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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33화 (133/199)

133

“······.”

잉굴라트는 침묵하면서 짜증스럽게 이죽거리는 비다르를 향해 지휘봉을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힘이 빠르게 허공을 내달리면서 비다르의 몸을 멀리 날려버렸다. 그는 바닥을 몇 바퀴 구른 후에 울컥울컥 핏물을 뱉어냈다. 욕을 하면서 몸을 일으키는 그를 무시하고서 잉굴라트는 완전히 몸을 돌려 성배기사를 쳐다보았다.

“······진짜로군. 난 아직 널 만날 준비가 안 됐는데.”

“알고 있다. 그래서 부하에게 아일락샤와 통한 문을 닫으라고 시켰겠지. 내가 이리로 넘어올까 겁이 났으니까.”

“그래, 그 말이 맞다. 하지만 널 겁내서가 아니야. 준비가 덜 됐을 뿐이지.”

“준비?”

엔디미온이 성검을 뽑았다.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는 성검은 성배기사의 손을 따라서 움직였다. 성검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허공을 가르며 천천히 이동했다. 그럴 때마다 악귀와 악마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그것은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눈부신 빛이었다.

“죽은 시체들을 이용해 이만한 군세를 이루고도 준비가 부족했다는 거냐? 강함을 위해 네 살조차 스스로 도려냈음에도 준비가 부족했다는 거냐? 그럼 얼마의 시간이 있어도 날 이길 수 없다.”

성배기사는 사령술사에게 고했다.

“잉굴라트, 네 악행은 여기까지다.”

“여기까지라고? 아니지, 아니야, 엔디미온. 여기까지가 아니다! 여기서부터인 거다!”

잉굴라트가 지휘봉을 휘둘렀다. 그의 몸에서 사악한 기운이 들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악마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기운이었다. 뷔브르와 로아니스는 물론이고 아르말락보다도 더.

사령술사이자 영혼군주인 그는 온갖 사술에 능했다. 백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강력한 힘을 얻게 된 잉굴라트는 지금 이 자리에서 엔디미온을 죽이기 위해 마지막 힘까지 모두 짜내기로 했다.

쿠구궁 소리가 나면서 사방에 널브러져 있던 뼈들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것들은 저들끼리 달라붙고 이어지면서 다시 한 번 군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잉굴라트의 사술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쓰러졌던 거대한 용이 또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서 수십 개의 사슬이 솟아올랐고 공중에 수많은 창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한 번에 몇 개나 되는 사술을 부린 잉굴라트의 머리 위에서 초록색 불꽃이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힘을 한꺼번에 짜냈음에도 그는 오히려 기운이 넘치는 것처럼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널 죽이기 위한 준비는 내가 널 죽이겠다고 결심한 그 순간부터 끝난 것이다! 덤벼라, 전능자의 개야!”

거대한 군세가 오직 한 명을 죽이기 위해 출진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위에서 오롯이 혼자 군세를 상대해야 하는 성배기사는 더없이 침착했다. 그는 고고한 자태로 성검을 들고서 군세와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뒤에서 시립하고 있던 비아네는 일말의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두려움은 극복의 대상이었다. 이것은 더 위로 가기 위한 하나의 시련인 것이다. 그래, 시련. 전능자에게 한층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숭고한 시련.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함께 하겠습니다.”

“비아네.”

“말씀하시지요.”

엔디미온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비아네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열 마디 말보다 성배기사의 듬직한 뒷모습이 더욱 큰 용기의 상징이라는 것을.

“너는 네 부하들에게 가라. 비다르를 데리고 말이야.”

“······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비록 엔디미온은 성배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부정했지만 비아네는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홀로 의무를 위해 군세와 맞서는 저 고고한 모습, 신성한 빛을 뿌리는 검, 등 뒤의 성배. 엔디미온이 성배기사가 아니라면 대체 그 누가 성배기사란 말인가.

그것은 오직 그에게만 허락된 자리였다.

“제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함께 싸울 수 없는 것입니까? 제가 도움이 아니라 방해가 되기에 뒤로 보내시는 겁니까?”

비아네는 차분히 대답을 기다렸다. 엔디미온은 여전히 달려오는 군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혼자서 승리를 쟁취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말이야. 나 역시 마찬가지다. 군세를 막아내는 것과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는 것, 두 가지 모두를 나 혼자서 해낼 수는 없다. 사람이란 본래 그런 생물이니까. 자기 혼자서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다고 믿는 자는 반드시 거꾸러지고 말지. 자기 발에 자기가 걸려서.

기억해라, 비아네. 승리에도 종류가 있다. 그리고 위대한 승리는 모두가 힘을 합쳤을 때 비로소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알겠나, 비아네? 나는 지금 네게 승리로 가는 길에 함께 올라설 것인지 묻고 있는 거다.”

질문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답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다른 것은 없다. 비아네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기꺼이!”

“그럼 가라.”

비아네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그는 엔디미온을 걱정하지 않았다. 성배기사는 전능자의 대리인이며 불타는 정화의 칼날이었으니까.

“너 혼자서 이 군세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건방진 것!”

“칼라딘은 백 명의 성기사로 구성된 결사대를 이끌고 네 군세의 진격을 막아섰다. 그때의 네 군세는 대략 일만.”

잉굴라트의 초록색 불꽃이 움찔거렸다. 칼라딘에 대한 이야기는 그에게 있어서 역린과 다름이 없었다. 일만의 군세를 이끌고 싸웠음에도 겨우 백 명으로 이루어진 결사대를 넘지 못하고 도망쳤던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엔디미온은 천천히 성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힘차게 내리치며 말했다.

“칼라딘이 고작 성기사 백 명을 데리고 해냈던 일이라면 나 혼자서 충분하지.”

성검의 빛이 뿜어낸 커다란 칼날이 바닥을 가르며 질주했다. 그것은 수백 마리의 악귀들을 한꺼번에 반으로 잘라버렸다. 바닥에는 기다란 칼자국이 남았고 그곳에서 신성한 기운이 넘실거리니 악마와 악귀들은 감히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만한 놈! 내가 그때와 같을 거라고 생각하나! 나는 강해졌다! 이곳에 숨어서 다시 한 번 세상을 불태우기 위해 군세를 길렀다! 봐라! 이들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리고 나는 더 강력한 힘을 얻기 위해 내 살을 기꺼이 내주었다! 한 번 봐라! 내 사술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엔디미온은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적들을 향해 쉬지 않고 성검을 휘둘렀다. 그들의 엄청난 숫자만 해도 성가신데 공중에서 날아오는 창들이 그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성검의 힘으로 보호막을 만들어 창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그것도 끝이 있었다.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비처럼 쉬지 않고 보호막을 두들기는 창들 때문에 결국은 보호막이 산산이 깨졌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보호막의 조각들을 맞으며 엔디미온은 엄청난 각력으로 상당한 거리를 도약했다.

악마와 악귀들을 아무리 상대해봐야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결국은 적의 머리를 잘라야 했다. 이들을 지휘하고 힘을 부여하며 다시 한 번 살려내는 사령술사의 머리를 잘라야 했다. 그래야만 끝이 났다.

성검이 더욱 세차게 빛을 발하며 잉굴라트에게 가는 길을 뚫었다. 거대한 용이 크르릉 울음소리를 내면서 길을 가로막았지만 거대한 빛의 칼날이 세로로 뼈를 갈랐다.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깔끔하게 잘린 용은 몸이 기우뚱하더니 절반씩 좌우로 쓰러졌다. 쿵쿵 소리가 연달아 났다.

이제 엔디미온을 가로막을 것은 없었다. 겁도 없이 달려드는 악마와 악귀들은 성검의 무자비한 일격에 잘려나갈 뿐이었다. 잉굴라트와 엔디미온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또 한 번 도약으로 거리를 좁히려는데 갑자기 바닥이 진동했다.

그리고 수십 개의 사슬들이 갑자기 솟아올랐다. 차르륵 소리를 내며 솟아오른 사슬들이 엔디미온의 몸을 휘감았다. 사지를 결박하고 목을 붙잡아서 부러트리려고 했다. 그러나 성배의 힘 덕분에 강화된 몸은 사슬 따위에 부러질 만큼 연약하지 않았다. 단지 움직임을 제한하는 것에 그쳤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공격 기회를 잡은 잉굴라트가 지휘봉을 휘둘렀다. 머리 위의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수십 개의 창들을 토해냈다. 엔디미온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창들을 보고서 손에 들고 있던 성검을 떨어트렸다.

바닥과 성검이 부딪쳐 챙 소리가 날 때였다.

“에투알!”

“걱정마시게!”

눈이 멀어버릴 듯한 강렬한 빛. 그리고 엔디미온에게 날아드는 창들을 향해 누군가 발차기를 날렸다. 길쭉한 다리는 창들을 몇 개 쳐냈고 날아간 창들은 다른 창들에 부딪쳐서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갔다.

발차기를 날리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우아하게 착지한 것은 에투알이었다. 그녀가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엔디미온의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힘으로 사슬들을 끊어낸 엔디미온이 손을 뻗었다. 에투알은 다시 빛을 뿜어내며 성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따위 잔재주가 통할 거라고 생각한 거냐!”

엔디미온은 달렸다. 가로막는 것들을 모두 잘라버리고 거침없이 질주했다. 잉굴라트의 사술은 어떤 것도 소용이 없었다. 이제 한 발자국. 엔디미온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도약으로 마지막 한 발자국을 좁혔다.

“끝이다, 잉굴라트!”

성검의 빛이 섬광처럼 날아갔다. 그것은 일직선으로 날아가면서 그대로 잉굴라트의 갈빗대를 찔렀다. 아무리 힘을 얻는 대가로 뼈만 남은 모습이 되었다고 해도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심장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아무리 악마라도 결국은 하나의 생물이었다. 심장을 찌르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흐흐흐, 역시나 강하구나.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강해. 백 년 전의 나라면 분명 여기서 죽었겠지.”

감촉이 없었다. 말캉한 것을 찔렀을 때의 감촉, 약한 저항을 이겨내고 안을 향해 날카로운 것을 찌르는 감촉, 찢어진 거죽을 통해서 액체가 쏟아져 나오는 감촉. 어느 것도 없었다. 엔디미온은 미간을 좁혔다. 분명히 심장을 찔렀다. 그런데 왜?

“당황한 얼굴이 마음에 드는구나. 내가 왜 죽지 않는지 궁금하겠지? 너는 결코 날 죽일 수 없다. 어째서냐고?”

엔디미온은 검을 뒤로 뽑고서 바닥에 착지했다. 성검은 깨끗했다. 마치 허공을 찌른 것처럼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다.

“너는 내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까! 성배기사야! 내가 말했지, 나는 백 년 동안 아주 많은 준비를 했다고! 너는 날 얕잡아봤다! 그게 네 실수다! 날 봐라, 성배기사야! 내가 널 죽이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는지 한 번 보라고!”

잉굴라트가 입고 있던 로브를 손으로 잡아찢었다. 그러자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몸이 드러났다. 그러나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의 심장은 보이지 않았다. 몸 안에 심장을 숨길 곳이 없음에도.

“내 심장을 찔러야만 날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너는 내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 그러니 너는 날 죽일 수 없다!”

잉굴라트의 투구 위에서 타고 있던 불꽃들이 더욱 세차게 타오르며 점차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것들은 뼈만 남은 잉굴라트를 감싸면서 마치 갑옷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이제 불꽃의 거인이 된 잉굴라트는 새빨간 안광을 번쩍이면서 외쳤다.

“보아라, 성배기사야! 나는 불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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