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30화 (130/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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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왜 안 덤비나 했다.”

라우렌시오는 이를 갈았다. 잉굴라트 입장에서 요정기사는 가장 먼저 죽여야 할 적이었다. 이곳에서 그에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는 오직 라우렌시오 하나뿐이니까. 지금까지 날뛰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사술에 의해 되살아난 악마들은 썩어문드러진 살갗을 거적처럼 두르고 그 아래로 단단한 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본래부터 무시무시한 생김새였지만 썩어가는 살점과 뼈만 남은 지금의 모습은 한층 더 기이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눈구멍 안에는 공허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힘의 원천이었다.

지금 다가오고 있는 악마들은 대략 수십 마리. 그리고 그 뒤에는 수백 마리의 악마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무리 옛 영웅이라도 수백 마리의 악마를 상대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여기서 악마들을 죽인다면 그만큼 성기사들이 부담해야 할 위험이 줄어들었다.

라우렌시오는 결심했다. 여기서 저 악마 놈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그는 또한 믿고 있었다. 버티고 또 버티면 영웅들이 올 것이라고.

“나는 요정기사 라우렌시오! 일곱 요정 가문의 수장이며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꾀를 가진 자! 또한 수많은 악마들을 죽이고 대악마를 이 세상에서 몰아낸 기사 중의 기사다! 말해라, 누가 감히 내게 맞서겠느냐!”

우어어어어어! 악마들이 동시에 울부짖었다. 그들은 이지가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라우렌시오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다. 수십 마리의 악마들이 동시에 땅을 울리며 뛰었고 단단한 주먹들이 라우렌시오를 노렸다.

뼈만 남은 주먹은 잉굴라트의 사술에 의해 더욱 단단해지고 위력적으로 변했다. 악마로서 생전에 가지고 있었던 능력은 사용할 수 없게 됐지만 그 대신에 격투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이다.

수십 개의 주먹들은 애꿎은 바닥만 때렸다. 그들이 노렸던 적은 이미 점멸 마법으로 그 자리를 벗어난 후였다. 악마의 뒤쪽으로 돌아간 라우렌시오의 검이 오금을 크게 베었다. 날카로운 검은 질척한 살점을 베고 관절을 박살냈다. 다리 하나를 잃은 악마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곧 근처에 있는 다른 악마를 향해 쓰러졌다. 거대한 덩치의 악마가 쓰러지며 몸을 부딪치자 다른 악마 역시 그 충격으로 몸을 비틀거렸다.

주변에 밀집한 적들은 마치 도미노가 넘어지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넘어트리며 엉망진창이 됐다. 여기저기서 쿵쿵 소리가 나고 그 충격으로 바닥이 흔들렸다. 그대로 전부 다 머리가 박살나거나 다리뼈가 부러지거나 해서 전투불능 상태가 됐다면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었겠지만 그들은 몸을 버둥거리며 다시 일어나려고 했다.

몇몇 악마는 위에서 누르는 무게 때문에 신체 일부에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대다수의 악마들은 아직 멀쩡한 상태였다. 라우렌시오는 그들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끝장을 보려고 했다. 그의 몸을 중심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냉혹한 겨울의 바람이었다. 싸라기눈을 뿌리며 잉굴라트의 공간을 거침없이 침범하던 칼바람은 넘어진 악마들을 자비 없이 모두 얼렸다.

몸을 일으키던 악마들은 그대로 얼어붙었고 그들이 뻗은 손가락이 애처롭게 라우렌시오를 겨누고 있었다. 바람이 멈추는가 하더니 다시 세차게 불었다. 쩌저적 소리가 나며 얼음 조각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후우······.”

강력한 마법으로 악마들 수십 마리를 한꺼번에 해치운 라우렌시오가 한숨을 내뱉었다. 이 한 번의 공격으로 제법 많은 양의 마력을 소모했다. 이런 식으로 싸우면 악마들을 모두 해치웠을 때는 마력을 전부 소모해서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일단은 적의 숫자를 크게 줄였으니 한 번 물러나서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대단한 마법 실력이구나. 내가 생각했던 대로야. 백 년 전의 내 형제들은 성배기사가 가장 위협적이고 그 다음이 바이올렛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구나. 성배기사가 가장 위협적인 적이란 사실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 다음으로 위협적인 것은 바로 너다, 라우렌시오.”

잉굴라트는 뼈로 만든 거대한 옥좌 위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 손으로 턱을 받친 모습은 광대의 재롱을 보는 오만한 왕 같았다. 그는 지휘봉을 움직여 대기하고 있던 다음 악마들을 내보냈다. 수십 마리의 악마들이 또 한 번 라우렌시오를 공격했고 그는 땀을 훔칠 시간도 없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며 그들을 상대했다.

라우렌시오는 처절하게 싸웠다. 바닥을 몇 번이나 굴렀고 공격에 맞고 뒤로 날아갔다가 다시 몸을 일으키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착실하게 악마들의 숫자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그는 불리한 상황에서 싸우는 것에 익숙했지만 지금 이 순간이 그가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불리한 전투였다. 성기사들과 함께 열 배도 넘는 대군을 격퇴한 적은 있어도 혼자서 악마 수백 마리를 상대한 적은 없었다.

또 한 무리의 악마들이 분쇄되고 새로운 악마들이 전진했다. 잉굴라트는 기울였던 고개의 방향을 바꾸며 말했다.

“네가 가장 성가신 적이다, 라우렌시오. 마법 실력도 상당하고 검술 실력도 대단하지. 요정답게 몸이 날쌔고 머리 회전이 빨라서 군대를 통솔하는 능력도 탁월하고 말이야. 어디 한 곳 모자란 데 없이 무엇이든 잘하는 가장 완벽한 영웅이 바로 너다. 그래서 난 너와 전장에서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칼라딘도 이기지 못했으니 너와 만나지 않은 것이 정답이었던 게야. 백 년 전의 나는 분명 네게 졌을 거다.”

이 상황에서 적의 칭찬은 별로 기쁘지 않았다. 라우렌시오는 입술을 깨물며 적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의 검이 번쩍일 때마다 악마들의 뼈가 조각나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주변에는 어느새 뼈무덤이 생겼고 새로운 악마들이 뼈를 발로 부수며 돌진했다. 라우렌시오는 지금 잉굴라트의 잡담에 어울려줄 틈이 없었다. 쉬지 않고 덤벼드는 악마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마법을 날렸다.

검이 뼈를 자르고 마법이 대지를 불살랐다. 혼자서 악마들을 압도하며 그들을 강고한 육체를 모래성처럼 허물어버리는 존재는 분명 이 전장의 지배자였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흩날리는 재와 뼛가루는 힘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게 해주었다.

과도한 힘의 사용으로 점차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라우렌시오의 머리카락이 희게 세었다. 열기 때문에 불기 시작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잉굴라트는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그의 군세 중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악마들을 거의 대부분 죽였는데도 불구하고.

악마들을 모두 잃어도 자신이 직접 라우렌시오를 처치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일까.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기서 악마들을 모두 처리하고 영웅들이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만 번다면 라우렌시오는 아무 상관없었다. 그는 영웅으로서 싸우고 영웅으로서 죽는 것이었다. 비겁한 변절자가 아니라. 썩 괜찮은 죽음이었다.

“그래서 네가 탐나는 것이다. 너처럼 완벽한 영웅이 내 부하가 된다면 그것은 어떤 기분일까. 너를 선봉으로 삼아 내 군세를 세상에 출격시킬 것이다. 그리고 네가 나를 대신하여 성을 무너트리고 나의 기치를 널리 알리게 되겠지. 상상만으로도 기대가 되는군. 칼라딘의 시체도 있었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그 멍청한 놈이 아르말락에게 죽는 바람에 아까운 시체를 낭비하게 됐어. 아르말락도 사술을 부릴 줄 알지만 나만큼 대단하지는 않거든. 내가 칼라딘을 되살렸다면 좀 더 굉장했을 거다.”

라우렌시오는 잉굴라트의 말을 모두 무시했지만 마지막 말만큼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자신의 옛 친구를 장난감 부르듯 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짓거리였다. 라우렌시오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악마들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잉굴라트, 한 가지 가르쳐주마. 죽음은 언제나 한 번뿐이어야 한다. 누구라도 상관없이 언제나 한 번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한 번뿐이기에 가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언제나 장엄하고 엄숙해야 하며 또한 품위가 있어야 한다. 오직 한 번이기에, 그래, 한 번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거다.”

마력이 휘몰아쳤다. 뱀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듯 마력이 검을 휘감으며 위로 올라갔다. 마력이 만들어내는 바람 때문에 라우렌시오의 머리카락이 크게 흩날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사령술사라 불리는 너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 너는 죽음의 가치를 스스로의 죽음으로 깨닫게 될 거다.”

빛의 칼날이 사방의 모든 악마들의 허리를 베었다. 뼈로 만든 거인과 같았던 그들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스르륵 쓰러졌다. 쿵쿵 소리가 연달아 나면서 전장 위에는 오직 라우렌시오만이 서 있었다. 그의 몸에 남은 마력은 아주 일부뿐이었다. 노인의 것이 된 육체는 곳곳에서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더 싸울 수 있을까. 잉굴라트에게 한 방이라도 먹일 수 있을까.

“그래, 아마 죽음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알게 될 일도 없겠지.”

뼈와 뼈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잉굴라트가 뼈만 남은 손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조롱을 받으면서도 라우렌시오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도발에 걸려들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잉굴라트와의 거리를 재고 어떤 공격을 날릴지 생각하는 중이었다.

“왜냐하면 난 죽지 않으니까.”

몸을 휘감는 사악한 기운. 라우렌시오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바닥에 뿌려진 수많은 뼈들이 허공을 날고 있었다. 부러졌던 뼈들은 서로를 잡아당기고 다시 이어지면서 기괴한 형상을 구축하고 있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뼈들이 무엇을 만들려는 것인지는 몰랐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터무니없는 괴물이 완성되리란 사실이었다.

“깜짝 놀란 얼굴이군. 이런 건 생각지도 못했나 보구나. 참 어리석어. 이미 한 번 살려낸 것을 두 번 살려내는 게 어려울까? 내가 왜 지금까지 너의 재롱을 그냥 보고만 있었겠나? 네가 분투하고 있을 때를 노려서 네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었는데 대체 왜? 정답은 간단하지.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너는 결코 날 이길 수 없어.”

잉굴라트의 옥자 뒤에서 검은색 망토를 두른 자들이 나왔다. 그들의 숫자는 서른 명 남짓이었고 모두 입으로 무언가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잉굴라트가 아니라 악마숭배자들이 죽은 악마들의 뼈를 이용해 새로운 괴물을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라우렌시오는 그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그 전에 잉굴라트의 마법이 그를 공격했다. 바닥이 박살나고 그 충격으로 뒤로 날아간 라우렌시오가 이를 갈았다.

“안 되지, 안 돼. 나의 충직한 종복들이 열심히 일하는 중인데 그걸 방해하는 것은 너무한 짓이잖나. 끝까지 봐라, 요정기사야. 널 죽일 적의 탄생을 끝까지 봐.”

악마의 뼈들은 허공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점차 괴물의 형상을 갖추었다. 라우렌시오가 또 한 번 의식을 방해하려 했지만 역시나 잉굴라트에 의해 막혔다. 결국 그는 악마숭배자들의 의식이 끝날 때까지 지켜만 봐야 했다.

“오, 내 사랑스러운 종복이 태어났군. 하나 약속하지, 라우렌시오. 너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사하마.”

그것은 길쭉한 목과 꼬리를 가졌으며 위협적인 네 개의 다리로 바닥을 단단히 딛고 있었다. 거칠게 휘두르는 것은 뼈만 남은 날개였고 쩍 벌린 입 안에서 수많은 이빨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잉굴라트만큼이나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그것은 용이었다. 사령술사의 명령을 따르는 사악한 용.

뼈만 남은 사룡이 아가리를 크게 벌렸다. 당장이라도 라우렌시오라를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진짜 용처럼 불을 뿜지는 않겠지만 저 커다란 덩치 자체가 흉기였다.

라우렌시오는 결심을 굳혀야 했다. 여기서 싸우다 죽겠다는 결심.

“덤벼라, 이 뱀대가리야!”

그가 소리치자 용도 크게 울부짖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잉굴라트가 크게 웃었다.

“너는 날 죽일 수 없다! 내 종복에게 죽게 될 것이니까!”

영웅과 용이 서로를 향해 달렸다. 그 순간이었다.

“강철 주먹의 비다르!”

“그리고 천둥검의 라이오넬!”

흰색의 공간 중 일부가 부서졌다. 그리고 구멍을 통해서 어둠이 유입됐다. 짙은 어둠은 구멍 근처를 잠깐 머물다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공간이 스스로 수복하는 것처럼 구멍이 차츰 작아졌다. 이제 그 자리에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흑인과 눈을 가린 장님 노인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흑인이 씩 웃으며 말했다.

“존나 쎈 영웅들 멋있게 등장!”

잉굴라트는 그들을 보며 잠깐 침묵했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면 안 죽을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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