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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44화 (144/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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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안 가는데요.”

베로니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은 과할 정도로 덩치와 키가 컸다. 무성한 나뭇가지들이 햇빛을 가리는 바람에 산림 안쪽은 새벽인 것처럼 어스름했다. 분명 비정상적인 생장이었지만 이것이 타리샤의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었다.

“주변의 나무들이 모두 악귀들이라고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무들이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은 믿기 힘들었다. 실제로 나뭇가지 하나가 창처럼 날아와서 베로니카를 찌르려고 했지만 그래도 바로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전부 다는 아니지. 일부는 악귀지만 일부는 그냥 나무야. 조심해라. 갑자기 등 뒤에서 기습할 수도 있으니까.”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 중 어느 것이 악귀고 어느 것이 나무인지 구별하기는 어려웠다. 베로니카는 이리저리 눈을 굴렸지만 악귀와 진짜 나무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하하하, 너무 걱정할 것 없어. 요정 아가씨는 내가 지켜줄 테니까.”

나엘라티나가 웃으면서 손으로 잡고 있던 나뭇가지를 부러트렸다. 길게 휘어졌던 나뭇가지가 탄력적으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수많은 나뭇가지들이 갑자기 길이가 길어지면서 다시 한 번 엔디미온 일행을 노렸다.

재빠른 공격이었지만 의미는 없었다. 엔디미온 일행은 전부 다 싸움이라면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다. 엔디미온과 라이오넬이 검으로 나뭇가지를 베고 나엘라티나가 손으로 잡아채서 부러트리면 나머지는 베로니카가 마법으로 공격했다.

수십 개의 나뭇가지들이 잘리고 부러지거나 재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나뭇가지들이 길어지면서 다시 날아왔다. 의미 없는 공격이지만 끝없이 이어졌다.

“어디서 날아오는 것인지 모르겠군.”

이곳에 있는 나무들 전부가 악귀인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보통의 나무이고 어떤 것은 악귀인데 마구잡이로 자라난 나뭇가지들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또 공존하면서 하늘을 가리는 거대한 천장으로 자라났다.

태양을 가리는 촘촘한 갈색의 그물 안쪽에서 나뭇가지들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구조가 너무나 복잡하고 눈으로 쫓기에 어지러웠다. 어떤 나뭇가지가 움직인다고 하여도 그것이 어떤 나무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주변에는 수많은 나무들이 있었다. 악귀인 것의 몸통을 잘라야 나뭇가지의 공격을 멈출 수가 있는데 엄청나게 많은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이 악귀고 어떤 것이 그냥 나무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나씩 다 잘라보자니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엔디미온은 성검을 손에 든 채로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불꽃은······. 안 되겠군.”

용의 불꽃도 견뎠던 나무들이다. 물론 타리샤의 힘 덕분이고 나엘라티나가 용들 중에서 특이할 정도로 불꽃이 약하다는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어쨌거나.

이 상황에서 베로니카의 마법도 크게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나엘라티나의 불꽃이 아무리 약해도 일개 요정 마법사의 불꽃보다 약할 리는 없었다.

라이오넬의 검술이라면 한 번에 몇 그루씩 자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마법만큼 효율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검술은 적 여러 명을 상대하는 것보다 강력한 상대 한 명과 싸우는데 특화돼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라우렌시오를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비록 바이올렛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역시 충분히 강력한 마법사니까. 엔디미온은 한숨을 내뱉으며 성검의 자루를 고쳐잡았다.

“에투알.”

“음, 맡겨두시오.”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에투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들은 성배기사와 성검으로 만나서 수많은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어온 사이였다. 서로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길게 말하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엔디미온이 자세를 낮추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등 뒤에서 후광이 비추기 시작했다. 또한 성검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빛이 번쩍였다.

베로니카는 그가 무언가 하려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는 엔디미온에게 가까이 붙어 있어야 했다. 괜히 휘말릴 수도 있으니까. 그녀는 나엘라티나와 라이오넬의 손목을 붙잡고서 엔디미온에게 바짝 붙었다.

그 순간 거대한 빛의 칼날이 사방을 향해 질주했다. 엔디미온이 한 바퀴 빙글 돌면서 휘두른 검이 빛을 뿜어낸 것이다. 그것은 정화의 불꽃이자 신성의 징벌이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베로니카는 전능자의 열렬한 신도는 아니지만 지금 이 광경은 이적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빛의 칼날은 빠르면서도 느리게 달렸고 거칠면서도 부드럽게 나무들을 베었다. 서로 상반된 개념이 조화롭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모순이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모순이기에 전능자의 위대함을 증명했다. 빠르면서도 느리고, 거칠면서도 부드럽고, 크면서도 작고, 환하면서도 어두울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오직 전능자뿐이니까.

주변에 있던 나무들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부러지고 잘려나가며 무더기로 쓰러졌다. 여기저기서 쿠구궁 소리가 나고 먼지구름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끝없이 날아오던 공격들도 이제야 멈추었다.

“후······.”

엔디미온은 낮게 숨을 내뱉으며 방출했던 힘을 거두어들였다. 성검이 차츰 빛을 잃었고 후광이 느리게 흩어졌다. 그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다친 곳은 없어보였다. 다만 나엘라티나만은 눈을 꾹 감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아직 뜨지 않았다.

“넌 뭐하냐?”

“아, 나 말이야? 별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그냥 네 후광 때문에 눈꺼풀이 녹아서 달라붙은 것뿐이니까. 이 정도는 금방 재생할 수 있어.”

“······.”

지금은 개심했다고 해도 나엘라티나는 한때 대악마 다르디낭의 수하였다. 그가 죽음으로써 세뇌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사악한 힘을 잃었다고 하지만 아직 약간 정도는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엔디미온의 후광에 눈꺼풀이 녹아버린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그 정도야 금방 재생하겠지만 참 우스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죄 짓지 말고 착하게 살았어야지.”

“아니, 나도 세뇌당한 거라니까······.”

대화를 하는 사이에 나엘라티나의 녹았던 눈꺼풀이 재생했다. 그녀는 다시 눈을 뜨고서 눈꺼풀을 몇 번 움직였다.

“우와, 주변이 깔끔해졌는걸. 역시 성배기사야.”

진심으로 감탄하던 그녀는 으음 소리와 함께 말을 이었다.

“그런데 쓰러진 나무들 때문에 전진할 수가 없는데.”

거대한 나무들이 무더기로 쓰러졌으니 길이 막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악귀들을 해치우기 위한 일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길이 막혔으니 일보 전진 후 일보 후퇴나 다름없었다.

“음, 이거 넘어가기도 힘들겠는데요. 나무가 너무 두꺼워서요.”

나무가 한 그루도 아니고 몇 그루씩 겹쳐서 쓰러졌으니 거의 바위나 다름없게 되었다. 나무를 넘어가려면 깨나 고생해야 할 듯 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그게 뭐가 문제냐는 얼굴이었다.

하긴 영웅에게 이런 나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정말 글자 그대로 그냥 넘어가면 되니까. 별다른 장비 없이도 맨손으로도 충분히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베로니카였다. 그녀는 저런 나무를 그냥 넘어갈 재주가 없었다.

또 쓸모없다고 한 소리 듣겠네. 그녀가 한숨을 내뱉을 때였다.

“나엘라티나, 이리 와.”

“나? 왜?”

“손 줘.”

“손은 갑자기 왜?”

엔디미온은 나엘라티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반대쪽 손으로 그녀의 오금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결혼하는 신부를 들어 올린 것처럼 두 손으로 나엘라티나의 몸을 받쳐든 엔디미온은 곧장 쓰러진 나무더미를 향해 질주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엘라티나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야! 야! 뭐하려는 거야!”

“널 저 너머로 던질 거다.”

“뭐? 날 던진다고? 너 미쳤어? 그러다가 착지 잘못해서 머리라도 깨지면!”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힘껏 달리던 엔디미온이 갑자기 발을 멈추고 허리를 틀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반동을 이용해서 나엘라티나의 몸을 냅다 집어던졌다. 공중으로 붕 떠오른 그녀는 시끄러운 비명을 질렀다.

“야 이 미친놈아아아아!”

메아리가 치는 것처럼 나엘라티나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부웅 소리와 함께 나무더미 위를 날아가던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잠시 뒤에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나엘라티나! 죽었냐? 야! 나엘라티나! 살아있으면 대답해! 야, 쓸모없는 도마뱀! 죽었냐고 살았냐고!”

처음에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잠시 뒤에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살아있으니까 좀 닥쳐, 씹.”

“다행이군. 베로니카. 너도 이리로 와.”

“저, 저요? 혹시 저도 던질 셈인가요?”

엔디미온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손짓했다.

“그럼 네 힘으로 넘어가게? 시간 없으니까 빨리 와.”

베로니카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힘없이 엔디미온에게 다가왔다. 엔디미온은 얼른 그녀의 몸을 들었다. 그리고 아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잠시 뒤면 엄청난 괴력에 의해 날개도 없이 비행하게 된다. 베로니카는 그 사실을 곱씹다가 한 가지 몹시 중요한 것을 떠올렸다.

착지는 무슨 수로 하지?

“잠깐만요, 잠깐만요! 생각해보니까 저 제대로 착지할 자신이 없는데요!”

“걱정할 것 없어.”

“잘못하면 머리 깨지게 생겼는데 걱정할 것 없다니요!”

“나엘라티나한테 받아달라고 하면 돼. 너는 그냥 나엘라티나만 믿고 있으면 돼.”

“그 쓸모없는 도마뱀을 믿으라고요?!”

나엘라티나가 들으면 충격 받겠는걸. 엔디미온은 웃으면서 소리쳤다.

“나엘라티나! 베로니카 던진다! 목숨 걸고 받아!”

“뭐? 뭘 던져?”

“일단 받아!”

엔디미온이 베로니카를 집어던졌다. 그녀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거대한 나무더미를 넘어갔다. 커다란 비명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엔디미온은 잠시 나무더미를 쳐다보며 결과를 기다렸다.

쿵 소리가 나지 않은 걸 보면 나엘라티나가 어찌어찌 받아낸 모양이었다.

“남은 건 라이오넬.”

이 녀석도 던져야 하나. 엔디미온은 라이오넬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는 혼자서 넘어갈 수 있지?”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된다고? 그래. 그럼 얼른 넘어가자.”

엔디미온과 라이오넬은 맨손으로 나무더미를 오르기 시작했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경사였지만 그들은 엄청난 악력을 이용해서 나무에 딱 달라붙었다. 그리고 나무껍질들을 잡으며 조금씩 위로 전진했다.

올라가는 것은 어렵지만 내려가는 것은 쉬웠다. 그냥 뛰어내리면 되니까. 정상에서 훌쩍 뛰어내린 엔디미온은 날렵하게 착지했다. 바로 왼쪽에서 쿵 소리가 났지만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

“영감님, 코피 나는데요.”

“진정한 검사는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

“네, 일단 이걸로 좀 막아두세요.”

노망이 난 할아버지를 챙기는 손녀처럼 베로니카가 천으로 라이오넬의 콧구멍을 막아주었다.

“다들 다친 곳은 없어 보이니 움직일까.”

라이오넬의 코피는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엔디미온 일행은 타리샤를 만나기 위해 한 발자국 전진했다. 그 순간이었다.

“으아아악! 뭐야, 이거!”

휘리릭! 사냥꾼이 설치한 함정을 밟았을 때처럼 갑자기 덩굴 같은 것이 발목을 휘감더니 그대로 몸을 붙잡아서 공중으로 끌고 올라갔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엔디미온 일행 전부가 덩굴에 달린 열매처럼 대롱대롱 매달렸다.

“이건 또 뭐야?”

엔디미온은 저 멀리서 나무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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