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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그럼 얼른 가실까요?”
대들어봤자 돌아오는 것은 주먹뿐이란 사실을 깨달은 토비아스는 이제 몹시 공손해졌다. 엔디미온이 고갯짓을 하자 얼른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그는 엔디미온 일행이 다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일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나왔다.
“자, 이쪽입니다!”
꼭 길잡이한테 관광 안내 받는 것 같네. 베로니카가 실실 웃었다. 단지 비유였지만 실제로도 토비아스는 훌륭한 길잡이였다. 그는 신전까지 가는 길에 누가 물어보지도 않은 것들을 이리저리 떠들어댔다.
단순히 목소리만 큰 게 아니라 말도 많은 사람이었다. 본래 엔디미온의 성격대로라면 시끄럽다고 면박을 줬겠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에게 맞지 않으려고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토비아스의 모습이 가상했기 때문이었다.
“자, 왼쪽을 보시면 저기가 라디아나란 곳인데······.”
“곳인데?”
“······닭다리 구이가 아주 기가 막힙니다.”
“오.”
“그리고 오른쪽을 보시면 카센이란 곳이 있는데······.”
“있는데?”
“······맥주가 아주 달고 시원합니다.”
“오호.”
토비아스가 떠들어대는 것은 전부 다 관광과 관련된 것들뿐이었다. 엔디미온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열심히 들었다. 듣는 사람이 있으면 말하는 사람도 흥이 나는 법이다.
토비아스가 설명하고 베로니카가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쿵짝이 맞았다. 이대로 두면 정말 라티에티 관광을 떠날 것 같아서 엔디미온이 입을 열었다.
“토비아스.”
“······그리고 저 가게는 생선 절임이 맛있는데, 아, 넵. 부르셨습니까?”
“신전의 사제가 날 찾는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아이딘 사제님이 성기사님을 찾으셨습니다.”
“혹시 왜 날 찾는지 알고 있나?”
신전의 사제가 성기사를 찾는다.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겠지만 엔디미온은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다. 설마 이곳에서는 여명교단의 위신이 서지 않으니 악마사냥꾼들의 기강을 좀 잡아달라거나 그런 부탁을 하는 게 아닐까.
아무리. 엔디미온은 혼자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은 백 년 전부터 악마사냥꾼들이 활동하던 지역이었다. 이제 와서 여명교단이 무리하게 교세를 확장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글쎄요. 저도 그냥 데리고 와달라는 부탁만 받아서요. 사제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셔서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데 넌 악마사냥꾼이면서 왜 사제의 심부름을 하는 거냐?”
“아니, 그게 뭐 어때서요. 사제님이 부탁하면 좀 들어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아이딘 사제님은 악마사냥꾼들이 다쳐서 돌아오면 언제나 상처를 봐주신다고요. 저도 몇 번 도움을 받았으니 간단한 부탁 정도는 들어줘도 상관없잖아요.”
생각보다 신전과 악마사냥꾼들의 사이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럼 사제가 악마사냥꾼들의 기강을 잡아달라는 이상한 부탁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다 왔는데요?”
“뭐?”
“정면에 저 건물 보이십니까? 저게 라티에티의 신전입니다.”
토비아스가 손가락으로 정면의 건물을 가리켰다. 엔디미온은 당황했다. 정면에 있는 것은 신전이라기보다는 가정집에 가까울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교세가 약한 남부 지역에서 다른 곳보다 신전을 작게 짓기는 해도 어느 정도의 규모는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라티에티의 신전은 대체 어디가 신전이라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작았다.
엔디미온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토비아스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아니, 이게 말입니다. 원래는 더 컸는데 아이딘 사제님이 워낙 검소하신 분이거든요. 사제님의 말씀에 따르면 독신자가 머무는 곳이 곧 전능자의 집이니 신전의 규모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사제도 본인뿐이니 크기만 큰 신전은 낭비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검소해도 이건 좀······. 진짜 뒤르겔의 성기사가 와서 봤다면 뒷목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커다란 신전에 익숙해져 있을 것이니 이런 허름한 신전은 신전으로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규모가 이 정도면 따로 머물고 있는 기사수도회도 없겠군.”
신전에는 본래 기사수도회가 상주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신전이라면 성기사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명목상으로 성기사가 한 명 정도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기사수도회는 없어도 악마사냥꾼들이 있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하하하!”
눈치도 없이 웃는 토비아스에게 한 마디 하려다가 그냥 참았다. 엔디미온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그래, 여기까지 안내하느라 수고했다. 이건 팁이다.”
청명한 금속음이 나면서 공중에서 무언가 반짝이며 날아갔다. 토비아스가 반사적으로 잡고 보니 반짝이는 금화였다.
“헉! 이거 저 주시는 겁니까?”
“그래, 수고비다.”
“감사합니다! 이야, 이런 귀인이신 줄 모르고 제가 함부로 까불었습니다, 하하하!”
거 배알도 없는 놈이네. 엔디미온은 실실 웃는 토비아스에게 얼른 사라지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러자 토비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빠르게 자리를 떴다.
“이제 들어가자고.”
엔디미온이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났다.
“오, 귀한 걸음해주셨습니다. 신전이 많이 좁으니 조심하시지요.”
신전 안은 좁지만 정갈했다. 잠잘 곳과 식사할 곳을 제외하면 전부 기도를 위한 공간과 상처를 돌보기 위한 공간이었다. 욕심을 내지 않고 있어야 할 물건만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을 보니 비록 규모는 작아도 그 신앙심만큼은 거대한 신전과 다를 게 없었다.
“당신이 날 찾았다고 들었는데.”
“이름난 황금장미 기사수도회의 성기사를 만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아이딘이라고 합니다.”
아이딘 사제는 허리가 굽고 머리가 거의 다 벗겨진 노인이었다. 엔디미온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작은 몸이었지만 그 안은 곧은 심지와 경건한 신앙심으로 가득했다. 그 누구도 이 늙은 사제를 얕잡아 볼 수 없었다. 그는 작은 거인이었다.
엔디미온은 아이딘에게 악수를 청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을 맞잡자 그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엔디미온은 일생을 전능자에게 바쳐온 것이 분명한 이 사제가 마음에 들었다.
“반갑소. 나는 엔디미온이오.”
“성배기사의 이름이군요. 사내아이가 으레 그러하듯, 저 역시 한때 성배기사를 동경해 성기사가 되려고 했지만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고 사제가 되었지요.”
“사제 역시 성기사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이오.”
“사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자들에 비하면 하찮은 역할입니다.”
겸손하군. 엔디미온이 말했다.
“이곳을 혼자 관리하고 있으시오?”
“옛날에는 사제 셋에 성기사 한 명이 신전을 관리했습니다만 지금은 저 혼자입니다. 사제 두 명은 어린 나이에 이곳에서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워 뒤르겔로 신학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보내주었고 성기사는 더 큰 신전이 있는 도시로 보냈습니다. 대신에 다른 도시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물자들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힘들지는 않소?”
“모두 전능자를 위하는 일인데 무엇이 힘들겠습니까? 그리고 이곳에는 듬직한 악마사냥꾼들이 많이 있으니 걱정거리도 없지요.”
엔디미온은 뒤르겔의 일을 떠올렸다. 성기사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서 오만함이 된 에우레킬슨,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부를 채우려고 했던 에스메렐다. 비록 그들이 회개했다고 해도 한때 잘못을 저질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정말 전능자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일하는 종복은 뒤르겔이 아닌 이 허름한 신전에 있었다. 엔디미온은 이 사실이 안타까우면서도 기뻤다. 선한 의지는 들불과 같아서 주변에 있는 것들을 모두 자신의 색으로 물들였다.
아이딘의 선의 역시 그럴 것이다. 분명히.
“그래서 어쩐 일로 나를 찾으셨소?”
“아,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입니다.”
“부탁?”
아이딘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시겠지만 이곳에는 기사수도회가 없습니다. 대신에 악마사냥꾼들이 있지요. 그들의 용맹함은 성기사들에 비해 모자랄 것이 없지요. 하지만 분명히 말해서 그들이 성기사들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맞는 말이다. 성기사와 악마사냥꾼은 다르다. 하는 일이 비슷해도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대체할 수는 없다.
“성기사들은 기사수도회라는 집단에 속해 있습니다. 그에 비해 악마사냥꾼들은 개별적으로 활동하지요. 그래서 악마사냥꾼들은 기동성이 뛰어나지만 너무 강대한 적이 나타났을 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지요. 그에 비해서 성기사들은 비록 움직임이 굼뜨기는 해도 강대한 적도 확실하게 무찌를 수 있습니다.”
“내게 어떤 부탁을 하려는지 알겠군. 악마사냥꾼들로는 대처할 수 없는 적이 나타났다는 뜻 아니오?”
“과연 이해가 빠르십니다. 맞습니다. 엔디미온 경은 타리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당연히 들어봤다. 엔디미온 일행은 그 악마를 죽이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니까. 아이딘은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말을 이었다.
“라티에티 주변에 갑작스럽게 삼림이 생겨났습니다. 이곳의 기후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지요. 그래서 악마사냥꾼 몇이 조사를 나갔는데 한 명만 겨우 돌아왔습니다. 알고 보니 타리샤의 짓이더군요. 대악마의 적자 말입니다. 삼림은 점차 크기가 커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라티에티까지 집어삼킬지도 모르지요. 그러기 전에 처리해야 합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악마사냥꾼들끼리 토벌대를 구성하면 되는 것 아니오?”
아이딘이 쓰게 웃었다.
“악마사냥꾼들은 모두 각자의 개성이 강한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로 토벌대를 구성한다고 해도 누가 지휘를 맡아 그들을 통제하겠습니까? 또한 토벌대는 서로의 합이 잘 맞아야 하는데 그들은 그런 훈련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맞는 말이군.”
“엔디미온 경. 부디 이번 일에 기사수도회가 나설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라티에티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하센 대교구가 있습니다. 그곳을 중심으로 토벌대를 꾸리면 될 것입니다.”
“바라는 것은 타리샤의 토벌 하나뿐이오?”
“저는 일생을 전능자를 위해 살아왔고 또한 라티에티의 안녕을 위해 힘썼습니다. 이 도시를 위협하는 간악한 적이 사라진다고 하면 그것 말고 또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것은 탐욕이니 전능자의 가르침에 반하는 일이지요.”
“며칠 내로 문제가 해결될 거요.”
“감사합니다. ······네? 아니, 며칠 내로 말입니까?”
아이딘은 당황했다. 여기서 하센까지 가는 데만 해도 일주일은 걸린다. 그런데 무슨 수로 며칠 내로 끝내겠다는 말인가?
엔디미온은 웃으며 말했다.
“아무 걱정할 것 없소. 애초에 해야 하는 일이었소. 내 의무거든.”
얼른 이해하기 힘든 말을 남기고서 엔디미온은 신전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