트라바의 시민이었던 자들을 불태웠다. 뜨거운 열기는 사악한 것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들의 부정을 태우고 사악한 기운을 정화했다. 수십 명의 시체 병사들이 그토록 바라던 안식을 맞았다.
발자국 소리가 나며 성기사들이 전진했다. 미리 정한 것도 아니건만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라우렌시오의 좌우로 늘어섰다. 그리고 각자의 무기로 영혼군주의 군세를 겨누었다. 무모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래서 가치가 있었다. 기꺼이 목숨을 버려야 할 가치가. 사술에 붙잡힌 망자들에게 안식을 돌려주고 세상에 닥칠 위험을 이곳에서 대비한다. 이토록 숭고한 목적이건만 어찌 목숨을 아끼겠는가? 그것은 성기사의 덕목이 아니었다.
“겨우 열댓 명으로 무모한 싸움을 하려고 하는구나. 나로서는 기뻐할 일이지. 너희를 죽이고 내 부하로 삼겠다. 그리고 너희는 이 영혼군주가 다시 한 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선봉에 서서 내 이름을 널리 알리는 기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잉굴라트는 라우렌시오의 말을 무시했다. 마법사이자 기사인 그의 무용은 익히 알고 있었다. 요정기사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부하들을 쏟아부어야 할지도 알고 있엇다. 하지만 백 년 전의 영웅의 시체를 얻기 위해서는 마땅히 감수해야 할 손해였다. 잉굴라트는 들고 있던 지휘봉으로 적들을 가리켰다.
군세가 일시에 돌격했다.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와 알아듣기 힘든 고함. 모두가 전투의 흥분으로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이미 한 번 일그러졌던 공간의 구석이 찢어지며 무언가 발사됐다. 그것은 황금빛 광선이었고 직선으로 날아가며 시체 병사 수십 명을 일소했다. 트라바 시민으로 만들어진 병사들은 악마나 악귀에 비해서 몹시 약했지만 그래도 그들을 수십 명씩 지워버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잉굴라트는 공간을 찢고 들어온 불청객을 보았다. 불청객은 잠깐 주문을 외우다가 점멸 마법으로 순식간에 라우렌시오의 곁으로 이동했다. 성기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요정 마법사를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제가 너무 늦게 온 건 아니지요?”
베로니카는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 모습을 보며 라우렌시오가 대답했다.
“딱 맞게 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