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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쉬고 내일 아침에 바로 움직여야겠군.”
신전을 나온 엔디미온 일행은 여관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따갑게 쏟아지던 햇살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아이딘에게 며칠 내로 해결해주겠다고 말했으니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서 타리샤를 죽일 생각이었다. 타리샤는 다르디낭의 적자지만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물론 보통의 악마보다는 강하지만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약하다는 뜻이다.
엔디미온과 라이오넬의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베로니카 역시 많은 전투를 경험하면서 실력이 올랐으니 타리샤 정도는 셋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너는 왜 자꾸 따라오냐?”
“어? 나?”
나엘라티나가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여관에서부터 엔디미온 일행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아니, 아직 우리 이야기가 안 끝났잖아? 네가 방에서 마저 이야기하자며?”
그랬었나? 그랬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엔디미온은 토비아스가 난리를 친 것 때문에 나엘라티나와의 약속을 까먹고 말았다. 그는 이제야 아까의 일을 떠올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군.”
“귀찮다니! 이거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바이올렛, 그 미친년이 우리 시체 가지고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래!”
“알겠으니까 조용히 따라 와.”
“알겠어!”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엘라티나를 보며 엔디미온이 한숨을 내뱉었다. 왜 성가신 일은 한꺼번에 닥치는 걸까.
“어서옵쇼!”
여관 주인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으며 여관 안으로 들어온 엔디미온 일행은 그대로 방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길을 막는 여관 주인 때문에 잠깐 멈춰야 했다.
엔디미온은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며 무슨 일이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여관 주인이 손을 비비며 말했다.
“저기······. 박살난 식탁과 잔에 대한 변상을 좀 해주셔야겠는뎁쇼, 나리.”
“······.”
조금 억울했다. 잔이야 자기가 부순 거니까 당연히 변상하겠지만 식탁은 나엘라티나가 던지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부순 건데 이걸 왜 내가 전액 변상해야하지? 반반 나눠서 부담해야 되는 거 아냐? 엔디미온은 나엘라티나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이거면 되겠나?”
어쩔 수 없이 엔디미온이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냈다. 그 돈이면 잔과 식탁을 수십 개는 살 수 있었다. 여관 주인이 허리가 부러져라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십쇼!”
희희낙락한 얼굴의 여관 주인이 사라지자 엔디미온은 또 한 번 한숨을 내뱉었다. 금화 백 개를 찾아서 벌써 두 개나 썼다. 다음에는 좀 더 아껴 써야지.
“일단 방으로 가자고.”
모두가 엔디미온의 방에 모였다. 네 명이 모여서 이야기하기에는 좁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보자고. 바이올렛이 용들을 죽이고 그 시체를 모으고 있다고?”
“그래.”
“그런데 너는 바이올렛이 용들을 죽이고 다닌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직접 봤나?”
“응.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내 친구를 사냥하고 있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고. 처음에는 친구를 도와주려고 했지. 하지만 그 보라색 머리카락을 보는 순간 몸이 얼어붙었어. 강력한 마법으로 혼자서 용을 사냥하는 보라색 머리카락의 마법사. 이게 누구인지 뻔한 거잖아? 용 학살자 바이올렛.”
그것은 바이올렛이 열 마리도 넘는 용을 혼자서 학살하고서 붙은 별명이었다. 그 별명은 성기사들에게는 용기를 주었고 용들에게는 두려움을 주었다.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군. 그래서 나한테 네 친구들의 복수를 부탁하려고?”
“아니.”
“그러면?”
“바이올렛은 내가 죽일 거야. 난 네게 복수를 도와달라는 거지, 대신해달라는 게 아니야.”
나엘라티나의 두 눈이 불타는 것처럼 이글거렸다. 호오. 엔디미온은 약간 감탄했다. 생각한 것보다 제법 강단이 있는 용이었다.
“혹시 바이올렛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아니, 그건 나도 몰라.”
바이올렛의 마법 실력은 라우렌시오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었다. 마법을 대성한 존재는 거리에 상관없이 어디든 갈 수 있었기에 그 위치를 특정하는 것은 힘들었다.
“하지만 용들을 사냥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나를 찾아오겠지. 날 미끼로 써.”
“그거 괜찮군.”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복수를 도와주겠다. 어차피 나 역시 타락한 영웅을 징벌하려고 하던 중이었으니까.”
나엘라티나가 작게 웃었다. 미소가 눈부셨다.
“고마워.”
“대신에 조건이 있다. 우리가 네 복수를 도와주는 대신에 너도 우리 일을 좀 도와줘야겠다.”
“일을 도와달라고?”
“그래, 타리샤를 죽일 때 함께 가자. 우리 셋이서도 충분하지만 한 명이 더 있으면 더 빨리 끝낼 수 있겠지.”
“아, 그거야 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용은 강하다. 용마다 강함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악마 이상으로 강하다. 그래서 대악마가 탐을 냈던 것이고.
나엘라티나는 타리샤와의 싸움에 함께 하라는 말에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정말로 별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럼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테니까 다들 개인정비하고 휴식하도록.”
이야기가 끝나자 아까부터 졸고 있던 라이오넬은 바로 침대로 올라갔고 베로니카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나엘라티나는 꿈쩍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녀를 보며 엔디미온이 물었다.
“넌 뭐해? 가서 쉬라고.”
“아니, 방을 안 잡아서 쉴 곳이 없는데······.”
“그럼 방을 잡으면 되잖아.”
“나 돈이 없어.”
엔디미온은 나엘라티나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려다가 참았다.
“그럼 베로니카랑 같은 방을 써.”
“베로니카?”
“저 요정.”
베로니카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안녕하세요. 베로니카입니다.”
“네가 베로니카구나. 생각해보니 통성명도 못했네.”
“괜찮아요. 제 방으로 안내해드릴게요. 아참, 그 마법도 없애드릴게요.”
나엘라티나는 아직까지 베로니카의 마법에 의해 두 손이 결박당해 있었다. 베로니카가 마법으로 만든 끈을 없애려고 하자 나엘라티나가 웃으며 말했다.
“아, 괜찮아. 이런 것쯤이야 내가 끊으면 되는데.”
툭. 나엘라티나가 두 손에 힘을 주자 끈이 끊어졌다. 베로니카가 당황한 얼굴로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아니, 내 마법이 안 먹히는 거 맞잖아?
“뭘 쳐다 봐.”
“······.”
베로니카는 입가를 씰룩거리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엘라티나와 함께 방을 나가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엔디미온은 조용해진 방 안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하나뿐인 침대는 라이오넬이 차지해서 바닥에 자리를 깔고 누워야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노숙만 아니면 어느 곳이 잠자리든 다 괜찮은 법이다.
그는 저녁때까지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다시 일어나서 라이오넬을 깨웠다. 식당으로 가니 베로니카와 나엘라티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볍게 식사를 하고 맥주도 마셨다.
중간에 어느 술꾼이 술 마시기 대결을 걸어왔는데 엔디미온은 기꺼이 응했다. 두 사람은 술통의 술을 누가 먼저 비우는지 대결했다. 물론 승자는 엔디미온이었다. 그는 술통 안에 든 것을 모두 성수로 바꾸고 글자 그대로 물 마시듯 꿀떡꿀떡 넘겼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구경꾼들은 경이로운 것을 봤을 때처럼 감탄하고 환호했다.
“와, 저 성기사 혼자서 술통을 다 비웠어!”
“전혀 취한 것 같지도 않은데?”
“사람 맞아?”
구경꾼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베로니카가 작게 말했다.
“술꾼이 불쌍해요.”
“진짜 불쌍한 건 술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는 나야.”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엔디미온과 술꾼의 대결로 여관 안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그들의 술 마시는 모습을 보고 여기저기서 술을 시키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점차 취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고된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악마사냥꾼들은 거침없이 들이키는 술을 통해서 인생의 고단함을 잊으려고 했다.
흥청망청한 분위기에 여관 주인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모두가 웃고 떠드는 분위기를 만든 것은 엔디미온이었지만 정작 그는 일찌감치 방으로 돌아갔다. 성수를 무려 한 통이나 마신 탓에 배가 너무 불렀던 것이다.
라이오넬과 베로니카, 나엘라티나 역시 방으로 돌아가서 일찍 잠을 청했다. 내일 아침에 타리샤를 해치우러 가야 하니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술꾼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점차 잦아들었다. 그들은 하나둘씩 잠들기 시작했고 밤하늘의 달은 정상을 향해 움직였다가 다시 바닥을 향해 움직였다.
밤은 긴 듯이 짧았다. 언제나와 같이 제일 먼저 기상한 엔디미온이 짐을 챙겨서 일행들을 깨웠고 다 함께 여관 바깥으로 나왔다. 이른 아침이라기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들은 여관의 마구간에서 말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나엘라티나가 제지했다.
“말은 왜 찾는 거야?”
“왜 찾느냐고? 어제 한 말 잊었어? 타리샤를 죽이러 가야 한다니까.”
“그러니까 왜 말을 찾느냐고. 이해가 안 되네. 말보다 더 빠른 이동수단이 여기에 있잖아?”
“뭐?”
이게 아직 잠이 덜 깼나. 엔디미온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엘라티나를 쳐다보자 그녀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달려가는 것보다 날아가는 게 더 빠르지! 날아서 가면 타리샤가 있는 곳까지 몇 시간이면 충분할걸?”
“날아간다고? 마법으로?”
“아니? 내가 너희를 태우고 날아간다고.”
엔디미온은 잠깐 어리둥절했다가 금세 무슨 소리인지 알아차렸다. 잠이 덜 깼던 것은 나엘라티나가 아니라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단순히 주먹 좀 쓸 줄 아는 미녀가 아니라 하늘을 날고 불을 뿜는 용이었다. 사람 세 명 정도는 거뜬히 태울 수 있으니 말을 타고 가는 것보다 용을 타고 날아가는 것이 더 빠른 방법이었다.
“여기서 변신하려고?”
“마침 공터도 있고 새벽이라 사람도 없으니 여기서 못할 게 뭐 있어? 잠깐 뒤로 물러나. 내가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면 좀 크거든.”
나엘라티나가 뒤로 물러나라고 손짓하자 엔디미온 일행은 얌전히 뒷걸음질했다. 베로니카는 아직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멍청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어? 그러니까 나엘라티나 씨가 용으로 변신해서 우리가 그걸 타고 날아간다고요?”
“바로 그거야. 자, 이제 변신한다!”
크게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또한 나엘라티나의 몸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점차 크기가 커졌다. 눈부신 빛 때문에 베로니카는 나엘라티나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엄청난 바람과 눈부신 빛 때문에 눈이 절로 감겼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몸의 털이란 털이 모두 곤두서고 소름이 오소소 돋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언가 폭발하는 것처럼 강렬한 빛이 눈꺼풀 너머로 쏟아졌다가 다시 잦아들었을 때.
“와아······.”
베로니카는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감탄했다.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에메랄드의 광택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제 나엘라티나는 없었다. 그 자리에는 오직 말간 녹색의 비늘을 자랑하는 거대한 용만이 있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