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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48화 (14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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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아르고디아는 물을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단순하게 체내에서 생성한 물을 뿜어내는 것 외에도 지하의 물을 끌어올려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그러한 능력을 이용해서 마을을 수몰시켜버리거나 성을 하루아침 사이에 외딴 섬으로 바꿔버리는 짓을 즐겨했다.

그것은 참으로 고약한 짓인 동시에 아주 잔혹한 일이었다. 많은 마을들이 도망칠 기회조차 없이 수마에 의해 무너졌고 성들 역시 제대로 된 싸움을 해보지도 못하고 성 안에서 말라죽었다. 때문에 영웅들은 되도록 빠르게 아르고디아를 무찌르려고 했다.

하지만 온 세상이 전란에 빠진 상황에서 영웅들의 숫자는 한정적이었고 악마들은 그 숫자가 아주 많았다. 세상에는 아르고디아보다 더 큰 혼란을 가져오는 악마들이 많았다. 같은 대악마의 적자라고 해도 힘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다. 혼자서 군단을 상대하고 수많은 군세를 이끌고 성들을 무너트리며 거침없이 진격하는 악마들에 비해서 성 주변을 호수로 만들고 몇 달간 관찰하기만 하는 아르고디아는 토벌의 우선순위가 낮았다.

그 덕분에 아르고디아는 백 년 전의 전쟁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성배기사와 영웅들이 사라진 시대에서 그를 위협할 만한 존재는 없었다. 바로 어제까지는 말이다.

“케으으윽······.”

거대한 물뱀이 바닥에서 몸을 버르적거리고 있었다. 본래 광택을 뽐내며 반짝여야 할 비늘들은 박살난 후였고 애처롭게 드러난 살갗들은 발간색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꼬리는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 강제로 뜯겨나간 것처럼 너덜거렸다. 본래 물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지내야 할 물뱀은 지상으로 올라와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켁켁 내뱉었다.

성을 한 바퀴 두를 수 있을 만큼 기다란 몸을 가진 물뱀은 햇빛에 의해서 몸이 점차 건조해져갔다. 쏟아지는 햇빛은 비늘이 부서지고 드러난 연약한 살갗을 괴롭혔다. 그러나 물뱀은 몸을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거대한 호수에서 유유자적하게 헤엄치며 겁도 없이 호수에 물을 길러오는 사람들을 잡아먹으며 지냈다. 하지만 오늘, 햇빛이 유난히도 따갑던 오늘, 갑작스럽게 나타난 두 명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 꼴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호수에 물을 길러 온 것처럼 시시한 농담을 나누며 가까이 다가왔다.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난 탓에 그다지 식욕이 동하지 않았던 물뱀은 그들이 물을 떠서 돌아가는 것을 자비롭게 허락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 마음이 변한다면 잡아먹었을 것이다.

호수 가까이로 다가온 두 사람 중 하나는 수영이라도 할 것처럼 간단한 체조를 했고 다른 하나는 조용히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물뱀은 아직 남은 잠기운 때문에 다시 눈을 감으려고 했다. 하지만 자꾸만 귀에 거슬리는 중얼거림 때문에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왠지 모를 꺼림칙함에 마음을 바꿔 불쌍한 먹잇감들에게 불쑥 모습을 드러냈을 때였다.

호수가 날아갔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거대한 화염구가 호수와 충돌하는 순간 커다란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물이 증발했다. 습기 때문에 안개가 생기고 일순 시야가 가려졌는데 그것을 뚫고서 흑인 남자 하나가 뛰어들었다.

그 순간 거대한 물뱀, 아르고디아는 깨달았다. 지금 여기에 온 것은 물을 길러 온 마을 청년들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러 온 영웅들이란 사실을. 강철 주먹의 비다르와 요정 기사 라우렌시오가 백 년의 시간을 넘어서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르고디아는 살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호수의 물이 증발해버린 상황에서 영웅 두 명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곧 비다르의 강철 주먹에 의해서 꼬리가 뜯겨나갔고 라우렌시오의 마법에 비늘이 박살났다. 그리고 두 사람의 협공에 의해 빈사 상태에 빠졌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물뱀이라고 해서 지상에서 살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물속에서 부유하며 살아오던 아르고디아에게 지상은 너무 가혹한 환경이었다. 그의 거대한 몸은 수면 아래에서 강력한 무기로 작용했지만 지상에서는 자기 장기를 짓누르는 짐덩어리일 뿐이었다.

“야, 뱀대가리.”

비다르는 강철 주먹을 흔들면서 큭큭 댔다. 그는 일부러 아르고디아의 콧잔등을 주먹으로 툭툭 건드리면서 도발했다.

“백 년 전에 물장난 치고 그럴 때는 재밌었지? 그때는 내가 많이 바빠서 너랑 놀아줄 시간이 없었는데.”

“······케으윽.”

“오늘은 좀 시간이 많이 비네. 이제 뭐하고 놀까? 머리 때리기 놀이 할까? 그럼 나부터 시작이야.”

빡! 비다르의 강철 주먹이 아르고디아의 콧잔등을 주먹으로 세게 후려쳤다. 그 거대한 물뱀의 머리가 움직일 정도의 충격이었다. 콧잔등의 뼈가 부러졌지만 아르고디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켁켁 소리를 내는 것뿐이었다.

“이제 네가 때려. 어? 때리라니까 왜 안 때리냐? 아, 맞다. 너 손이 없어서 때리지도 못하지? 그럼 내가 또 때린다?”

비다르는 장난으로 인형을 때리는 것처럼 아르고디아의 얼굴에 연달아서 주먹을 날렸다.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얻어맞기만 하는 아르고디아를 보던 라우렌시오가 말했다.

“적당히 해, 비다르.”

“그게 무슨 소리야. 적당히 하라고? 악마한테 왜 적당히 해야 하는데?”

라우렌시오는 굴곡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나도 때려야 하니까.”

“아, 그래서? 걱정하지 마. 죽기 직전까지만 때릴 거니까.”

비다르는 다시 아르고디아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는 백 년 전에 아르고디아가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죽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하는 것은 그때의 사람들이 느꼈을 무력감을 돌려주는 일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말라죽어가는 느낌을 아르고디아가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안 오는군.”

라우렌시오는 하늘을 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그는 지금 마법사왕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웅들이 성배기사와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대악마의 적자들을 해치우는 것은 세상의 안녕을 위해서기도 하지만 마법사왕을 불러내 그녀를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아르말락의 죽음 때는 마법사왕 바이올렛이 나타났다. 그녀는 타락했고 어떤 식으로든 다르디낭의 적자들과 연관이 있었다. 그러니 그들을 죽이고 다니면 언젠가는 마법사왕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게 성배기사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르고디아가 죽기 일보직전인 지금, 마법사왕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아르고디아에게 관심이 없는 걸까? 엄밀히 말해서 아르고디아와 아르말락을 같은 급으로 볼 수는 없었다. 천둥군주라 불리며 영웅들 중 하나인 칼라딘을 죽인 아르말락은 아르고디아보다 몇 배는 더 강했으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마법사왕이 아르고디아의 위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누구 말이야? 바이올렛?”

열심히 아르고디아를 괴롭히면서 땀을 빼던 비다르가 주먹을 흔들었다. 라우렌시오는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래도 아르고디아와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닌 모양이야. 아니면 엔디미온 쪽에 갔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르고디아나 타리샤나 거기서 거긴데.”

“야야, 그게 아니라 우리 둘이 같이 있으니까 겁나서 안 오는 거지. 생각을 해봐. 바이올렛이 좀 세기는 해. 그건 사실이야. 그래도 우리 둘을 무슨 수로 한 번에 상대하겠냐?”

영웅들의 실력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바이올렛이 마법사왕이 되면서 무언가 새로운 힘을 얻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영웅 두 명을 한꺼번에 상대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바이올렛은 우리가 다 모여 있을 때도 나타났는데. 심지어 엔디미온이 있었는데도 말이야.”

“······음, 그것도 그러네. 그럼 뭐 이 녀석이 굳이 구해야 할 이유가 없는 놈이라서 그런 모양이지.”

라우렌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끝내고 돌아가자. 엔디미온이 비로크로 오라고 했지?”

“아마.”

“또 부지런히 말을 타야겠군.”

라우렌시오는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마법을 실어서 날린 검격으로 아르고디아의 목을 일격에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주문을 외우며 정신을 집중할 때였다. 한가롭게 하늘 위를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있던 비다르가 말했다.

“이야, 신기하네. 저 구름은 꼭 소용돌이처럼 생겼어.”

“뭐?”

“구름이 소용돌이처럼 생겼다고.”

본래라면 그런 구름이 어딨냐며 콧방귀를 뀌어야 했다. 비다르는 조금 멍청한 구석이 있어서 헛소리를 잘 하는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라우렌시오는 주문을 외우던 것을 중단하고 곧장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감각이 경고하고 있었다. 무언가 온다.

“물러나, 비다르!”

“어어? 왜?”

“물러나라고, 멍청아!”

라우렌시오는 비다르의 뒷덜미를 잡고 뛰었다. 비다르가 했던 말처럼 하늘 위에는 소용돌이처럼 회전하고 있는 구름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신기한 자연현상 따위가 아니었다.

마법이다.

“으아악!”

콰아아아앙! 소용돌이의 중심부에서 발사된 빛이 땅을 직선으로 그었다. 그리고 그 경로를 따라서 불꽃이 일면서 거대한 굉음이 발생했다. 라우렌시오의 직감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진 비다르는 아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씨, 씹, 이게 뭐냐, 대체?”

“마법이야.”

“마법? 그, 그럼?”

“그래.”

라우렌시오가 하늘을 보았다. 소용돌이치던 구름은 이제 사라지고 없고 이제 그 자리에는 심연처럼 검은 어둠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바이올렛.”

“오랜만이구나, 내 옛 친우들.”

“무슨 자신감으로 여기 나타난 거냐?”

“무슨 자신감이냐고?”

바이올렛이 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날카로운 웃음이었다.

“이 반쪽짜리야, 내가 지난번에 말했던 걸 있었느냐? 다시 만나게 되면 내 손에 죽게 될 거라고. 무슨 자신감인지는 내가 너희에게 물어야지. 너희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악마들을 죽이고 다닌단 말이냐? 이런 식으로 날 꾀어내면 너희가 감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이 더러운 변절자야! 사악한 힘에 취해 타락하여 악마들에게 자존심과 영혼을 내버린 것을 부끄러운 줄 알아라! 어디 감히 그 더러운 입을 놀리느냐! 네가 얻은 그 알량한 힘이 대단한 것인 줄 아느냐? 그 어떤 강력한 힘도 정의로운 용기에 비하면 몹시도 하찮을 뿐이다!”

바이올렛이 입을 벌려 웃었다. 빠르고 날카로운 웃음소리였다. 그녀는 마치 마녀처럼 한바탕 웃은 후에 정색했다. 그리고 비다르를 보며 말했다.

“아, 우리의 요정기사께서는 참으로 고상하시군. 하지만 비다르, 너도 그의 말에 동의하느냐? 네 마음속에 있는 정의로운 용기가 내가 얻은 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느냐?”

“아니, 그건 아니지.”

즉답이었다. 비다르의 말에 라우렌시오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라우렌시오의 당황한 반응을 무시하며 비다르는 말을 이었다.

“정의로운 마음이니 뭐니 해봤자 솔직히 나는 낯간지러울 뿐이야. 왜냐하면 나는 돈을 벌려고 악마 사냥을 했던 거니까. 그건 지금도 변하지 않은 사실이지.”

비웃는 듯한 바이올렛의 얼굴을 보며 비다르가 하지만 하고서 말했다.

“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잖아? 돈을 엄청 많이 벌면 뭐해? 돈을 쓸 곳이 있어야지. 그리고 돈을 쓰려면 일단 이 세상이 멀쩡해야 하지 않겠어? 내가 봤을 때 악마들만 남은 세상에서 돈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거든? 그러니까 너는 좀 맞아야겠다, 바이올렛.”

“멍청한 놈,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구나. 나와 같은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것을. 네 선택이다, 비다르. 너는 여기서 죽는다.”

“마음대로 하셔. 아, 그리고 한 가지 말해줄게 있는데.”

비다르가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난 네가 옛날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이 망할 자식아. 맨날 잘난 척이나 하고 말이야.”

“……하.”

바이올렛이 입술을 비뚜름하게 기울이며 손을 들었다. 그 손에 사악한 기운이 모여드는 것을 신호로 세 명의 영웅이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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