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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45화 (145/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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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움직인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였다. 아까처럼 나뭇가지들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자신의 뿌리를 들고서 직접 움직이고 있었다. 속도는 느렸다. 그러나 착실하게 엔디미온 일행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처음에는 엔디미온 혼자만이 나무들의 이동을 보고 있었지만 이제는 베로니카와 나엘라티나도 함께 보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나무들이 뿌리를 들고 걸어오는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전 지금까지 엔디미온 씨를 따라다니면서 특이한 걸 참 많이 봤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그런데 저게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제일 기괴한 것 같아요. 아니, 나무가 사실은 악귀란 것도 믿기 힘든데 뿌리를 들고 걷는다고? 이게 말이 돼요?”

나엘라티나가 으음 소리를 내며 말했다.

“움직이는 나무 정도로는 신기할 것도 없지. 백 년 전에는 저것보다 더 특이한 악귀들이 많았는데 말이야······.”

“저기 나엘라티나 씨, 어지럽지 않으세요?”

덩굴에 매달린 나엘라티나는 빙글빙글 회전하는 중이었다. 물론 본인이 한 짓은 아니고 매달려 올라갈 때의 충격으로 덩굴이 돌고 있는 것이다.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리는데 빙글빙글 돌기까지 한다니. 베로니카였다면 진즉 속에 있던 것을 전부 게워냈을 것이다.

“요정 아가씨, 이래봬도 나는 용이라고. 이 정도로 어지러울 리가 없잖······우웁!”

“으악! 토하면 어떡해요!”

왼쪽에서는 비명을 지르고 오른쪽에서는 토를 하는 상황 속에서 엔디미온은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믿을 것은 라이오넬뿐이었다.

“드르렁······.”

“······.”

라이오넬은 나이 때문인지 요즘 들어서 시도 때도 없이 잠들었다. 이제 믿을 것은 없다. 자기 자신 외에는. 엔디미온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나무들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느리지만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야?”

거대한 나무들이 뿌리를 들고 움직이고 있으니 그 속도가 아주 느렸다. 거북이 기어다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여기까지 도착하려면 못해도 30분은 걸릴 것 같았다. 그때까지 엔디미온은 거꾸로 매달린 채로 기다려야 했다.

“음, 내가 변신해서 덩굴을 끊을 수도 있소만.”

에투알은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다. 그 상태에서 본체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질 수는 없지만 근처에서라면 단독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그녀가 덩굴을 끊어주면 엔디미온은 다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발을 딛고 있을 곳이 없잖아.”

“그거야 당신이 받쳐주면 되는 거 아니오?”

“무거워.”

“무겁다니! 나는 무겁지 않소! 이 무슨 망발이오!”

허리춤에 매달린 성검이 날뛰었다. 엔디미온은 무심코 한 말 때문에 그녀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나무들은 거북이처럼 전진하고 있었다. 이제 잠시 뒤면 마주하게 된다.

쿵쿵 소리가 귀를 때렸다. 육중한 뿌리가 거미의 발처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나무의 숫자는 모두 여섯 그루. 아까 상대했던 나무들과 생김새는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호오, 내 보금자리에 귀한 손님이 오셨군.”

메아리치는 것처럼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돌렸으나 어디서 누가 말하고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타리샤가 이 근처에 있는 것은 분명했다. 엔디미온은 정신을 집중하고 사악한 기운을 느끼려고 했다.

민감한 감각은 곧 타리샤의 위치를 찾아냈다. 하지만 눈으로 봤을 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엉뚱한 곳을 찾았을 리는 없었다. 타리샤는 지금 이 울창한 산림 속에 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숨어만 있지 말고 얼굴 좀 보여주지?”

“음, 그럴까. 인사란 것은 본래 얼굴을 보고 하는 것이니까.”

엔디미온의 감각이 타리샤가 있는 곳이라고 말하는 위치에서 투명한 무언가가 일렁거렸다. 그것은 반투명해졌다가 점차 색이 입혀지면서 결국에는 모습을 드러냈다. 엔디미온이 본 것은 거대한 도마뱀이었다. 다리가 열두 개나 되고 꼬리가 두 개이며 네 개의 눈이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기괴한 생김새의 도마뱀.

녹색의 비늘을 가진 그것은 네 개의 눈을 재게 돌리면서 입을 벌렸다.

“오랜만이군, 성배기사.”

“녹색의 왕 타리샤.”

엔디미온이 웃으며 말했다.

“백 년 전에 네 산림에 불을 질렀던 때가 생각나는군. 아주 활활 탔었지. 삼일밤낮으로 말이야. 이야, 그때가 그립군. 불장난은 언제나 재밌거든.”

“······그때 널 죽였어야 했는데.”

“네가 날 죽여? 아무리. 대악마도 못한 일을 네가 무슨 수로 한다는 거냐.”

타리샤가 열두 개의 다리로 나무 사이를 날렵하게 지나쳤다. 길쭉한 혓바닥이 뱀의 것처럼 날름거렸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죽는다. 그것은 우리의 아버지인 대악마 다르디낭께서 증명하셨지. 네가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졌어도 불멸의 존재는 아니야. 충분한 준비와 의지만 있다면 나도 널 죽일 수 있다는 뜻이지.”

“그래, 자신감은 나쁘지 않았다. 한 가지 가르쳐줄까. 네 형제들이 내 손에 몇 명이나 죽었는지 말이야.”

타리샤는 침묵했지만 엔디미온은 꼬마를 놀리는 어른처럼 지분댔다.

“동굴에서 뷔브르와 로아니스를 한꺼번에 죽였지. 별 것도 아닌 놈들이었어. 그냥 몇 대 치니까 죽더라고. 그 다음은 누구더라. 그래, 아르말락이었어. 이 친구는 좀 치더라고. 그래봤자 내 상대는 아니었지만. 아, 잉굴라트도 죽였군. 날 이기려고 발악을 했지만 상대가 될 리가 있나. 그리고 그 다음으로 죽일 것은 바로 너야, 타리샤.”

“······많이도 죽였군. 뷔브르, 로아니스, 아르말락, 잉굴라트. 모두 내 소중한 형제들이었다. 사실 그리 친하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한 가지 더 가르쳐줄까. 아르고디아도 곧 죽을 거야. 내 친구들이 갔거든.”

“누가 갔지?”

“비다르와 라우렌시오.”

“흠, 그럼 아르고디아도 죽겠군.”

타리샤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엔디미온의 말이 허세처럼 느껴졌기 때문일까? 아니었다. 타리샤는 엔디미온이 내뱉은 말이 모두 현실이 되리란 것을 알았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녹색의 왕이 아니라 성배기사였다. 그리고 아르고디아가 영웅들에게 죽게 될 것이란 사실도 알았다.

그럼에도 덤덤할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

“전쟁에서 이기려면 적의 머리를 잘라야 하지. 손가락이나 발가락쯤은 몇 개나 잘라봤자 아무 의미도 없어.”

타리샤는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공중에 매달린 엔디미온 일행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여유로우면서도 잔뜩 긴장한 움직임이었다. 그는 지금 엔디미온과 싸우는 것을 겁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도망치지 않았다.

“너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있어. 지금 이 자리에서 날 죽인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지? 아르고디아를 죽인다고? 그게 뭐? 뷔브르를 죽였을 때 세상이 달라졌나? 로아니스를 죽였을 때는? 아르말락은? 잉굴라트는? 이 나무를 봐라, 성배기사야.”

타리샤가 꼬리 하나로 나무를 툭 쳤다.

“지금까지 네가 죽인 내 형제들은 수많은 잔가지에 불과해. 나무를 죽이려면 뿌리를 뽑고 밑동을 잘라야지. 가지만 자른다고 해서 나무가 죽나? 네가 여기서 날 죽이는 것도 결국 가지를 부러트리는 것에 불과해.”

“죽기 전에 유언이 길군. 그게 끝이냐?”

“나는 오늘 이곳에서 죽는다!”

갑작스럽게 소리를 지른 타리샤가 눈을 빛냈다. 네 개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가.

“하지만 이것은 위대한 패배다! 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이루어야 할 목적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것이다! 위대한 패배와 무의미한 승리! 어느 것이 더 값진지는 결과가 말해주겠지!”

엔디미온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며 말했다.

“룽고르의 마법사왕을 믿는 거냐? 그녀가 널 위해서 복수해주고 세상을 전란으로 몰고 갈 것이라 믿는 거냐?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한 마디만 해주지. 그것은 알량하고 의미 없는 믿음이다. 왜냐하면 마법사왕도 결국 내 손에 죽게 될 테니까.”

“마법사왕? 하하하! 바이올렛, 그 변절자 년을 말하는 거냐? 멍청한 놈. 마법사왕 역시 이 거대한 나무의 잔가지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는군! 나는 마법사왕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더 거대한 악의에 충성하지!”

지금 시대에서 다르디낭의 적자보다 강한 것은 마법사왕뿐이다. 그런데도 그녀가 아니라 더 거대한 악의에게 충성한다는 말은 그냥 흘려들을 수 없었다. 다르디낭의 적자보다 강력하고 타락한 영웅보다 더 위험한 존재라면 하나뿐이다.

바로 대악마 다르디낭. 하지만 그는 죽었고 성배기사의 노력으로 시체는 완전히 힘을 잃고 정화됐다. 성배 없이는 대악마를 되살릴 수 없고 설령 되살아난다고 해도 본래의 힘을 완전히 되찾을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타리샤는 확신에 차있었다. 결국에는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라는 확고한 확신이.

“대체 어디서 나온 믿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때려눕히고 난 다음에 확인하면 될 일이고. 이제 장난은 여기까지 하겠다, 타리샤. 설마 이런 덩굴 따위로 내 움직임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덩굴을 끊으려면 얼마든지 끊을 수 있었다. 성검의 도움을 받아서 끊을 수도 있고 신성력을 이용해서 끊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베로니카에게 마법을 날리라고 해서 끊을 수도 있었고. 그럼에도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것은 타리샤와 대화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일찌감치 덩굴을 끊고 내려왔다면 겁을 먹은 타리샤는 또 다시 나무들 사이에 은신했을 테니까.

“물론 아니지. 아까 말했잖아. 난 이곳에서 죽을 각오가 됐다고. 네 승리는 확정적이다. 결과를 바꿀 수는 없어. 하지만 얌전히 죽어주는 것도 성미에 맞지 않으니 조금 반항을 해볼 생각이다.”

“의미 없는 짓인데.”

“약간이라도 네게 타격을 줄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짓이겠지.”

“그럼 무슨 수로 내게 타격을 주는지 한 번 구경해보도록 할까. 얼른 해. 한 번 정도는 맞아주지.”

타리샤는 혓바닥을 낼름거렸다. 엔디미온 일행 주변을 빙글빙글 돌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그리고 천천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뭐냐. 맞아준다니까 결국 도망이냐? 입만 산 놈이었······.”

엔디미온이 중간에 말을 멈춘 것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어디지? 어디서 느껴지는 거지? 그는 나무들을 보았다. 뿌리를 들고 여기까지 왔던 나무들은 다시 땅에 뿌리를 박은 채로 얌전한 나무를 연기했다. 나뭇가지들이 날아올 기색은 없었다.

그럼 타리샤인가? 하지만 타리샤는 멀찍이 물러난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나무도 아니고 타리샤도 아니다. 그럼 남은 것은.

“이런!”

콰과과과광! 커다란 굉음과 함께 땅이 폭발했다. 폭발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은 설명이었다. 땅이 폭발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지하에서 땅을 뚫고서 솟아올랐으니까.

그것은 거대한 입이었다. 아니, 거대한 꽃이었다. 검붉은색의 꽃은 주변의 공터 전부를 차지할 만큼 커다란 크기를 가지고 있었고 엄청난 악취를 풍겼다. 그리고 그 중간 부분이 쩍 하고 갈라지면서 입처럼 변했다. 안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록색 액체들이 가득 했다.

그 안에서 무엇의 뼈인지 모를 것들이 둥둥 떠다녔다.

“그럼 즐거운 여행되라고.”

쩍 벌어졌던 입이 착 닫히면서 세상이 암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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