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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29화 (129/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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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없나요? 우리들뿐이에요?”

베로니카의 질문에 라우렌시오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영웅들이 모두 모였다면 두려울 것이 없었겠지만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몹시 우울한 상황이었지만 베로니카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다른 영웅들은 없지만 그래도 여기에는 라우렌시오가 있지 않은가. 비다르나 라이오넬이 있었다면 더 절망스러웠을 것이다. 그 두 사람은 다수와의 전투보다는 하나의 강력한 적을 상대하는데 더 적합하니까.

마법사가 두 명이나 있으니 다른 영웅들이 도착할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베로니카의 마력이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점멸 마법에 제법 익숙해진 모양이군요. 여기까지 한 번에 거리를 좁히는 것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아, 그거요? 사람이 극한에 몰리면 안 되던 것도 되더라고요. 솔직히 여기까지 걸어올 자신이 없었어요. 어디 이상한 곳에 처박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성공했네요.”

한 번의 완벽한 성공은 그 다음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법이다. 베로니카는 조금만 더 연습을 하면 점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유일한 마법사가 될 것이다. 라우렌시오는 어린 제자의 성취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다쳤군요.”

“악마를 만나서요. 약한 놈이라서 겨우 물리쳤는데 강한 놈이었다면 죽었을지도 몰라요.”

“내가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소만.”

라우렌시오와 베로니카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성기사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는 수염이 덥수룩한 난쟁이 기사였다. 하지만 난쟁이들 중에서 키가 큰 축에 속해서 다른 기사들과 비교해도 머리 하나 정도 작을 뿐이었다.

“나는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의 성기사 겸 종군사제요.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소. 신성력을 나누어주는 것 말이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베로니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난쟁이 성기사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신성력을 나누어주었다. 돌이 짓누르는 것처럼 무거웠던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악마에게 얻어맞아서 생긴 멍도 차츰 색이 옅어졌다.

가끔씩 엔디미온이 줬던 성수에 비하면 대단한 이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몸상태를 낫게 하는데 충분히 효과가 있었다. 베로니카가 우와 하면서 감탄하는 사이에 라우렌시오가 난쟁이 성기사에게 말했다.

“요정과 마법사는 싫어한다며?”

“대의를 위해서 사사로운 감정은 접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지. 지금처럼.”

“말은······.”

라우렌시오가 웃었다. 그러나 곧 얼굴을 굳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잉굴라트의 군세가 더욱 바싹 다가와 있었다. 잠시 뒤면 충돌한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수많은 숫자가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질량이었다. 둑이 무너지고 홍수가 났을 때 모든 것이 쓸려나가는 것과 같다. 성기사들이 군세와의 충돌을 버틸 수 있을까? 모두 쓸려나가지 않을까?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걱정만으로 상황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라우렌시오는 결심을 굳혔다. 그는 성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들끼리 떨어지지 마라. 서로가 서로를 지켜. 그리고 베로니카를 반드시 보호해라. 너희도 알겠지만 수적 열세를 이겨내려면 마법사가 꼭 있어야 해.”

성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방금 전 베로니카의 마법을 보고서 그녀의 강력함을 알았다. 한 마리라도 더 많은 적들을 죽이려면 베로니카를 반드시 보호해야 했다. 아까 전의 그 난쟁이 성기사가 말했다.

“당신은 어쩔 셈이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성기사들은 라우렌시오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모두를 지키는 벽이었고 어린 양들을 보호하는 울타리였으며 기꺼이 가시밭길 위를 달리는 고행자의 뒷모습이었다. 그들은 라우렌시오게서 옛 영웅의 모습을 보았다.

“건투를 빈다.”

“당신도.”

잉굴라트의 군세는 3열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전열은 트라바 사람들의 시체로 만들어진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영혼군주의 부하들 중에서 가장 약했지만 대신에 숫자가 가장 많았다. 기이하게 뒤틀린 이형의 모습을 한 그들은 이미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잠시 뒤면 충돌한다. 성기사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고서 허공에 성호를 한 번 그었다. 그리고 다 함께 전능자를 향해 기도했다.

낮은 목소리로 다 함께 전능자를 향해 올리는 기도는 엄숙하며 또한 경건했다. 그들의 몸에서 은색의 빛이 흘러나오며 안개처럼 그들을 주변을 떠돌며 점차 짙어졌다. 그리고 시체 병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그들에게 달려들 때.

“전능자는 내 영혼의 주인이시고 나는 거룩한 자의 종이니라. 종복으로서 주인의 뜻을 받잡으니 우리는 이곳에 천년왕국의 초석을 세우리라!”

둥근 구슬처럼 한곳으로 뭉치던 빛의 안개가 사방으로 질주했다. 신성한 빛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시체 병사들의 허리를 절단했다. 빛에 의해 허리가 잘린 시체 병사들은 그대로 기우뚱하며 몸이 쓰러지는 듯 하다가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빛의 안개는 수많은 시체 병사들을 태우고 정화하며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성기사들의 믿음과 신앙이 만들어낸 이적은 사방으로 이십 발자국 정도 떨어진 거리까지 내달리다가 위를 향해 완만한 각도로 솟아올랐다. 빛은 성기사들의 머리 위의 한 점을 향해 움직였고 곧 거대한 돔이 되어 그 안에 있는 자들을 보호했다.

시체 병사들이 성을 내며 달려들었지만 빛으로 이루어진 성역을 통과하는 순간 비명과 함께 타올랐다. 그래도 그들은 괴성과 함께 성기사들을 향해 달렸다. 일부는 타버리고 일부는 만신창이가 된 채로 성역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곧 성기사들의 무기에 안식을 맞이할 뿐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안식을 위하여 성역으로 달려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잉굴라트의 사술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

“전능자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성기사들은 성역 안에서 시체 병사들과 싸웠다. 대부분의 시체 병사들은 성역 안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육체가 타버렸기에 직접 죽여야 할 적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들이 상대해야 할 적들의 숫자가 늘어날 것이다. 시체 병사들은 잉굴라트 군세에서 가장 약한 축에 속했다. 그들이 모두 죽고 나서 악마와 악귀들이 싸움에 가세하는 그때부터가 진짜였다.

악귀들 역시 성역 안으로 들어오면서 다수가 타죽겠지만 그래도 일단 들어오면 시체 병사들보다 위협적이었고 악마들은 성역에 의해 힘이 약해지기는 해도 타죽지 않고 들어올 것이다.

지금부터 악마와 악귀들의 숫자를 줄여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라우렌시오와 베로니카뿐이었다.

“이거나 먹어라!”

베로니카는 강력한 위력의 마법을 군세의 후열을 향해 날렸다. 악마와 악귀들이 시체 병사들 뒤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마법을 쓸 때마다 가벼운 현기증이 났지만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정신을 다잡았다. 마력이 떨어져 갈 때면 난쟁이 성기사와 또 다른 성기사가 그녀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힘을 보충해주는 것이다.

“마르지 않는 샘 같네요, 이거!”

혼자서 강력한 마법을 마구잡이로 날리며 적들을 쓸어버리는 것은 마법사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봤을 로망이었다. 베로니카는 보통 때라면 한 번만 써도 숨을 헐떡였을 마법을 마음껏 날리면서 강렬한 희열을 느꼈다.

“안전한 곳에서 마법만 날리는 것도 괜찮겠지만 내 친구들이 올 때까지 버티려면 미끼가 있어야 하겠군요.”

성기사 두 명에게 힘을 나누어 받는 베로니카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한 마법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날리던 라우렌시오는 성역의 바깥쪽을 향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베로니카가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어쩌시려고요!”

“아까도 말했지만, 해야 하는 일을 하려는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 정도 싸움에서 죽을 것 같았으면 백 년 전에 진즉 죽었을 겁니다.”

라우렌시오는 검을 들고서 성역 바깥으로 점멸 마법을 사용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적을 향해서 시체 병사들이 달려들었지만 번개 같은 검술에 모두 토막이 나서 죽을 뿐이었다. 라우렌시오는 다시 한 번 점멸 마법을 사용했다. 이제 그는 악귀들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악귀들은 본래부터 고약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지만 잉굴라트의 사술로 되살아난 그것들은 한층 더 기이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일부는 살이 모두 썩어버리고 앙상한 뼈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위협적으로 보였다.

“덤―벼―라!”

숨을 한껏 들이켰다가 목소리와 함께 내뱉었다. 요정의 몸에서 나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커다란 외침은 주변의 적들에게 충분한 도발이 되었다. 악귀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자 자세를 낮추고 검을 더욱 힘껏 쥐었다. 바닥을 박차고 뛰어나가는 그에 의해 악귀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육체가 뒤틀려 기이한 생김새가 된 것들은 검으로 심장을 찌르고 뼈만 남은 것들은 검 손잡이 끝의 품멜로 머리뼈를 박살냈다. 한참 싸우다 적들이 너무 많이 몰려든 것 같으면 강력한 마법으로 한꺼번에 쓸어버렸다.

이런 식의 싸움은 아무리 라우렌시오라도 위험했다. 뒤를 봐줄 사람 한 명 없이 적진 한가운데서 일신의 용력만을 믿고서 싸운다니. 죽음이 두렵지 않은 자만이 할 수 있었다. 그럼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인가? 아니었다. 백 년을 넘게 살았어도 죽음은 언제나 두려운 것이었다.

백 년 전의 영웅은 이런 식의 싸움에 익숙했을 뿐이다. 성기사들은 언제나 불리한 싸움만을 했다. 단 한 번도 숫자로 적들을 압도한 적이 없었고 끝까지 몰리고 몰려 극한의 상황에서 처절하게 승리를 쟁취했다. 이기기 위해서는 때로는 도박을 해야 했고 위험을 향해 몸을 던져야 했다. 그럼에도 언제나 이기는 것도 아니었고 때로는 지기도 했다. 하지만 악착 같이 얻어낸 승리를 통해 착실히 전진했다. 아주 느리고 느린 걸음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진한다는 것이다. 물러서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도착할 수 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싸우고 승리하며 악을 몰아낼 것이다. 그것을 위해 싸우는 자들이었으니까.

“모두 덤벼라! 요정기사 라우렌시오가 여기에 있다!”

성기사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라우렌시오는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적들을 도발했다. 그리고 그들과 싸우고 또 죽이며 착실히 숫자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한 번 되살아난 악귀들이라고 해도 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라우렌시오의 몸에 차츰차츰 자잘한 상처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아무리 옛 영웅이라고 해도 불멸의 육체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상처를 입고 고통을 느꼈다. 살아있는 요정이니까. 상처 입기 쉬운 요정이니까.

‘잠깐 성역으로 돌아가서 숨을 한 번 돌려야겠어.’

점멸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잠깐 정신을 집중할 때였다. 갑자기 머리 위로 검은색 광선이 떨어졌다. 요정의 날카로운 감각에 의해 얼른 피하기는 했지만 바닥을 부수고 생성된 강력한 충격파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라우렌시오는 바닥을 한 바퀴 구르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를 갈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그를 향해 나른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왜? 그럼 내가 끝까지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지금까지 널 가만히 보고만 있던 건 일종의 배려야. 그 잘나신 요정기사가 아무것도 못하고 죽으면 체면이 안 서잖아.”

잉굴라트가 지휘봉을 휙 휘두르자 대기하고 있던 악마들이 움직였다. 그것들은 길을 막고 있는 악귀들도 자비 없이 날려버리고 라우렌시오를 향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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