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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31화 (131/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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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렌시오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갑작스럽게 잉굴라트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자들을 보았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익숙한 정도를 넘어서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강철 주먹의 비다르와 천둥검의 라이오넬. 소중한 친구들이었고 이 상황에서 가장 든든한 아군이었다.

모두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된 그들은 상기된 얼굴로 지껄였다.

“와씨, 진짜 미쳤다. 우리 너무 멋있게 등장한 거 아니냐? 진짜 소름끼치네? 이게 영웅이지, 이게 영웅이야!”

“비다르, 우리가 오늘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들일세!”

“인마, 라이오넬!”

“비다르! 이 멋있는 자식!”

이건 또 무슨 지랄이야. 라우렌시오는 그들의 어이없는 대화를 듣다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잉굴라트와 악마숭배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용까지도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자신에게 심취한 그들은 듣기 역겨운 자화자찬을 이어나갔다. 그 꼴을 더 두고 볼 수 없었던 라우렌시오가 크게 소리쳤다.

“비다르! 라이오넬! 딱 맞춰서 왔다! 헛짓거리 그만하고 와서 좀 도와!”

크게 소리치자 비다르와 라이오넬이 손을 흔들며 화답해주었다. 아니, 손 흔들지 말고 와서 좀 도우라고. 라우렌시오가 인상을 쓰자 그제야 그들이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수백 마리의 악귀들이 그들을 향해 몰려들었다.

성기사들과 라우렌시오가 분투한 덕에 군세의 숫자가 제법 줄었지만 그래도 아직 수천 마리의 적들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비다르와 라이오넬은 끝없이 늘어선 잉굴라트의 군세를 보고서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비다르는 악귀를 향해 주먹을 날리며 덤덤한 목소리로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와서 보니까 두 명으로는 안 되고 세 명이면 되겠네.”

악귀 한 마리가 주먹에 맞고서 뒤로 날아갔다. 직선으로 날린 주먹에 맞은 악귀는 하나뿐이었지만 그 몸이 뒤로 날아가면서 다른 악귀들에게 충격을 전달했다. 처음의 악귀는 주먹에 맞았을 때 머리가 사라졌고 다른 악귀와 부딪쳤을 때 몸도 이미 갈기갈기 찢어져서 조각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뒤로 전달한 충격은 전혀 줄지 않고서 다른 악귀들을 날려버렸다.

라이오넬은 비다르를 따라 달리면서 검을 휘둘렀다. 날카롭게 빛나던 검은 허공을 가르며 궤적을 그렸다. 그리고 그 궤적 위에 있던 악귀들은 모두 뼈와 살이 잘리고 조각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두 명의 영웅들은 거침없이 전진했다. 주먹으로 뼈를 박살내고 검으로 잘라내면서 악귀들을 죽이고 길을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잉굴라트가 신경질적으로 지휘봉을 휘둘렀다. 다른 영웅들이 나타나기 전에 라우렌시오부터 해치울 생각이었는데 일이 꼬이고 말았다. 비다르와 라이오넬의 등장 때문에 잠깐 멈춰있던 용이 다시 행동을 시작했다.

아가리를 쩍 벌리고 라우렌시오를 집어삼키려고 했다. 점멸 마법으로 뒤로 물러나려고 했던 라우렌시오는 마력을 운용하는 순간 머리를 찌르는 듯한 고통에 몸을 휘청거렸다. 지금까지 마력을 너무 많이 짜낸 탓에 몸에 무리가 온 것이었다. 잠깐의 틈이었지만 용이 그를 이빨로 짓뭉개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용의 아가리가 쇄도했다. 라우렌시오를 삼키기 일보직전이었다. 그 순간 무언가 날아와 용의 머리를 쳤다. 머리를 뒤흔드는 충격에 용의 목이 출렁거렸고 그대로 애꿎은 바닥에 아가리를 처박았다.

그 사이에 뒤로 물러난 라우렌시오가 소리쳤다.

“비다르!”

“감사 인사는 됐어. 멋진 남자가 멋진 일을 했을 뿐이니까.”

악귀의 머리뼈와 척추를 분리하던 비다르가 씩 웃었다. 방금 전 그가 악귀의 머리뼈를 던져서 용의 머리 방향을 비튼 것이었다. 어느새 주변의 악귀들을 모두 정리한 비다르와 라이오넬은 라우렌시오에게 달려갔다. 비틀거리는 그의 몸을 부축하면서 다시 고개를 쳐든 용을 바라보았다.

“엄청 큰데. 일단 저것부터 처리하자고. 이봐, 라우렌시오. 더 싸울 수 있겠어? 얼굴 보니까 가서 관 안에 들어가야겠는데? 하긴 나이도 있으니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는 않지.”

“······헛소리하지 마, 비다르. 싸울 수 있냐고? 당연하지······라고 말하기에는 상태가 너무 나쁘군. 잠깐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돌아올게. 너희들도 싸우다가 힘에 부치면 성역 안으로 들어와.”

“성역?”

“뒤쪽에 저거 말이야.”

비다르는 라우렌시오의 손가락을 따라서 성기사들이 있는 곳을 보았다. 독실한 신앙심이 만들어낸 지상의 성역은 악귀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그들의 힘을 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라우렌시오가 악마들을 모두 상대한 덕분에 성기사들은 무리 없이 악귀들을 처치할 수 있었다. 그들은 조금 지친 것처럼 보이기는 해도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저거 그거잖아, 결사대가 죽기 전에 발악할 때마다 쓰던거. 먼저 가! 살아야 해! 막 이러면서 눈물 질질 짜고. 그런데 전부 다 죽더라고.”

“······신앙심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심하군. 제발 말 좀 조심해, 비다르. 전능자는 언제나 우리를 내려다보신다.”

“그럼 내려다보지만 말고 와서 좀 도와주던가. 상전마냥 뭐하는 거야? 우리가 뭐 동네 똥개냐?”

믿음이 없는 자에게 무슨 말을 해도 자기 손해일 뿐이다. 라우렌시오는 한숨을 내뱉었다.

“엔디미온은 대체 왜 이런 놈을 뽑아가지고······.”

“뭐?”

“아무 말도 안 했어. 비다르, 잠깐 휴식하면서 힘을 회복하고 돌아올게. 일단 저 용을 죽여.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저 악마숭배자들을 죽여야 해. 저 빌어먹을 놈들은 악마와 악귀들을 되살릴 수 있어. 반드시 죽여야 해. 알아들었지?”

“당연하지. 그러니까 이거잖아. 용 죽이고 악마숭배자들 죽이고 잉굴라트 죽이고. 맞지?”

“마지막 건 할 수 있으면 해보던지······.”

“자, 그럼 실력 발휘 좀 해보실까!”

비다르가 씩 웃으며 양 주먹을 서로 부딪쳤다. 라우렌시오는 과하게 자신감 넘치는 그의 태도가 영 불안했지만 일단 뒤로 물러나기로 했다. 용은 후퇴하는 요정기사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비다르가 던진 악귀의 머리뼈에 또 한 번 몸을 주춤거렸다.

“야, 라이오넬. 들었지? 뼈만 남은 용이랑 악마숭배자들 중에서 어떤 거 맡을래?”

“악마숭배자들을 맡도록 하지. 뼈로 만들어진 용이라면 내 검으로 베는 것보다 자네 주먹으로 뼈를 부수는 게 더 효과적이겠지.”

“그래, 그건 맞는 말이야. 그런데 너 악마숭배자들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는 있냐?”

“괜한 걱정일세. 보이지 않기에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는 법일세.”

장님이면서 무슨 헛소리야. 비다르는 라이오넬을 위해서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그럼 간다!”

비다르가 먼저 용을 향해 달렸다. 용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거대한 다리로 바닥을 박차고 움직였다.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땅이 흔들릴 정도였다. 용이 괴성을 지르며 비다르를 집어삼키려고 했다. 그 순간 강철 주먹이 날아오는 용의 주둥이를 힘껏 후려쳤다. 뼈의 일부가 박살나고 용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멀리서 무언가를 던지는 것만으로도 용의 몸을 흔들 수 있는 괴력이었다. 그런 비다르가 용의 머리를 직접 주먹으로 후려갈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뻔한 일이었다. 주둥이의 일부가 박살난 용은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날카로운 발가락뼈로 비다르를 할퀴려고 했다.

비다르의 강철 주먹과 용의 뼈가 부딪치자 불꽃이 튀었다. 용의 커다란 덩치에서 나오는 힘은 영웅조차 뒤로 물러나게 할 정도였다. 공격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용은 자신의 몸을 돌려서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두꺼운 꼬리뼈를 휘두르는 공격은 성벽도 부술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비다르는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씩 웃으며 두 손으로 꼬리를 받아내려고 했다. 무모한 짓이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용의 꼬리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꼬리를 붙잡기는 했는데 그대로 꼬리에 매달린 채로 공중으로 날아올라갔다. 아무리 영웅이라도 공중에서 새처럼 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빠르게 추락하는 그의 몸 아래쪽에는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용이 있었다. 이대로 가면 저 날카로운 이빨에 몸이 갈기갈기 찢기게 되겠지만 비다르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오히려 기회였다. 왜냐하면 이대로 떨어지면서 그대로 주먹을 때려박으면 되니까.

그게 될까? 마음 속 한 구석에 자리한 의심에게 비다르는 당당하게 말했다. 된다.

“이거나 먹어라, 도마뱀 새끼야!”

노리는 것은 콧잔등. 아까 날렸던 주먹의 충격으로 이미 금이 가 있는 상태였다. 저기를 노린다. 비다르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조금만 잘못하면 그대로 용의 입 안으로 떨어지게 되지만 그는 애초에 부정적인 결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떨어지는 것은 강철 주먹. 받아내는 것은 용의 머리뼈. 누가 이길지 모르는 대결이었으나 콧잔등에 주먹이 부딪치는 순간 비다르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쩌저적. 처음에는 작은 금이었고 점차 주변을 향해 내달리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용은 뼈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조각이 되어 무너졌다.

“이게 강철 주먹이지.”

비다르가 씩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용을 상대하는 사이에 라이오넬이 악마숭배자들을 죽이고 있었다. 서른 명 남짓한 악마숭배자들은 제각각 사술을 부리며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전부 다 무의미한 짓이었다. 보호막은 검에 의해 잘렸고 라이오넬을 노리는 마법들은 애꿎은 바닥을 때리고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그들이 무의미한 짓을 반복할 때마다 하나둘씩 라이오넬의 검에 의해 목숨을 잃어갔다. 잉굴라트는 자신의 부하들의 죽음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영혼군주의 군세가 가진 가장 무서운 점은 죽은 자들이 다시 한 번 부활한다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악마숭배자들이 있어야 했다. 잉굴라트 혼자서도 죽은 자들을 되살릴 수 있지만 악마숭배자들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속도에서 제법 큰 차이가 났다.

애써 기른 부하들을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기에 마법을 날려 라이오넬의 접근을 차단했다. 하지만 잉굴라트가 아직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었다. 그가 백 년 전과 달라진 것처럼 라이오넬 역시 그때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검술에는 세 가지 경지가 있고 백 년의 수련을 마친 라이오넬은 이미 세 가지 경지를 초월하여 자신만의 경지에 도달한 자였다. 검술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 거리를 벌려서 검을 휘두를 수 없게 만들어도 아무 의미 없는 짓이었다.

베지 않고서 베는 것. 하나의 경지.

라이오넬이 허공에다 휘두른 검은 거리를 무시하고 날아가 악마숭배자들의 목을 떨어트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서 마치 전부 다 보고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목만을 노려서 베고 있었다.

그 많던 악마숭배자들은 잉굴라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부 목이 떨어져 죽었다. 또한 용 역시 비다르에 의해 박살났다. 이제 군세의 위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잉굴라트는 옥좌 위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두 영웅들을 바라보았다.

눈구멍 안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어쩔 수 없군.”

잉굴라트는 옥자 위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머리 위의 투구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초록색 불꽃은 영혼군주의 분노를 대변했다.

“이 영혼군주께서 직접 상대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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