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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의 기후는 대체로 온후하지만 남쪽으로 갈수록 점차 더워졌다. 서늘한 바람이 불던 가을 날씨에서 열기가 묻어나오는 초여름 날씨로 변하자 말들이 쉽게 지치는 것이 보였다. 길 위를 달리면 불어오는 후텁지근한 바람과 함께 머리 위에서 내려쬐는 햇볕이 말들의 체력을 야금야금 앗아가는 것이다.
때문에 엔디미온 일행은 보통 때보다 더 자주 휴식을 취했다. 말들의 체력이 약해졌다기보다는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에 아직 적응을 못한 탓이었다. 그늘이 길게 늘어진 아름드리 나무 아래에서 엔디미온은 말에게 물을 먹여주었다.
근처에 강은 없지만 마법으로 지하의 수맥을 이끌어낸 베로니카 덕분에 물이 모자랄 일은 없었다. 시원한 지하수를 실컷 마시고 난 후에 말들이 다시 기운을 차렸다. 그늘 아래에서 충분히 휴식한 그들은 다시 말을 타고 달렸다.
목적지가 그리 멀지 않았다. 라티에티. 그들의 목적인 타리샤가 있는 삼림 근처에 있는 도시의 이름이었다. 비다르 일행과 헤어지고 쉬지 않고 달려온 덕분에 오늘 중으로 도착할 수 있을 듯 했다.
말들도 그 사실을 아는 듯 더운 숨을 뱉어내면서도 힘차게 달렸다. 머리 바로 위에서 햇볕이 내려쬐는 정오였지만 더위를 참으며 쭉 달렸다.
“성벽이에요!”
베로니카가 외쳤다. 작게나마 회색의 성벽이 보였다. 달리면 달릴수록 성벽은 점차 커졌고 거리도 가까워졌다. 이제 성벽은 본래의 크기를 모두 되찾았다. 거대한 성벽의 그늘 아래에서 엔디미온이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도착이군.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움직이자.”
그 말에는 베로니카도 찬성이었다. 엔디미온이 라티에티에 도착하자마자 보급만 하고 바로 타리샤에게 간다고 했으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 성문까지 걸어갔다. 경비병들과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슬쩍 돈 약간을 찔러주자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일단 여관부터 찾자.”
엔디미온 일행은 다시 말을 타고서 여관을 찾아다녔다. 베로니카는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도시의 풍경을 감상했다. 기후가 달라지면 문화도 달라지는 법이다. 라티에티는 남부의 도시였고 건축 양식이나 사람들의 의상 등등이 그녀가 살던 할리아와 완전히 달랐다.
길거리에는 비다르처럼 살결이 검은색인 자들이 많았다. 이목구비도 조금 다르게 생겼다. 간간이 엔디미온 일행처럼 흰 살결을 가진 자들이 보였는데 대부분 다른 도시에서 온 상인들이었다.
지금은 왕국 중부 사람들이 간혹 보이지만 더 아래로 내려가면 다른 지방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남부 지방의 살인적인 더위를 이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관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군. 길을 좀 물어야겠어.”
엔디미온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여관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다행히도 친절한 사람을 붙잡은 덕에 여관으로 가는 길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선의에는 선의로 보답하는 것이 제일이다. 엔디미온은 금화 하나를 꺼내서 던져주었다. 길안내의 값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았지만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참, 무슨 은행인가 가면 돈을 받을 수 있다고 했는데.”
자엘라 영주를 협박해서 받아낸 금화 천 개를 아직 하나도 쓰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손가락에 끼우고 있는 금색의 반지를 보았다. 은행이란 곳에 가서 이걸 보여주면 돈을 준다고? 정말로?
백 년 전에는 은행이란 것이 없었기에 엔디미온은 영 미심쩍었다. 하지만 자엘라 영주가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으니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혹시나 거짓말이었다면 에스메렐다를 통해서 응징하면 될 일이었다.
“은행에 좀 들려야겠군.”
“네? 여관부터 간다면서요?”
“주머니가 풍족하면 마음도 풍족해지는 법이지. 일단 주머니에 돈부터 좀 채우자고.”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모든 경비는 엔디미온이 댔다. 그는 금화가 아주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금화 주머니는 마르지 않는 샘이 아니었고 결국에는 바닥을 드러냈다. 약간의 돈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돈을 찾기는 해야 했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있는 게 은행이 아닐까요?”
베로니카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다른 건물들과 다르게 중부 양식으로 지어진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 건물 입구에 그리에드 은행이라고 써져 있는 것을 보니 엔디미온이 찾던 그 은행이 맞는 듯 했다.
그들은 곧장 그쪽으로 말을 몰았고 은행에 가까워지자 대기하고 있던 소년이 활짝 웃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왕국에서 가장 안전한 은행, 그리에드입니다. 말은 제게 맡겨주시면 됩니다.”
엔디미온 일행은 소년에게 말의 고삐를 넘겼다. 그런데 소년은 곧장 마구간으로 가지 않고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엔디미온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 그는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던졌다. 그러자 소년이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나리!”
결국 소년은 팁을 바라고 있던 것이다. 엔디미온은 은행 안으로 들어가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 한 마디 내뱉었다.
“아니, 내 돈 찾으러 왔는데 왜 돈을 써야 하는 거야?”
“자자, 진정하시고 얼른 들어가요.”
은행 안으로 들어오자 바람이 불었다. 라티에티의 후텁지근한 바람이 아니라 기분을 산뜻하게 만들어주는 시원한 바람이었다. 베로니카가 말했다.
“이거 마법이에요!”
“마법?”
주변을 둘러보니 곳곳에 위치한 마법사들이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뭐야, 이거?
“그리에드 은행이 돈이 많기는 진짜 많은가 봐요. 바람 좀 일으키려고 마법사들을 고용하다니.”
그럼 저기 있는 마법사들이 살아있는 부채 대용이란 말인가. 엔디미온은 어이가 없는 광경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안녕하십니까, 그리에드 은행 라티에티 지부의 홀리라고 합니다. 손님은 어떤 용무로 본 은행을 방문하셨습니까?”
엔디미온이 고개만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한 청년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기대하지 않았던 친절에 엔디미온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내 돈을 찾으러 왔소. 자엘라 영주의 금고에 있는 돈 말이오.”
“혹시 인장 반지를 볼 수 있겠습니까?”
인장 반지? 이것 말인가? 엔디미온은 자엘라 영주에게 받은 반지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홀리가 반지에 대고 입김을 후 불었다. 이건 또 무슨 지랄이야? 엔디미온이 한쪽 눈썹을 까딱하는 사이에 손가락의 반지가 초록색 빛을 냈다. 그것을 보고 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엔디미온은 홀리를 따라가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좌우로 길게 늘어진 테이블 위로 일정한 간격으로 칸막이 쳐져 있었고 사람들은 각 칸에 들어가서 은행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기 있는 톨루아나가 친절하게 응대해드릴 겁니다. 이달의 우수사원이거든요. 톨루아나, 이쪽은 자엘라 영주님의 대리인이시다.”
홀리는 거기까지 말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에 방금 막 은행 안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가버렸다.
톨루아나는 난쟁이 여성이었는데 키가 작아서 엔디미온은 그녀의 이마만 보였다.
“어떤 용무로 저희 그리에드 은행을 방문해주셨습니까?”
낭랑한 목소리에 엔디미온이 대답했다.
“금화를 좀 찾으려고 하오만.”
“알겠습니다. 저희 그리에드 은행의 현재 금화 총 보유량에 따라 당장 찾을 수 있는 금화는 삼백이십삼 개입니다. 전부 찾으시겠습니까?”
금화 천 개면 천 개지, 삼백이십삼 개는 또 뭐야. 엔디미온은 대충 대답했다.
“백 개만 찾겠소.”
“알겠습니다. 반지를 제게 주시고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엔디미온은 시키는 대로 했다. 톨루아나가 반지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가 묵직한 주머니와 함께 다시 나타났다.
“현재 금고에 남은 금화는 구백 개입니다. 혹시나 다른 용무가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아니, 됐소. 이만 가겠소.”
엔디미온은 금화 주머니를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 뒤로 톨루아나가 안녕히 가십시오 하고 공손히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돈 찾으셨어요?”
“은행이란 건 신기하군.”
“백 년 전에는 없었나 봐요?”
“그때는 없었지.”
엔디미온 일행은 시원한 바람이 부는 은행을 나와서 다시 후텁지근한 거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바깥으로 나오자 아까 그 소년이 얼른 말을 다시 데리고 나왔다. 그들은 곧장 여관 쪽으로 움직였다.
여관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소년이 보이자 이번에도 팁을 달라고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엔디미온 일행은 소년의 안내를 받으며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이요! 세 사람!”
우렁차게 외친 소년은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여관 주인이 그들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세 사람이요? 방은 어떻게 드릴까? 식사는?”
“방 두 개 주시고 식사도 준비해주시오. 그리고 일단은 하룻밤만 보내겠소.”
“알겠수다.”
엔디미온은 값을 치루고 열쇠를 넘겨받았다. 엔디미온과 라이오넬이 함께 방을 썼고 베로니카가 혼자서 방을 썼다. 세 사람은 방 안에 짐을 정리하고 나서 다시 식당으로 나왔다. 간단하게 식사를 하며 허기를 달래고 있을 때였다.
“아, 요즘은 영 할 만한 일이 없네.”
“할 거 없는데 이거라도 할까? 위험하기는 해도 금액이 센데.”
“야야, 지난번에 가리아 그 새끼가 그거 가져갔다가 뒈졌던 거 잊었냐? 우리 실력으로는 안 돼.”
베로니카는 대화 소리를 듣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너 명의 남자들이 여관 벽 쪽을 보며 저들끼리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전부 다 무기를 차고 방어구를 입고 있었다. 여행객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용병일까?
그녀의 궁금증은 엔디미온이 해결해주었다.
“악마사냥꾼들이야. 남부는 성기사들 대신에 악마사냥꾼들이 악마와 악귀들을 해치우거든.”
“오, 그럼 이곳은 신전이 없나요?”
“있지. 악마사냥꾼들이 악마와 악귀들을 죽이면 그들한테 돈을 주는 게 신전이야.”
“왜 성기사들이 직접 죽이지 않고 악마사냥꾼들에게 일을 맡기는 건가요?”
엔디미온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남부는 본래부터 토속신앙의 세력이 강성한 곳이라 여명교단이 힘을 발휘하기 쉽지 않은 곳이야. 백 년 전에도 그랬지. 그래서 성기사들 대신에 악마사냥꾼들이 활동하는 거고. 비다르도 악마사냥꾼 출신이야.”
“오, 강철 주먹의 비다르를 아쇼? 우리 남부의 자랑이지! 으하하하!”
여관 주인이 맥주 세 잔을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크게 웃었다. 엔디미온으 별 말 없이 웃기만 했다. 그리고 여관 주인이 다시 주방으로 사라지자 픽 웃으며 말했다.
“비다르가 여기에 왔으면 아주 난리가 났겠군.”
베로니카도 웃었다. 그들이 맥주를 마시는 사이에 여관 안으로 더 많은 악마사냥꾼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벽에 붙은 종이를 이리저리 보면서 저들끼리 시끄럽게 떠들었다. 거친 성미의 남자들이 많은지라 가끔씩 가벼운 몸싸움이 날 때도 있었는데 여관 주인이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을 보니 자주 있는 일인 듯 했다.
그 사이에 문에 달린 종이 딸랑 소리를 내며 손님을 받아들였다. 그 자는 이 날씨에 덥지도 않은 것인지 망토를 두르고 모자를 눌러써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악마사냥꾼들은 새로운 손님에 별로 신경도 쓰지 않으며 저들끼리 떠들어댔고 여관 주인 역시 새로운 손님이 들어온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은밀하고 조용하게 들어온 새로운 손님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엔디미온을 발견하고 고개를 딱 멈췄다. 모자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환하게 빛나는 황금색 두 눈만은 선명했다.
그 자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찾았다.”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엔디미온은 자기 정면에 있는 수상쩍은 사람을 발견했다. 그리고 한 마디 툭 내뱉었다.
“뭘 쳐다 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