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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릴 적부터 성배기사의 무용담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제가 성기사가 된 것도 성배기사의 가르침에 따라 약자를 돕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입니다. 부디 제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간절하게 부탁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엔디미온은 정신을 차렸다. 백 년 전에도 성배기사의 무용을 흠모하여 부하가 되기를 간청하는 자들이 많았다. 성배기사가 이끄는 군세는 본래 악마들의 악행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난 의용군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에 자질에 상관없이 정의로운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모두 받아들였다.
하지만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없었다. 그 시절에는 한가롭게 제자를 키우고 있을 시간이 없었기에 성기사들 역시 성배기사에게 배움을 청하기 대신에 수많은 전투를 통해서 강해지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그들은 싸우고 또 싸우며 사악한 것들에게 지지 않을 강함을 자력으로 쟁취했다.
성기사들은 성배기사가 얼마나 바쁜 존재인지 알기에 가르침을 청하며 귀한 시간을 빼앗지 않았다. 대신에 그와 함께 싸우면서 간접적으로 배움을 얻었을 뿐이다.
엔디미온은 구구절절하게 떠들고 있는 비아네를 향해 짤막하게 말했다.
“싫다.”
“······네?”
“싫다고. 제자로 받아달라는 건 내 종자가 되겠다는 소리냐? 미안하지만 백 년 전에도 거추장스럽게 종자를 달고 다니지 않았다. 난 내 스스로 무구를 관리하고 말의 먹이를 챙겨주었다. 이제 와서 종자의 손을 빌릴 생각은 없다.”
비아네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엔디미온이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내가 널 제자로 받아도 너에게 가르칠 것이 없다. 가르친다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초심자에게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너는 이미 네 자신이 개척한 길을 가고 있으니 내 가르침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내게 해줄 말은 하나뿐이다, 비아네. 끝까지 가라. 어떤 길을 가더라도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비아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엔디미온에게 거절당한 것 때문에 몹시 낙담한 얼굴이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릴 적부터 이야기로 들어오던 전설적인 영웅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왔는데 거절당했으니.
하지만 엔디미온은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비아네까지 받아들이기 되면 일행이 너무 많아졌다. 무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굳이 비아네까지 일행으로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비아네에게 말했다.
“그것보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
“아, 네. 무엇이든 물어보시지요. 제가 아는 것이라면 전부 답해드리겠습니다.”
비아네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래도 공손했다. 별 다른 노력도 없이 성배기사의 일행을 받아들여진 베로니카는 그가 조금 측은하게 느껴졌다.
“다르디낭의 적자들을 찾아내서 해치우는 것이 너희들의 의무라고 했지? 그럼 혹시 잉굴라트 말고 다른 다르디낭의 적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아, 물론 알고 있습니다. 부관! 지도 가지고 와!”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의 부관은 얼른 지도를 가지고 다가왔다. 그가 가죽으로 만든 지도를 건네주자 비아네가 받아서 바닥에 깔았다. 지도 곳곳에는 빨간색으로 동그라미와 해골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들은 무슨 의미지?”
“아, 동그라미는 저희가 찾아낸 악마들의 위치입니다. 그리고 해골은······.”
“처치한 악마들의 위치군. 꽤 많이 죽였는걸.”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희생을 통해 얻어낸 값진 승리들입니다. 그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다르디낭의 적자에 대한 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금 이곳 트라바에서 남쪽으로 사흘 정도 가야 합니다. 이곳에는 악마의 사악한 기운 때문에 급속하게 자라난 삼림이 있는데 타리샤라고 불리는 악마가 있습니다.”
타리샤라면 엔디미온도 알고 있었다. 식물을 급성장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전투에 이용하는데 그가 키우는 식인 식물 때문에 수많은 성기사들이 잡아먹혔었다.
비아네가 또 다른 동그라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은 서쪽으로 나흘 정도 가야 하는 곳인데 커다란 호수 안에 아르고디아라는 악마가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호수 안에서 잠을 자며 보내기 때문에 크게 위험하지는 않지만 근처 도시의 사람들이 물을 길러 가거나 물고기를 잡을 때 습격을 당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아르고디아라면 특이하게도 물에 사는 악마였는데 이동할 때마다 자신의 능력으로 호수의 물을 넘치게 하여 호수 자체를 이동시켰다. 그 능력을 이용하여 멀쩡한 성을 호수 위의 섬으로 만들어버린 적도 있으며 그 때문에 성 안에 있던 성기사들이 고립되어 단체로 아사한 일이 있었다. 아르고디아는 직접적인 싸움은 싫어하지만 남을 괴롭히고 죽이는 것을 즐기는 아주 성가신 악마였다.
“일단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악마는 이 둘입니다. 다른 악마들은 일주일은 더 가야 하는 곳에 있습니다. 그 외에도 저희가 모르는 곳에 숨어있는 다르디낭의 적자들도 있을 수도 있고요.”
“타리샤와 아르고디아라. 둘 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군.”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저희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의 언제나 싸울 준비가 돼있습니다.”
“고마운 말이지만 괜찮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일을 해라. 잠깐 물러나 있어라.”
비아네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엔디미온은 자신의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둘로 갈라져야겠군. 비다르, 라우렌시오. 너희들은 서쪽으로 가라. 라이오넬과 베로니카는 나와 함께 남쪽으로 간다.”
“무슨 기준으로 가른 거야?”
비다르가 묻자 엔디미오니 바로 대답했다.
“일단 너는 나랑 떨어지면 무조건 도망칠 테니까 감시역이 있어야 하는데 라이오넬보다는 라우렌시오가 적격이니까. 도망가도 마법으로 잡아올 수 있고. 그리고 내가 데리고 있으면 매일 감시해야 하는 게 귀찮아서야.”
“······대체 내가 왜 도망갈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
“그리고 베로니카는 아직 금화 백 개 어치만큼 일을 안 했으니까 나랑 같이 다녀야 하고.”
“······아니, 지금까지 이 고생을 했는데 아직도 빚이 남았어요?”
“마지막으로 라이오넬까지 라우렌시오한테 맡기면 속 터져서 도망갈 것 같으니까 내가 맡는 거다.”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비다르와 베로니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고 라우렌시오는 과연 논리적인 대답이라면서 납득했다. 라이오넬은 별 생각이 없었다.
“자, 결정 났으니 빨리 움직이자고. 일을 끝내고 나서는 비로크로 와라.”
비로크는 이곳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도시의 이름이었다. 서쪽으로 가는 비다르 일행과 서남쪽으로 가는 엔디미온 일행이 일을 끝내고 다시 만나기에 적격인 도시였다.
그늘 아래에 쉬게 두었던 말들을 찾아온 라우렌시오가 말했다.
“혹시나 바이올렛을 만나게 되면 어떡할까?”
“상황 보고 알아서 결정해.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면 죽이고 힘들 것 같으면 도망치고. 하지만 무리하지는 마라. 바이올렛은 백 년 전보다 더 강해졌다. 룽고르의 마법사왕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도 어떠한 새로운 힘을 얻었기 때문이겠지. 조심해라. 칼라딘 말고 누가 또 죽는 건 사양이다.”
“나도 마찬가지야. 서로 고생하자고.”
“그리고 비다르 저 뺀질이 놈 도망치는지 잘 감시해.”
“마법을 걸어두면 괜찮을 거야.”
“믿는다, 라우렌시오.”
라우렌시오가 웃었다. 다행히도 비다르는 말과 장난치느라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만약 들었다면 불 같이 화를 내며 달려들었을 것이다.
“비아네.”
엔디미온이 부르자 비아네는 진짜 종자처럼 재빠르게 달려왔다. 그는 혹시나 엔디미온의 마음이 변한 게 아닐까 기대하면서 입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우리는 두 조로 갈라져서 각각 서쪽과 남쪽으로 간다. 타리샤와 아르고디아는 우리가 죽일 테니 너희는 다른 대악마의 적자들을 찾아라.”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성배기사님.”
“또 뭐냐.”
“오늘의 만남을 교황 성하께 고해도 되겠습니까?”
비아네는 교황의 여섯 기사 중 하나였고 모시는 주인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정보를 전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엔디미온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한다. 하지만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알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다.”
진실이란 것은 바람과 같아서 숨기려고 해도 결국은 드러나게 되는 법이다. 엔디미온이 활약하면 할수록 진실을 숨기기는 더 어려웠다. 뷔브르 토벌 때도 그랬다. 엔디미온은 함구하라고 했지만 술에 취한 성기사들 일부가 함부로 입을 놀렸지 않은가. 진실을 숨기지 않되 자연스럽게 흘러나가게 해야 했다.
“뒤르겔로 돌아가면 에스메렐다 추기경을 만나라. 그리고 그녀와 협력하여 이 땅의 정의를 바로 세워라.”
“에스메렐다 추기경이라 하시면 황금장미 기사수도회의 에스메렐다 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녀 외의 다른 에스메렐다가 있나?”
“아, 아닙니다. 놀랍군요. 뷔브르 토벌대가 성배기사의 도움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기는 했지만 그게 진실이었을 줄이야. 에스메렐다 경도 참 대단하군요. 그 중요한 사실을 지금까지 숨겼다니.”
“내가 숨기라고 했다. 너 역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아라. 내가 허락한 것은 교황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것뿐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비아네가 자세를 바로 하며 엔디미온의 목소리를 들었다.
“바이올렛의 배신에 대해서는 함구해라. 괜한 혼란을 일으킬 만한 정보다. 라우렌시오의 누명에 대해서는 아르말락의 짓이라고 해라.”
대마법사 바이올렛이 영웅들을 배신하고 타락한 영웅이 됐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사실이었다. 진실은 아무리 꼭꼭 숨겨도 물에 종이가 젖듯 차츰차츰 알려지게 되는 것이기에 충격적인 진실은 애초부터 알고 있는 사람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비아네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엔디미온이 말했다.
“잠깐이지만 값진 만남이었다. 수고했고 정의를 위해 더욱 정진해라. 또 만나자.”
“감사한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우렁차게 외치는 비아네를 뒤로 하고 엔디미온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일행 쪽으로 갔다. 비다르와 라우렌시오는 이미 말에 타고 있었고 엔디미온이 다가오자 곧장 말의 머리를 돌렸다.
“우리가 더 멀리 가니 먼저 가보겠다. 비르크에서 보자, 엔디미온.”
“라우렌시오, 조심히 가라. 그리고 비다르, 사고 치지 말고 라우렌시오 말 잘 들어라.”
“아니, 내가 무슨 애냐? 알아서 잘하니까 너나 잘해, 인마.”
비다르가 툴툴거리자 엔디미온이 웃었다. 그는 등자를 밟고 말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비다르와 라우렌시오가 말의 배를 차며 떠났다. 남겨진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다가 말했다.
“그럼 우리도 갈까.”
“다시 세 명으로 돌아왔네요. 두 사람이나 없어지니까 좀 허전해요. 특히 비다르 씨요.”
“금방 다시 만날 거다. 비다르한테 그새 정이라도 든 거냐.”
“그게 아니라 비다르 씨가 없으면 요리 보조를 할 사람이 없는 걸요!”
“······.”
마법사의 요리 보조로 전락해버린 영웅이라. 엔디미온은 조용히 말의 배를 찼다. 말이 히힝 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고 라이오넬의 말은 영특하게 그 소리를 듣고서 따라 달렸다. 마지막으로 베로니카의 말 역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