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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38화 (13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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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기사의 책무는 단순히 악마들의 머리통만 잘 깨는 것이 아니다. 영웅으로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역할을 겸해야 하기에 엔디미온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격식을 차렸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정중한 말씨를 쓰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바로 지금처럼 척 보기에도 성가신 일을 만들 것 같은 사람에게는 퉁명스럽게 말을 하는 것이다.

“잠깐 시간 괜찮을까?”

수상쩍은 사람은 엔디미온의 퉁명스러운 말에도 주눅 들지 않고 가까이 다가왔다. 목소리와 체형을 보니 여자인 것 같았는데 엔디미온 입장에서는 여자든 남자든 별 상관이 없었다. 귀찮게 군다면 머리부터 바닥에 꽂아줄 생각이었으니까.

“아니, 시간 없는데.”

“한가하잖아?”

끈덕지게 달라붙는 여자를 슬쩍 쳐다본 엔디미온은 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꿀꺽 넘긴 후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한가하긴 하지. 내가 시간이 없다고 말한 건 너한테 쓸 시간이 없다는 소리야. 알았으면 꺼져.”

“흐응. 생각보다 쌀쌀맞네. 옛날에는 좀 더 친절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하긴 백 년이면 사람이 바뀔 만도 하지.”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마치 엔디미온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 엔디미온은 여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망토에 달린 모자로 가려져 있어서 생김새를 알 수 없었지만 명정한 시선이 어둠을 넘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지.”

엔디미온은 친절하게 손가락 두 개를 들어보였다. 그리고 하나를 접으며 말했다.

“비밀을 비밀답게 간직하는 사람.”

또 하나의 손가락이 접혔다.

“비밀을 쉽게 떠벌리다가 죽는 사람.”

엔디미온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상쩍은 자는 여자치고 키가 컸지만 그래도 엔디미온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머리 하나만큼 키가 차이 났기에 여자는 엔디미온을 올려다봐야 했다. 그리고 내려다보는 자의 시선은 위압적이었다.

“너는 후자의 사람이냐. 한 가지 충고하지.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고 해서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마라. 그게 비밀스럽고 매혹적인 소문이라면 더더욱. 내가 널 한 번 살려주는 거다. 두 번은 없어. 알았으면 돌아가.”

명백한 협박이었다. 목소리는 묵직했고 또한 위압감이 있었다. 베로니카는 만약 자신이 저 여자였다면 기세에 눌려 뒤로 넘어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성배기사는 악마를 죽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언제나 정의를 쫓고 악을 몰아내기 위해 싸우므로 쉽게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악마를 죽일 수 있는 힘은 사람도 죽일 수 있는 법이다.

“하, 지금 협박하는 거야? 그런데 이거 어쩌지? 난 그런 협박에 굴할 만큼 나약하지가 않아서. 그리고 전능자의 종이란 자가 너무 위협적으로 구는 거 아니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냥 너한테 말 걸고 친한 척 좀 한 것뿐이잖아?”

말 많은 놈이로군. 엔디미온이 여자를 쫓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릴 때였다.

“난 그냥 이야기나 좀 하려는 것뿐이야. 겸사겸사 좀 친해지기도 하고. 너무 빡빡하게 굴 것 없잖아? 내가 너라면 오히려 내 정체가 궁금해서 그냥 보내지 않았을 것 같은데? 잘나신 성배기사님은 내가 누구인지 안 궁금하신가?”

여자가 엔디미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서 보라색 기운이 불꽃처럼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그게 무엇인지 몰라볼 만큼 엔디미온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대강 알겠군. 자기 주제도 모르는 멍청한 악마숭배자였어.”

“응?”

“내가 하지 않아도 여기 있는 악마사냥꾼들이 널 해치우겠지.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길 생각은 없다.”

엔디미온은 식탁 위에 있던 잔을 집었다. 안에는 물이 들어있었는데 그가 잔을 집고 들어 올리는 잠깐의 순간에 내용물이 전부 성수로 변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여관 안이니 되도록 얌전한 방식으로 악마숭배자를 제압할 생각이었다.

여자를 향해 뿌려진 성수는 한 모금 정도로 적었지만 사악한 기운을 정화하고 악마숭배자의 힘을 약하게 만드는 효력이 있었다. 여자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하다가 그대로 성수를 몸에 맞았다.

여자가 작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비틀었다.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성수에 대한 저항력이 있는 것을 보면 보통 악마숭배자가 아닌 모양이었다.

엔디미온은 여자가 반격하기 전에 먼저 움직였다. 그의 주먹이 곧게 나아갔고 그대로 여자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 반동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모자가 뒤로 넘어갔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아래로 쏟아졌는데 마치 보석처럼 빛나는 연녹색이었다. 쉽게 볼 수 없는 색깔인 동시에 마치 보석 같은 반짝거림이 있어서 여관 안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여자에게 모였다.

고양이처럼 날렵한 눈매와 매끈한 콧날, 그리고 살짝 깨문 장밋빛 입술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엔디미온조차 그녀의 얼굴에 잠깐 주춤했다. 하지만 곧 다시 움직였다. 악마숭배자들, 특히 마녀들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 육체와 아름다운 얼굴을 위해서 악마에게 온갖 것들을 바쳤다.

사람으로서 감히 하기 힘든 일들도 악마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기꺼이 했다. 지금 이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은 결국 악마에게 열심히 충성했다는 증거일 뿐이었다.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더욱 성실한 악마의 종복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망설임 없이 주먹을 휘두를 수 있었다.

“잠깐, 잠깐!”

여자가 뒤로 물러나면서 다급히 외쳤지만 엔디미온은 듣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또 한 번 주먹을 날렸다. 여자는 날렵하게 피했으나 이미 또 하나의 주먹이 그녀를 추격하는 중이었다.

손을 들어서 날아오는 주먹을 쳐내는데 갑작스럽게 왼쪽 정강이가 아팠다. 그것도 몹시. 슬쩍 내려다보니 어느새 엔디미온의 발차기가 정강이에 직격해 있었다. 빠르다. 감탄할 새도 없이 날아온 손이 그녀의 멱살을 붙잡았다.

세상이 빙그르르 돌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머리 위에서 발이 떨어지고 있었다. 맞으면 머리가 깨진다. 여자는 빠르게 바닥을 구른 후에 벌떡 일어났다.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흐름이다. 흐름이 넘어가면 다시 찾아오기가 몹시 힘들다. 여자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엔디미온을 슬쩍 봤다가 가까이 있는 식탁을 들어서 던졌다.

주변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감탄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무거운 식탁을 한 손으로 들어서 던지다니 엄청난 괴력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엔디미온의 대처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날아오는 물체를 반사적으로 피하려고 했을 것이다. 크기가 작은 것이라면 손으로 잡으려고 했겠지만 식탁은 손으로 잡기에는 너무 컸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잡지도 않았다.

그는 정면으로 주먹을 날렸다. 두꺼운 나무로 만들어진 식탁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여러 조각으로 분리되어 사방으로 날아갔다. 주변의 구경꾼들이 또 한 번 놀랐다.

하지만 그 순간 턱을 때리는 주먹에 얼얼함을 느꼈다. 여자가 식탁을 던진 것은 단순히 위협을 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엔디미온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 뒤에 숨어서 빠르게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

식탁이 부서지는 순간에 맞춰서 모습을 드러낸 여자는 자세를 낮추고 엔디미온의 배에 주먹을 꽂았다. 정확하게 들어간 일격이었다. 공격 기회를 잡았을 때 쉬지 않고 또 한 번 복부에 일격.

그 다음은 뒤로 물러나려는 엔디미온을 쫓아서 도약했다. 식탁 위까지 훌쩍 뛰어오른 후에 그것을 디딤대로 삼아서 또 한 번 뛰었다. 길쭉한 다리가 채찍처럼 엔디미온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러나 엔디미온의 비명은 없었다. 애초에 공격이 맞질 않았으니까. 여자가 날린 발차기는 엔디미온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눈으로 쫓지도 못할 속도였고 설령 눈으로 움직임을 쫓았다고 해도 엄청난 힘 때문에 감히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손쉽게 다리를 잡아챈 엔디미온은 여자의 몸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끌려가면 당한다. 여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켜서 붙잡히지 않은 쪽의 다리로 또 한 번 엔디미온의 머리를 노렸다.

“큭!”

이번에도 붙잡혔다. 엔디미온은 두 손으로 여자의 다리를 잡은 후에 곧장 바닥을 향해 던졌다. 여자의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가 탄력적으로 튕겨져 나왔다. 날렵하게 두 번의 뒤돌기 후에 다시 착지한 여자의 입에서 약간이지만 피가 흘렀다.

그녀가 다시 주먹을 쥐자 엔디미온은 바로 움직였다. 그가 주먹을 날리면 여자는 손으로 쳐내거나 아니면 몸을 움직여 피했다. 처음에는 아주 빠르게 공방이 이어졌다. 구경꾼들이 감히 눈으로 쫓아갈 수 없을 속도의 공방이었다.

하지만 점차 여자가 주먹에 얻어맞는 횟수가 늘어갔다. 가랑비에 젖듯이 차츰차츰 누적되는 충격이 여자의 몸을 둔하게 만들고 있었다. 또한 정신력 역시 갉아먹는 중이었다. 주먹에 맞을 때마다 심리적으로 압박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번에는 피했지만 다음에도 피할 수 있을까? 이렇게 아픈 주먹을 한 번 더 맞고서도 버틸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은 몸을 둔하게 만들고 둔해진 몸은 쉽게 공격에 노출된다. 여자는 이제 공격을 막는다기보다는 맞고 있었다. 정신이 혼미해질 때 불쑥 시야 안으로 들어온 주먹이 있었다. 그것에 맞고 고개가 크게 뒤로 젖혀졌다.

엔디미온은 완전히 궁지에 몰린 여자의 멱살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단단히 잡은 후에 힘껏 바닥을 향해 던졌다. 쿵 소리가 나면서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여자가 컥 소리를 냈고 엔디미온이 곧장 발로 그녀의 가슴을 눌렀다. 위에서 누르는 힘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여자는 연신 컥컥 소리를 냈다. 때때로 핏물이 왈칵 쏟아져서 엔디미온의 신발을 더럽혔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사악한 것들을 물리칠 때는 자신의 몸에도 오물이 묻는 법이다. 몹시 당연한 일이기에 신경 써야 할 이유가 없었다.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어찌 더러운 것을 청소하겠는가.

“이제 끝이다. 내가 말했지. 비밀을 쉽게 떠벌리는 놈들은 반드시 죽는다고. 넌 너무 설쳤다, 악마숭배자야.”

이제 곧 단단한 주먹이 여자의 머리통을 부술 것이다. 온갖 것들이 쏟아져서 바닥을 더럽히게 되겠지. 여자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을 보면서 다급히 외쳤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무슨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악마숭배자가 아니야! 용이라고! 씨발, 난 용이란 말이야!”

엔디미온의 주먹이 여자의 머리를 부수기 바로 직전에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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