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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47화 (147/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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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은 웃었다. 웃기는 새끼네.

“아까의 그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어디로 간 거냐.”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언젠가 죽는다지만 그 누구도 그게 오늘이길 바라지는 않지. 나 역시 마찬가지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히 있다.”

“그럼 도망이라도 갔어야지.”

타리샤가 입을 벌려서 허 소리를 냈다.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도망을 가라고? 성배기사로부터? 난 백 년 전부터 네 명성에 대해서 익히 들었다. 적을 결코 살려두지 않는 집요함. 너와 싸웠던 악마들은 모두 죽었지. 나 역시 마찬가지일거고. 내가 도망쳤다고 해도 얼마 가지 않아서 다시 붙잡혔을 거다. 그건 너무 추한 일이지 않나?”

“아냐, 나랑 싸우고 살아서 도망친 놈도 하나 있어. 라가르디오 말이야.”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있나?”

“아니, 죽었다. 내 손에 말이야.”

“그럼 아무 의미도 없군. 늦든 빠르든 결국 죽으니까.”

타리샤가 열두 개의 다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사냥감을 습격하려는 맹수처럼.

“나는 녹색의 왕 타리샤. 구질구질하게 목숨을 보전하려 하지 않겠다. 다시 한 번 이 세상에 어둠이 찾아오면 나는 꺼진 불씨가 다시 타오르듯 부활하리라. 그때를 위해 기꺼이 이 목숨을 바치겠다! 덤벼라, 성배기사야!”

쿵쿵 소리가 나면서 타리샤의 열두 다리가 움직였다. 다리가 많은 만큼 움직임도 상당히 민첩했다. 그가 움직이자 지금까지 대기하고 있던 나무들 역시 같이 움직였다. 뿌리를 들고 느릿하게 움직이던 그것들은 다시 대지에 뿌리를 박고서 나뭇가지들을 움직였다.

“라이오넬, 베로니카, 나무들을 상대해라. 그리고 나엘라티나의 상태도 좀 봐주고.”

라이오넬과 베로니카는 흠뻑 젖은 머리를 끄덕였다. 나엘라타니나는 아직 기절해 있었는데 맥박이 정상인 걸 보면 금방 다시 일어날 것 같았다.

엔디미온은 혼자서 타리샤에게 걸어갔다. 나무들이 잔가지들을 날리며 공격했지만 모두 성검에 의해 조각날 뿐이었다.

“타리샤, 널 죽이는 것은 쉽다. 아주 쉽지. 어린애 손목을 비트는 것처럼 말이야.”

엔디미온과 타리샤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긴장감은 일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타리샤에서 엔디미온에게로. 지금 이곳에서 긴장하고 있는 것은 타리샤 하나뿐이었다.

“어려운 건 널 죽이지 않는 거야. 정보를 얻기 위해서 널 살려두는 것 말이야. 죽지 않게 조심해라. 너한테 물어볼 게 많으니까.”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엔디미온이 뛰었다. 네 방향으로 각각 움직이던 타리샤의 네 개의 눈이 순식간에 한 점으로 모였다. 콰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뿌리들이 솟아났다. 엔디미온은 하나를 자르고 그 단면을 밟은 뒤에 위로 뛰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뿌리들 위를 가볍게 질주했다.

까딱 잘못하면 떨어져서 저 날카로운 뿌리에 찔릴 수도 있건만 엔디미온의 질주는 거침없었다.

하지만 타리샤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바닥에서 더 많은 숫자의 뿌리들이 솟아올라서 발 디딜 곳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미 솟아있던 뿌리들을 타고 올라서 더 위를 노렸다.

엔디미온은 발을 붙잡는 뿌리 때문에 몸을 휘청거렸다가 힘으로 끊어낸 뒤 다시 달렸다. 뿌리들은 마치 살아있는 손처럼 엔디미온을 집요하게 노렸다. 어쩔 수 없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한 번에 타리샤와의 거리를 좁히려고 했다.

그 순간 쌔애액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날아왔다. 엔디미온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고 그와 동시에 자신의 얼굴 위를 스쳐지나가는 분홍색 혀를 볼 수 있었다. 타리샤가 엄청난 힘으로 쏘아낸 혀는 날카로운 창과 같았다.

허리를 뒤로 젖힌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뿌리들이 발을 붙잡고 잡아당기는 바람에 엔디미온의 자세가 무너졌다. 그가 뒤로 넘어지며 날카로운 뿌리에 몸을 관통당하기 직전에 성검이 빛을 발했다.

“빛의 힘이여!”

빛의 보호막이 엔디미온을 보호했고 그 덕에 그는 곧바로 다시 자세를 바로 잡았다. 타리샤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면서 다시 한 번 혀를 발사했다. 슉슉 소리가 나면서 창처럼 공기를 찌르는 혀는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날카로운 뿌리 위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며 달리는 것은 곡예와 다름이 없었다. 엔디미온은 어찌어찌 균형을 잡으면서 타리샤와의 거리를 좁히려고 했다. 날아온 혀가 볼을 스쳐지나갔다. 얕게 생긴 상처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엔디미온은 그것을 신경 쓰지도 않고서 쭉 달렸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졌을 때였다.

“에투알!”

“음, 알겠소!”

성검에 빛이 모여들며 신성력이 응집됐다. 끝부분에 모인 신성력이 강렬한 빛을 발했고 그것은 곧 신성한 징벌이 되었다. 엔디미온이 크게 성검을 휘두르자 그 경로를 따라서 빛의 칼날이 날아갔다.

타리샤는 네 개의 눈알을 바쁘게 움직였다. 도망칠 곳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빛의 칼날이 그의 몸을 반으로 잘라버릴 것이다.

아참, 죽이면 안 되는데. 엔디미온은 무심히 생각했다. 그 순간 타리샤가 혓바닥을 날렸다. 죽기 전에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건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가 혓바닥을 날린 곳은 위쪽이었다. 울창하게 자란 나무를 노리고 있었다.

끈적한 혓바닥이 가지에 착 달라붙었다. 그리고 마치 잡아당기는 것처럼 타리샤의 몸이 나무를 향해 날아갔다. 빛의 칼날은 간발의 차이로 빗나갔다. 뒤에 있던 나무들만 우수수 쓰러질 뿐이었다.

“뭐야?”

저게 된다고? 엔디미온이 놀라는 사이에 나무에 달라붙은 타리샤가 네 개의 눈을 한 곳으로 모았다. 그러자 눈동자가 빨간색으로 빛나더니 거기서 강렬한 빛이 발사됐다. 새빨간 광선은 엄청난 열기로 주변의 공기를 달궜다.

엔디미온은 얼른 성검을 들었다. 빛의 보호막이 그의 몸을 감쌌다. 그 다음에 광선이 직격했는데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보호막이 녹아내렸다. 다행히 광선은 보호막을 부수고 사라졌지만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아니, 씨발. 저런 것도 된다고?”

눈에서 광선을 쏘는 악마는 또 처음이었다. 백 년 전에 타리샤가 눈에서 광선을 쏜다는 정보는 없었는데 그새 새로운 능력이라도 얻은 걸까.

“성가시게 구는군.”

타리샤가 다시 한 번 광선을 발사했다. 이미 한 번 광선의 위력을 본 엔디미온은 방어하는 대신에 타리샤가 있는 나무 방향으로 달렸다. 그리고 망설임없이 나무를 향해 성검을 휘둘렀다. 마치 물컹거리는 푸딩을 자른 것처럼 나무가 위아래로 분리됐다. 아래로 넘어지는 나무 때문에 타리샤도 밑으로 뛰어내려야 했다.

타리샤는 떨어지면서도 광선을 발사했다. 지상의 뿌리들까지 모두 태워버렸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오직 성배기사에게 자그마한 상처 하나라도 남기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의미 없는 노력이었다. 엔디미온이 당황했던 것은 처음 한 번뿐이었고 그 다음에는 그저 성가신 공격일 뿐이었다. 타리샤는 성배기사의 날랜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고 광선은 그저 보호막을 뚫는데 그쳤다.

“제기랄!”

타리샤는 녹색의 왕이라 불리는 아주 강력한 악마였다. 백 년 전에는 이 기괴한 산림으로 중요한 길목을 차지하고서 성기사들의 보급로를 끊고 그들이 서로 긴밀히 연락하고 연합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지금 이 시대에도 타리샤는 분명히 위협적인 적이었다. 요충지에 자리를 잡았다면 여명교단이 그를 몰아내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감수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백 년 전에 얼마나 많은 전과를 올렸든, 얼마나 강력한 능력을 새로 얻었든, 성배기사를 이길 수는 없었다.

“멀리서 깔짝대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 날 죽이려면 좀 더 목숨을 걸어라.”

명백하게 도발이었지만 타리샤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였다.

“오냐! 그 도발, 받아주마!”

타리샤는 마지막 광선을 발사했다. 아까보다 더 크고 더 위력적인 광선이었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광선은 누가 보아도 타리샤의 마지막 일격이었다. 엔디미온은 성검을 들고서 그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내려고 했다.

광선과 성검이 부딪쳤다. 빛과 빛이 서로를 집어삼키려고 했고 그 반동으로 새하얀 빛이 세상의 모든 색깔을 빨아들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백색의 세상에서 먼저 소멸한 것은 타리샤의 광선이었다. 그것은 성검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스러졌다.

자기 몸조차 보이지 않는 백색의 공간 안에서 엔디미온은 한 발자국 움직였다. 딱 한 발자국이었다. 그리고 아직 내딛지 않은 왼쪽 발을 축으로 삼아서 회전했다.

서걱! 베는 소리와 베는 감각. 엔디미온은 확신했다. 죽였다.

“끄으으윽······.”

검에 베여서 덜렁거리는 아래턱에서 피가 주르륵 떨어졌다. 다시 색이 돌아온 세상에서 타리샤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역시······. 안 되는군······.”

“날 죽이려면 백 년은 이르지. 농담이 아니라 진짜 말 그대로.”

엔디미온은 성검을 휘둘렀다. 타리샤의 열두 다리 중 절반이 잘려나갔다. 여섯 개의 다리만 남은 타리샤가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피가 웅덩이를 이루었다.

“자, 그러면 이야기 좀 해보실까.”

주변의 나무들은 베로니카와 라이오넬이 모두 해치웠다. 이제 느긋하게 정보만 캐내면 될 일이었다. 엔디미온은 성검을 검집에 꽂았다.

“내가······. 정보를 줄 것 같나?”

“난 수많은 악마숭배자들을 고문하여 정보를 빼냈다. 악마는 처음이지만 둘 다 역겨운 존재라는 점에서 그리 다를 건 없지. 한 시간 뒤면 넌 내가 묻지도 않은 정보까지 줄줄 말하고 있을 거다.”

“크크크······. 그럴 리가.”

“다들 불구덩이 위에 올라가기 전에는 자기 입이 무겁다고 생각하지.”

엔디미온이 신성력으로 작은 공을 만들었다가 다시 흩어지게 했다.

“첫 번째 질문이다. 네가 모신다는 그 진정한 주인은 누구냐?”

“내가 그걸 말할 것 같으냐?”

“말하게 될 거다.”

엔디미온의 손에서 신성력이 일렁거렸다. 또한 등 뒤로 후광이 빛났다. 타리샤는 그 빛에 고통스러워했고 신음을 흘렸다. 후광은 점차 더 밝아졌다. 그럼에도 타리샤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고통스럽게 웃으면서 오히려 엔디미온을 조롱했다.

“멍청한 성배기사야. 너는 아무것도 몰라. 네가 진실을 알게 됐을 때, 그 얼굴이 궁금하구나. 얼마나 망연한 얼굴일지 말이야······.”

빛이 더욱 강해졌다. 타리샤의 웃음은 이제 비명과 같아졌다.

“네가 내 육체를 고통스럽게 할 수는 있어도 내 마음을 무너트릴 수는 없다! 나는 녹색의 왕 타리샤다! 전능자의 개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타리샤의 몸이 신성한 빛에 의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가죽이 녹고 뼈가 드러났다. 하지만 타리샤는 끙끙거리기만 할 뿐 엔디미온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악마지만 충절만큼은 칭찬해줄만 했다.

엔디미온은 타리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진실을 말하지 않겠다면 이대로 죽으라는 듯 더욱 강렬한 빛을 뿜어낼 뿐이었다.

이제 완전히 녹은 스프처럼 변해버린 타리샤는 억지로 턱을 움직여 말했다.

“어둠의 여왕이 올 것이다······.”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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