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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라고?”
인간과 요정, 그리고 난쟁이는 전능자의 선량함으로부터 탄생했으며 악마와 악귀는 대악마의 사악함으로부터 탄생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들 외의 또 하나의 생명체가 살았으니 그것이 바로 용이었다.
그들은 전능자와 대악마 중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태어난 자들이었다. 거대한 덩치와 단단한 비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무장한 그들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다.
용 한 마리가 악마와 맞먹을 정도로 강력했으니 사람들은 굳이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으며 악마들 역시 특별한 이유 없이 그들을 자극하지 않았다.
용들은 오랜 시간 동안 자유롭게 살았으나 결국은 이 세상의 일부였다. 대악마가 군세를 일으켜 거대한 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들 역시 선택해야 했다. 사람들과 함께 대악마와 맞서 싸울 것이냐, 아니면 대악마와 손을 잡고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냐.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대부분의 용들은 중립을 택했다. 하지만 일부 용들은 대악마와 접촉했고 사악한 힘을 받아들여 사룡이 되었다. 그들은 전장에서 하늘을 날고 불을 뿜으며 날카로운 발톱으로 적들을 학살하며 활약했다.
용들의 강력함을 눈 여겨 본 다르디낭은 중립을 선언한 용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은밀하고 사악한 사술로 그들의 회유하고 꾀면서 정신을 오염시켰다. 수많은 용들이 타락하여 사룡이 되었으며 거대한 군세의 선봉장이 되었다.
전장에서 엄청난 위용을 뽐내던 그들이었지만 그 말로는 처참했다. 영웅들에 의해 날개가 잘리고, 발톱이 뽑히고, 목이 부러져 죽었다. 수많은 용들의 시체가 만들어낸 뼈의 산은 성기사들의 자랑거리였다.
“전부 다 죽은 줄 알았더니.”
엔디미온은 여전히 발로 여자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이 여자가 악마숭배자가 아니라 용이라고 해서 살려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악마숭배자보다 용이 더 위험하니 반드시 죽여야 했다.
“도마뱀 놈들이 몇 살아있었던 모양이군. 겨우 건진 목숨이라면 소중하게 쓸 것이지, 왜 나한테 덤빈 거냐.”
“아니, 컥, 내가 덤빈 게 아니라, 네가 먼저 공격한 거잖아······.”
여자가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엔디미온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허리춤에 있는 성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용이 상대라면 주먹으로 때려죽이는 것보다 성검으로 심장을 찌르는 것이 더 확실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엔디미온.”
에투알의 목소리에 엔디미온의 손이 멈추었다.
“갑자기 왜?”
“이곳에서 벨 셈이오? 주변에 보는 눈이 많소. 저들은 우리의 사정을 모르니 도시 안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난리가 날 수도 있소. 죽일 때 죽이더라도 보는 눈이 없는 곳으로 가서 해야 하오.”
엔디미온이 고개를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거리를 찾고 있던 악마사냥꾼들이 전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무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여차하면 달려들 것 같았다.
“어쩔 수 없군. 베로니카.”
“네?”
“마법으로 결박해.”
“제가요?”
“그래.”
“용을요?”
“그래.”
“제가 마법으로 용을 결박하라고요?”
“너 나한테 한 대 맞으려고 그러는 거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베로니카가 격렬하게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용이잖아요? 이 사람 용이잖아요? 막 입에서 불 뿜고 그러는 용이잖아요? 제 마법이 듣기나 할까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용이 대단하지는 않아. 그리고 싸우는 걸 보니 이 녀석은 별로 강하지도 않고. 그냥 써.”
베로니카는 우물쭈물하다가 여자를 향해서 마법을 사용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용은 얌전히 마법에 의해 결박됐고 엔디미온은 그런 그녀의 몸 위에서 발을 치웠다.
멱살을 잡고 다시 일으키자 여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좀 상냥하게 대해줄 수는 없어?”
“내가 왜.”
엔디미온은 여자를 바깥으로 데려나가기 위해 손으로 등을 쿡 찔렀다. 여전히 찡그린 얼굴의 그녀가 여관의 문을 향해서 걸어갔다.
베로니카는 이 소란스런 상황에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라이오넬을 깨워서 일으켰다. 그는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서 입을 열었다.
“음?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설명하자면 길어요, 영감님. 자자, 얼른 가자고요.”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악마사냥꾼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엔디미온은 여관 안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나는 에스메렐다 추기경이 이끄는 황금장미 기사수도회의 성기사요. 임무 수행 중이니 신경 쓰지 말고 각자 할 일들 하시오.”
당당함은 거짓말도 진실로 만든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에스메렐다와 황금장미 기사수도회의 이름을 도용한 그는 순식간에 신실한 믿음으로 임무를 수행 중인 성기사로 둔갑했다.
악마사냥꾼들은 그제야 무기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끄덕였다. 웅성거림이 잦아들자 엔디미온은 일행들과 함께 여관 바깥으로 나갔다.
“거짓말이 제법인데?”
여자는 길을 걸으면서 입 안의 핏물을 뱉어냈다. 엔디미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여자를 데리고 사람들이 없는 골목길로 들어갔다. 라이오넬과 베로니카가 길의 양쪽을 막고 여자와 엔디미온이 두 사람 사이에 섰다.
베로니카는 자기가 길을 막는다고 도움이 되기는 할까 하고 생각했다. 애초에 일개 마법사가 용을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응? 그런데 용이라면서 왜 인간이지?”
여자는 자기 스스로를 용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엔디미온도 별 의심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고. 그러니 진짜 용이긴 한 모양인데 베로니카가 책에서 본 용들은 전부 커다란 덩치와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용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거야 변신했으니까. 요즘 같은 시대에 본래 모습으로 날아다니면 화살 맞는다고.”
궁금증은 용이 직접 해결해주었다. 변신 마법이라니. 용은 참 재주가 많구나 하고 베로니카는 막연히 생각했다.
“여기는 보는 눈도 없으니 죽이기 딱 알맞군. 다른 사람이 오기 전에 얼른 끝내지.”
“아니, 잠깐만! 지금 엄청 큰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날 왜 죽이려는 거야?”
“왜냐고?”
엔디미온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말했다.
“용들은 대악마의 하수인들이니까. 죽일 이유는 충분한 것 같은데.”
“그게 오해라는 거야. 물론 많은 용들이 대악마의 하수인이 되기는 했지만 모든 용이 그랬던 것은 아니야. 끝까지 중립을 지키면서 살아간 용기 있는 용들도 있다고!”
“진짜 용기 있는 용이라면 중립을 지킬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싸웠어야지. 대악마가 무서워서 도망쳤던 놈들은 그냥 겁쟁이일 뿐이야. 그리고 그런 놈들을 용기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자들에 대한 모욕이고.”
엔디미온의 목소리가 싸늘해서 여자가 몸을 움찔했다. 그 말이 맞았다. 대악마의 마수로부터 벗어난 용들은 사악한 존재들과 맞서 싸우는 대신에 대악마의 힘을 두렵게 여기며 숨어버리는 것을 택했다.
결국 이 세상을 대악마로부터 지켜낸 것은 영웅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이었다.
“크흠, 그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말실수였어. 하지만 모든 용이 나쁜 것은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해. 자발적으로 대악마의 밑으로 들어간 놈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용들은 억지로 끌려간 거라고. 나처럼 말이야.”
여자가 정신을 집중하자 몸에서 사악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본래 용이 가진 힘을 생각하면 아주 미약한 수준이었다. 엔디미온이 흐음 소리를 내자 여자가 이어서 말했다.
“난 너희 영웅들이 대악마를 죽이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어. 네 덕분이니 일단 감사의 말을 전할게. 대악마가 죽고 나서 내 몸을 잠식했던 사악한 기운들도 점차 약해졌어. 물론 약간은 남았지만 이 정도는 악귀만도 못한 양이야. 제발 날 믿어 줘.”
“에투알.”
나직이 부르는 소리에 성검이 대답했다.
“음, 이 용의 말대로 몸 안에서 느껴지는 사악한 힘은 아주 미약한 수준이요. 거짓말은 아닌 것 같소.”
“거 봐! 그거 성검이지? 성검도 내 말이 맞다고 하잖아! 난 너희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전혀 없어! 진짜 개미 눈곱만큼도 없다고!”
엔디미온이 입을 다문 채로 흐음 소리를 냈다. 몹시 고민하는 그를 본 여자가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알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지금 일단 용부터 죽이고 나서 생각하려는 중이란 것을. 메모하자. 성배기사는 요정과 용을 싫어한다······.
“일단 이야기를 좀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소, 엔디미온.”
다행히도 에투알의 말 덕분에 용이 단칼에 목이 잘리는 일은 없었다. 엔디미온은 일단 말해보라는 듯 여자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이야기 할 기회를 줘서 고마워. 일단 내 이름은 나엘라티나야.”
나엘라티나가 침을 한 번 삼킨 뒤에 말을 이었다.
“나는 대악마가 죽고 나서 정신을 차린 동족들과 함께 도망쳤어. 그리고 각자의 보금자리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1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하나둘씩 연락이 안 되기 시작하는 거야. 처음에는 그냥 연락하는 게 귀찮아졌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누군가 내 동족들을 사냥하고 있었던 거야.”
“용을 사냥한다고?”
“그래. 이제 남은 용은 몇 마리 없어. 나도 사냥당하기 전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널 찾아다녔던 거고.”
“용을 사냥한다는 걸 보니 용에게 당한 게 많은 자인가 보군.”
나엘라티나가 발끈했다.
“백 년 전이라면 몰라도 요즘 시대에 용한테 원한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어! 우리는 백 년 넘게 꼭꼭 숨어 살았단 말이야!”
“집안의 대를 이어온 원한이라던가······.”
“너도 말 안 되는 거 알잖아.”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왜 나한테 도움을 청하러 온 거냐. 애초에 왜 내가 널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지? 나는 전능자의 종이고 길 잃은 어린 양들을 위해서 일한다. 용을 지켜줘야 할 이유는 없어.”
“나도 알고 있어. 나는 한때나마 대악마의 하수인이었고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어. 그것은 명백히 내 죄야. 용서 받을 수도 없고. 본래라면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겠지. 하지만 내가 굳이 널 찾아온 것은 나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고 또한 너도 이번 일과 무관하지 않아서야.”
“나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그래.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내 동족들을 사냥하는 자에 대해서 조사했어. 그리고 사냥꾼이 누구인지 알아냈지.”
“그게 누군데.”
나엘라티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룽고르의 마법사왕.”
“뭐?”
“네 친구 바이올렛이라고. 갑자기 헤까닥 돌아버렸는지 내 동족들을 사냥하고 다니고 있어. 그 미친년, 가만히 있는 우리들은 대체 왜 건드리는 거야?”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이름에 엔디미온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말하면서도 아니란 것을 알았다. 바이올렛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마법으로 죽인 용의 숫자만 해도 열 마리가 넘었다. 오히려 용들이 그녀에게 원한을 가져야 할 수준이었다.
“아니야.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 미친년은 아무래도 우리의 시체가 목적인 것 같아. 가만히 두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그런데 바이올렛은 네 친구 아니었어? 갑자기 왜 변절한 거야?”
그건 오히려 내가 알고 싶은데. 엔디미온은 바이올렛이 뒤에서 수상쩍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단 알겠다. 여관의 방에서 마저 이야기하자고.”
바이올렛은 용의 시체에 사술을 부려서 부하로 써먹으려는 걸까?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몹시 귀찮은 이야기였고.
엔디미온 일행은 다시 여관으로 돌아갔다. 일거리를 찾아보고 있던 악마사냥꾼들이 다 떠나고 없어서 아까와 같은 소란은 없었다. 엔디미온이 그대로 식당을 가로질러서 방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여기 황금장미 기사수도회의 성기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구냐! 나와라!”
여관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는 한 남자를 보면서 엔디미온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니, 또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