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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못했군…….”
몸이 부유하고 있었다. 지금 엔디미온이 떨어진 곳이 딱딱한 바닥이 아니라 뜨뜻미지근한 액체로 가득 찬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그 다음에는 고기 썩는 냄새가 스쳐지나갔다.
기분 나쁜 액체 속에서 부유하고 있던 엔디미온은 손과 발을 이용해서 똑바로 섰다. 그리고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어두웠지만 그의 두 눈은 어둠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주변에 둥둥 떠다니는 부유물들이 보였다.
처음에는 이 꽃에 잡아먹힌 시체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베로니카였다. 엔디미온은 얼른 그녀 쪽으로 헤엄쳤다.
“베로니카! 베로니카!”
철썩! 철썩! 두꺼운 손이 식인식물의 소화액을 가르며 헤엄치는 소리는 아니었다. 엔디미온이 기절한 베로니카를 깨우기 위해서 뺨을 치는 소리였다.
“으으으…….”
뺨을 몇 대 나서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눈을 뜬 베로니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둠 때문에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을 붙잡고 있는 커다란 손이 누구의 것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엔디미온 씨?”
“그래, 나다. 정신이 들었나?”
“네. 그런데 저 이상하게 뺨이 너무 얼얼한데요?”
“떨어질 때 얼굴로 떨어져서 그래. 라이오넬이랑 나엘라티나가 주변에 있는지 찾아 봐.”
“그런가? 네, 일단 알겠어요!”
베로니카는 마법으로 빛을 만들어냈다. 환해진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의 정체를 알고서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에, 에, 엔디미온 씨! 우리 지금 잡아먹힌 건가요? 말도 안 돼!”
“왜 호들갑이야. 탈출하면 되잖아.”
“하지만 저 녹고 있다고요! 저 지금 소화액에 녹고 있어요!”
다급하게 외쳤지만 그것은 베로니카의 착각이었다. 그녀의 옷 일부가 조금 녹기는 했지만 살갗은 멀쩡했다. 식인식물이 그녀를 완전히 소화시키려면 몇 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안 녹으니까 호들갑 그만 떨고 나엘라티나랑 라이오넬이나 좀 찾으라고.”
“으아아악! 따끔해요! 지금 엄청 따끔거리는데요!”
“너 한 번만 더 시끄럽게 굴면 내 주먹에 맞아 죽는다.”
베로니카는 바로 조용해졌다. 그녀는 엔디미온의 단단한 주먹에 얼마나 많은 악마들의 머리통이 터져나갔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 저쪽에 영감님이 있어요!”
“나도 나엘라티나를 찾았다. 가서 데리고 와.”
“으, 여기 느낌 이상해요. 액체가 기분 나쁘게 미지근해서 속이 메스꺼워요……,”
두 사람은 각자 헤엄쳐서 기절한 라이오넬과 나엘라티나를 데리고 왔다.
“영감님! 영감님! 좀 일어나보세요!”
“비켜 봐.”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는 라이오넬 때문에 엔디미온이 나섰다. 그는 베로니카를 깨울 때처럼 사정없이 라이오넬의 뺨을 후려쳤다. 세 대쯤 맞았을 때 갑자기 라이오넬의 손이 엔디미온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 그만 때리게…….”
“오, 일어났군.”
베로니카는 라이오넬을 보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얼마나 얼얼할까.
“음? 혹시 나도?”
엔디미온은 베로니카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나엘라티나의 뺨을 때렸다. 한 대, 두 대, 세 대……. 뺨을 치는 횟수가 점차 늘어가는데도 그녀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건 또 왜 안 일어나?”
“제가 봤을 때는 처음 한 대 맞고 죽은 것 같은데요?”
“한 대 맞고 죽었다고?”
몸이 무슨 유리냐? 엔디미온은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나엘라티나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그래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면 성수라도 한 모금 먹이는 게 어떨까요?”
“성수라…….”
엔디미온은 고개를 숙여서 아래를 보았다. 주변에 가득 찬 액체들은 본래 식인식물의 소화액이었지만 지금은 성배의 힘에 의해서 전부 성수로 변한 상태였다. 본래 이끼가 낀 듯 구역질나는 초록색이었던 액체가 투명한 성수가 되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번에는 나엘라티나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아래로 처박았다.
“꼬르르르륵…….”
성수에 머리를 처박힌 나엘라티나가 물거품을 뱉어냈다. 엔디미온이 다시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어때, 일어났어?”
“아니요. 아니, 그것보다 그거 너무 물고문 같은데요…….”
베로니카의 의견을 반영해서 이번에는 손으로 물을 약간 떠서 입 안에 흘려주었다. 나엘라티나는 성수를 꿀꺽 마셨지만 오히려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성수는 모든 병과 상처를 낫게 해주는 만능의 영약이니 마시고 나서 상태가 나빠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잠깐만.”
엔디미온은 나엘라티나의 얼굴을 보고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니까 이 녀석 용이잖아.”
대악마의 부하였던 용에게 성수는 극약과 같다. 그걸 모르고 성수를 먹였으니 그녀가 일어나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주변의 성수 때문에 기절한 거였군. 빨리 나가야겠는걸. 우리야 괜찮지만 이 녀석이 성수에 의해서 녹아버릴지도 모르겠어.”
이곳에서 탈출하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식인식물이 얼마나 대단하든 결국 악마만큼은 아니었다. 성검으로 크게 내벽을 잘라서 나가면 그만이었다. 엔디미온은 성검을 손에 쥐고서 벽을 자를 준비를 했다.
바닥을 딛고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서 자세가 영 어색했다.
“음…….”
베로니카는 라이오넬이 영 께름칙한 얼굴로 으음 소리를 내는 것을 보았다.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언가 움직이는 것 같네만…….”
“움직인다고요?”
라이오넬은 시력을 잃은 대가로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는 민감한 감각을 얻었다. 그런 그가 무언가 움직인다고 했다면 분명히 무언가 있다는 소리였다. 베로니카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경지에 오른 자만이 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주변의 성수가 물결치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 위도 아니고 좌우도 아니다. 그러면 남은 곳은…….
“밑이에요! 밑에서 무언가 헤엄치고 있어요!”
베로니카의 외침에 엔디미온이 밑을 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투명한 물 안에서 무언가 헤엄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저 아래쪽에 있어서 무엇인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위로 올라오면서 형체가 분명해졌다.
뼈였다. 뼈만 남은 거대한 물고기였다. 입을 쩍 벌리고 무시무시한 이빨을 반짝이며 엔디미온 일행을 노리고 있었다.
“이 꽃이 얼마나 큰 거야?”
꽃 안에서 거대한 물고기가 헤엄친다니. 꽃이 말도 안 되게 큰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엔디미온은 쏜살같이 상승하고 있는 물고기를 보며 외쳤다.
“베로니카! 막아 봐!”
“제, 제가요?!”
당황하면서도 베로니카는 빠르게 반응했다. 그녀가 헤엄치는 물고기를 향해서 마법으로 만든 창을 날렸지만 물의 저항 때문에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재빠르게 움직이는 물고기가 그런 것에 맞을 리가 없었다. 세차게 물을 가르며 헤엄치던 물고기가 꼬리를 탄력적으로 휘두르며 더욱 가속했다.
“가까이 와요!”
“라이오넬!”
“알겠네!”
라이오넬이 재빠르게 검을 뽑아서 휘둘렀다. 순간적으로 물이 반으로 갈라지며 거대한 물보라가 일었다. 아무리 싸우기 불리한 장소라고 해도 라이오넬의 검술은 매서웠다. 보이지 않는 칼날은 물을 가르며 물고기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분명히 이곳은 물고기에게 유리한 곳이었다. 뼈만 남은 꼬리를 탄력적으로 움직여서 공격을 피한 물고기는 라이오넬을 노리고 움직였다.
“음, 해치웠나?”
“저리 비켜, 멍청아!”
태평하게 헛소리나 하고 있는 라이오넬을 밀어낸 엔디미온은 숨을 한껏 삼키고서 물속으로 잠수했다. 물고기는 생각 이상으로 성가셨다. 이곳이 지금 성수 안인데도 저만큼 빠른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은 본래부터 굉장히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것을 뜻했다.
‘나엘라티나보다 낫군.’
성수에 처박혔다고 기절하는 용보다 확실히 낫다. 엔디미온은 물속을 헤엄치면서 물고기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커다란 손으로 물살을 가르며 더 아래로 내려갔다. 물고기와 부딪치려는 것처럼 겁내지 않고 헤엄쳐서 나아갔다. 그는 물속에서 싸우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아르고디아의 상대로 비다르와 라우렌시오를 보낸 것도 사실 물을 다루는 악마와 싸우기 귀찮아서였다. 하지만 결국 같은 결과가 나왔으니 참으로 우스운 운명이었다. 엔디미온은 입을 쩍 벌린 채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물고기를 보았다. 뼈만 남았지만 이빨만은 아직 날카로웠다.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공기방울이 위로 올라갔다. 엔디미온은 아직 몇 분 정도 더 물속에 머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면 저 건방진 물고기를 확실하게 박살내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크아아아아.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왠지 물고기가 그런 소리를 냈을 것 같았다. 엔디미온은 손을 가슴 쪽으로 움직였다. 본래라면 여기서 주먹을 쥐었어야 했다. 그의 싸움법은 아주 간단했다. 적이 오면, 주먹을 쥐고, 머리통을 부순다.
아주 간단한 삼단계로 이루어진 싸움법이었다. 그리고 아주 효과적인 싸움법이고.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물의 저항 때문에 주먹을 제대로 휘두르기 힘드니까.
물고기가 점차 가까워졌다. 들 위를 달리는 말처럼 거침없이 접근해온 물고기가 입을 쩍 벌려서 엔디미온을 삼키려고 했다.
새끼, 입 크네. 엔디미온은 물고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오히려 물리기를 바라는 것처럼. 당연히 물고기는 벌렸던 입을 재빠르게 다물었다. 하지만 닫히지 않았다.
“…….”
엔디미온의 두 손은 물고기의 위턱과 아래턱을 붙잡고 있었다. 성배기사의 강력한 힘은 물고기가 입을 다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힘을 주면서 물고기의 입을 강제로 벌렸다. 위턱과 아래턱의 가동 범위를 점차 넘어가고 있었다. 쩌저적 소리가 나면서 뼈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물고기는 다급하게 꼬리를 휘두르면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엔디미온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싸늘한 두 눈으로 물고기를 바라보던 그는 그대로 아가리를 확 찢어버렸다.
닫으려는 힘과 벌리려는 힘이 서로 상충하면서 거대한 물보라가 일었다. 출렁거리는 물 사이로 부러진 뼛조각들이 부유했다. 엔디미온은 아래로 침전하는 물고기의 몸통을 보면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어, 돌아오셨네요?”
“그래. 이제 나가자.”
엔디미온은 벽 쪽으로 헤엄쳤다. 그리고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처음에는 강력한 완력으로부터 벽이 저항했다. 하지만 상상 이상으로 강력한 성배기사의 힘은 그 저항을 부질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벽을 잡고, 찢는다. 찌지직 소리가 나면서 벽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틈새 사이로 가득 찼던 성수들이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엔디미온은 힘차게 벽을 좌우로 찢어발겼다.
쏴아아아아! 엄청난 양의 성수들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엔디미온은 물 위를 걷는 성인처럼 성수와 함께 다시 한 번 세상으로 나왔다.
“많이 기다렸나?”
타리샤는 네 개의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대답했다.
“……아니, 딱히 기다리지는 않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