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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32화 (132/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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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다르와 라이오넬은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잉굴라트가 내뿜는 기운이 강성했다. 또한 머리 위에서 타오르는 초록색 불꽃은 그가 범상치 않은 적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비다르는 고개를 들어서 잉굴라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악마들은 대개 사람보다 덩치가 크지만 대악마의 적자들은 특히나 더 컸다. 아르말락만큼은 아니더라도 잉굴라트는 충분히 위협적으로 보일 만큼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살은 하나도 없고 뼈만 남은 몸인데도 저만큼 큰 덩치라면 본래는 훨씬 더 컸을 것이다.

그는 다른 악마들과 다른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만나온 대악마의 적자들과 다른 종류의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뷔브르, 로아니스, 아르말락, 세 명의 악마들은 모두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수단이었고 전투 자체는 육체를 이용해서 했다.

하지만 잉굴라트는 그런 육체적인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대신에 그는 강력한 사술을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비다르와 라이오넬이 상대하기에는 가장 까다로운 적이었다.

“네가 잉굴라트냐? 내가 이야기로 들은 거랑 생긴 게 좀 다른데? 극단적인 식단 조절이라도 한 거냐?”

잉굴라트는 이죽거리는 비다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버려야 하는 법이지. 간단한 이치야. 내 살을 내주고 강력한 사술을 얻었다. 과연 너희들이 버틸 수 있을까?”

“그거야 해봐야 아는 일이지.”

“흐흐흐. 자신감이 넘치는군. 그럼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한 번 볼까!”

부웅! 잉굴라트가 지휘봉을 크게 휘두르자 땅이 진동했다. 감각이 민감한 라이오넬은 뒤쪽으로 훌쩍 뛰었고 비다르는 한 발 늦게 반응했다. 바닥이 갈라지면서 수많은 사슬들이 솟아올랐다. 그것들은 뱀처럼 움직이면서 비다르와 라이오넬을 붙잡으려고 했다.

“이건 또 뭐야, 씹!”

적을 붙잡지 못한 사슬들은 다시 바닥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다시 튀어나왔다. 정말 살아있는 뱀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도망치기만 해서는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비다르와 라이오넬은 각자의 무기로 사슬을 공격했다. 단단한 바닥도 뚫고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사슬이지만 강철 주먹과 달인의 검술에는 무력하게 부서지고 잘려나갈 뿐이었다.

“호오, 제법 하는구나. 그럼 이것도 막을 수 있나 볼까.”

잉굴라트가 지휘봉을 횡으로 휘두르자 그의 머리 위에서 어둠이 뭉쳤다. 약하게 보라색을 띄는 어둠은 정방향으로 회전하면서 그 크기를 점차 불려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커졌을 때 좌우로 확산되면서 수많은 창들을 뱉어냈다. 화살처럼 날아오는 창들을 보고서 비다르는 강철 주먹을 들었다.

몇 개는 주먹으로 쳐내고 몇 개는 공중에서 잡아채서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리고 어떤 것은 잡는 즉시 잉굴라트에게 되돌려 주었다.

“별 거 없구······. 으악!”

날아오는 창들을 상대하는데 정신을 쏟는 사이에 바닥에서 다시 사슬이 솟아올랐다. 미처 반응하지 못한 탓에 사슬들에 의해 사지가 결박당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많은 사슬들이 비다르의 몸을 휘감았다. 사슬로 만들어진 미라처럼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비다르! 무슨 일인가!”

라이오넬은 비다르의 비명을 들고서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에게 창이 날아왔고 그것을 쳐내는 것과 동시에 바닥에서 사슬이 솟아올랐다.

“당할 줄 알고!”

라이오넬이 비다르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바닥의 진동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공격은 절대로 그를 맞출 수 없었다. 신기에 가까운 검술로 사슬들을 모두 끊어내고 힘껏 달렸다. 그가 향하는 곳은 잉굴라트였다. 딱히 비다르를 구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 깜둥이야 알아서 잘하겠지.

거침없이 달리는 그를 죽이기 위해서 바닥에서 또 한 번 사슬이 올라왔다. 하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다. 사슬들은 수십 개의 조각으로 분해됐고 라이오넬은 더 빠르게 달릴 뿐이었다. 무엇으로도 그의 돌진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잉굴라트는 한 손으로 지휘봉을 휘두르는 동시에 다른 손으로 라이오넬을 겨누었다. 이번에도 바닥에서 사슬이 올라왔지만 라이오넬의 발 바로 밑에서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올라왔다. 네 개의 사슬들은 몸을 꼿꼿이 세웠다가 아래로 떨어지며 채찍처럼 크게 바닥을 후려쳤다.

바닥이 박살나고 순간적으로 라이오넬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잉굴라트의 손끝에서 마법이 발사됐다. 사악한 기운을 담은 빛은 그대로 라이오넬을 집어삼켰다. 아무리 대단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도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마법은 마법으로 대항해야 했다.

마법에 정통으로 맞은 라이오넬이 뒤로 날아가서 바닥을 몇 바퀴나 굴렀다. 그는 몸 곳곳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느끼며 한 가지를 후회했다. 그냥 깜둥이 구해서 같이 싸울 걸.

“흐아아아아압! 이까짓 사슬!”

다행히도 비다르는 자신의 몸을 죄여오는 사슬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의 강철 같은 육체는 겨우 사슬 따위에게 붙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할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붕대처럼 몸에 칭칭 감겨 있던 사슬들이 점차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점차 끊어지기 시작했다.

“흐아아아아압!”

또 한 번 기합을 지르자 끊어진 사슬들이 후두둑 땅으로 떨어졌다.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된 비다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라이오넬을 보고서 말했다.

“넌 또 왜 자빠져있냐?”

“오, 비다르. 다행히 무사했던 모양이군. 상대가 만만치 않아. 강력한 사술을 부리는데 우리 둘이 힘을 합쳐야 할 것 같네.”

“쳇, 정정당당하게 주먹으로 싸울 것이지 치사하게 사술이나 부리고 말이야.”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다시 한 번 잉굴라트에게 덤볐다. 이번에도 그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사슬들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런 공격은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들의 발걸음을 단 한 번조차 멈추지 못한 것이다.

하늘에서 창들이 쏟아졌지만 이미 한 번 당한 공격에 또 당할 만큼 어리석은 영웅은 없었다. 그들은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사슬들에게 충분한 경각심을 가지면서 쏟아지는 창들을 쳐냈다. 비다르는 창 하나를 붙잡아서 힘껏 달리다가 투창 자세를 잡았다.

영웅의 근력과 창의 날카로움이 합쳐진 공격은 공기를 찢으며 날아가는 하나의 섬광이었다.

“이거나 먹어라!”

아무리 잉굴라트라도 무시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그가 지휘봉을 휘두르자 주변에 흩어져 있던 뼛조각들이 한곳으로 모여들어 하나의 벽을 형성했다. 하지만 창이 날아와 부딪히자 그것들은 다시 한 번 수많은 뼛조각들로 분해됐다.

창은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벽에 한 번 부딪쳐서 위력을 잃었음에도 멈추지 않고 잉굴라트를 향해 날아갔다. 그것은 잉굴라트의 어깨뼈를 부수고 그 안에 단단히 꽂혔다.

“이 빌어먹을 놈이!”

잉굴라트의 분노를 대신하듯 바닥에서 빠르게 사슬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비다르의 사지를 또 한 번 결박했다. 마법으로 그의 몸을 찢어버리려는 순간 그의 시야 안에 라이오넬이 들어왔다. 조용하게 지척까지 거리를 좁힌 그가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허나 늦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잉굴라트는 라이오넬의 움직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있었다. 알면서도 일부러 접근을 허락한 것이다. 그래야 완벽하게 죽일 수 있으니까.

“너희들의 움직임은 전부 다 보인단 말이다!”

차르륵 소리가 나면서 바닥이 솟아올랐다. 라이오넬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고 그것으로 그는 약간의 시간을 허비했다. 애초에 잉굴라트는 사슬 따위로 라이오넬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몇 번이고 해본 공격이다. 이제 와서 통한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이번에는 바람이 불면서 보이지 않는 칼날이 라이오넬의 몸을 노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재빠른 검술에 의해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것으로 라이오넬은 또 한 번 시간을 허비했다. 잉굴라트는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는 라이오넬을 보고서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다.

직접 적의 머리통을 부수고 영혼을 취하는 사령술사에서 군세를 지휘하는 영혼군주가 되면서 잉굴라트의 전투 방식은 바뀌었다. 침착하게 전장을 내려다보고 치밀하게 작전을 짰다. 그리고 상대를 분석하고 그에 맞는 공격을 선택했다. 바로 지금처럼.

라이오넬은 장님이다. 바닥의 진동, 공기의 흐름, 주변의 소리, 이 세 가지를 통해서 적과의 거리를 재고 공격에 반응했다. 하지만 그 세 가지 정보에 혼란을 준다면? 사슬을 통해서 바닥을 흔들고, 바람의 칼날로 공기의 흐름을 어지럽게 만들고, 시끄러운 소음으로 귀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 순간 라이오넬은 진정으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장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그가 가장 취약한 순간이었다.

노려야 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머리 위. 라이오넬이 절대로 눈치 챌 수 없는 맹점이자 사각. 그곳을 노리고 검은색 빛이 떨어졌다.

“죽어라!”

비명은 없었다. 검은색 빛이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위력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소음이 주변의 소리를 모두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빛이 사라졌을 때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쓰러져 있는 라이오넬이었다. 그는 몸 곳곳이 만신창이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라이오넬! 이 빌어먹을 놈이!”

사슬을 끊은 비다르가 괴성을 지르며 잉굴라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쉼 없이 날아드는 마법에 의해 도저히 전진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마법에 맞고 뒤로 날아가거나 바닥을 굴러야 했다. 그럼에도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달렸다.

“비다르! 네깟 놈이 날 어찌 할 수 있을 것 같나! 네가 영웅들 중 제일 약해빠졌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주먹질뿐인 한심한 놈! 너는 내 부하로 삼을 것도 없다! 그대로 죽어라!”

수많은 마법들이 비다르의 몸을 강타했다. 옷이 찢겨나가고 살갗이 벗겨져 그 아래의 근육들이 드러났다. 어떤 곳은 뼈까지 드러났다. 영웅의 강철 같은 육체도 무자비한 마법을 상대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싸움을 그만두지 않았다. 싸움은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이 나는 것이다. 그리고 비다르는 아직 죽지 않았다.

“내가 제일 약해빠졌다고? 새끼, 나랑 주먹질 하면 몇 번 버티지도 못할 거면서 입만 살아가지고.”

“근성 하나는 대단하구나. 그래, 그 정도 근성이라면 험하게 굴리기 딱 알맞지. 생각이 바뀌었다. 널 내 군세의 선봉대장으로 삼으마. 너는 제일 먼저 달려나가고 제일 먼저 죽게 될 것이다.”

“날 죽일 자신은 있고?”

“당연하지. 너도 허세는 그만 부리는 게 어떠냐? 너 혼자서 날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나.”

비다르는 가슴 위로 들었던 주먹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하늘을 보았다.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잉굴라트가 만족할 때였다.

“늦었네.”

“뭐? 늦기는 뭐가 늦었다는 거냐?”

“너 말고, 인마.”

등 뒤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열기가 잉굴라트의 뒷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돌아봐야 한다. 하지만 본능적인 두려움이 그의 움직임을 막았다. 두려워? 이 내가? 그는 딱 소리가 나게 이를 부딪쳤다. 결심을 굳히고 세차게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눈부신 신성이 있었다. 후광으로 번쩍이는 빛의 기사와 그를 모시는 종자가 있었다. 아니었다. 성배기사와 전능자의 종이 있었다.

“이럴 수가······.”

“만나서 반갑다, 잉굴라트. 곧 죽겠지만.”

어느새? 어느새 이곳에 왔지? 당황한 잉굴라트를 보면서 비다르는 킬킬대며 웃었다.

“이제 넌 뒈졌다,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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