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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왕 타리샤가 죽었다. 성배기사는 자신의 의무이자 아이딘 사제에게 부탁받았던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이제 살이 녹아내린 악마의 머리뼈를 증거로 들고서 라티에티로 돌아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로 타리샤의 사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가까이 다가온 베로니카가 말을 걸자 엔디미온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타리샤는 자신이 거대한 악의를 위해서 일한다고 말했지. 룽고르의 마법사왕조차 거대한 나무의 잔가지에 불과하다는 말도 했고.”
“음, 확실히 그 말은 좀 신경 쓰이기는 하네요. 다르디낭의 적자들을 한데 모을 만한 새로운 구심점이라도 나타난 걸까요? 하지만 전 그게 바이올렛, 그러니까 마법사왕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그것은 엔디미온도 마찬가지였다. 대마법사 바이올렛은 타락하여 룽고르의 마법사왕이 되었다. 그녀가 악마들의 밑으로 들어갔을 리는 없으니 강력한 마법과 새로 얻은 사악한 힘을 통해서 악마들의 새로운 구심점이 됐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타리샤는 그게 아니라고 했다.
타리샤를 쓰고 버리는 말로 취급하고 마법사왕을 굴복시킬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는 누구일까. 엔디미온의 머리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떠올랐다.
“설마 대악마 다르디낭인가?”
“네? 대악마요? 하지만 그건 엔디미온 씨와 영웅들이 무찔렀잖아요?”
“그래. 그냥 무찌르기만 한 게 아니라 내가 백 년 동안 성수로 그 사악한 힘을 정화시켰지. 다르디낭이 다시 부활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야. 그리고 정말 부활했다면 악마와 악귀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자기들 세상이 온 것처럼 날뛰면서 성과 마을을 습격했을 거다.”
베로니카는 으음 소리를 내며 말했다.
“혹시 돌아오기는 했는데 숨어있는 게 아닐까요? 엔디미온 씨 같은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럴 듯한데.”
“나? 나는 왜?”
“아니, 성배기사라는 것은 성기사들에게 있어서 존경할 만한 우상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다르디낭과 같은 위치라는 느낌인데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은 성배기사가 돌아왔다는 걸 모르잖아요. 그런 것처럼 악마와 악귀들도 대악마가 돌아온 걸 모르는 게 아닐까요? 대악마가 자기가 돌아왔다는 걸 말 안 하고 숨겨서 말이에요.”
엔디미온이 기가 차서 허 소리를 내며 말했다.
“다르디낭이 자기가 돌아왔다는 걸 왜 숨기는데?”
“음, 부활하기는 했는데 아직 힘이 덜 돌아와서?”
엔디미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악마는 죽었어. 다시 부활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아니, 그 새끼가 부활해버리면 내 백 년은 대체 뭐가 되는데? 내가 보낸 백 년의 시간이 억울해서라도 그 녀석은 부활하면 안 돼.”
베로니카는 헛웃음을 터트리려다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만약 내가 어떤 일을 했는데 그게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이란 걸 알게 됐다면 무슨 기분일까? 그리고 그걸 무려 백 년이나 했다면?
으음. 베로니카는 엔디미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말도 안 되는 소리기는 해요. 우리 성배기사께서 얼마나 일처리가 꼼꼼하신 분인데 설마 대악마가 부활하려고요.”
“그래. 그런 끔찍한 소리는 다시는 입에 담지도 마. 만약 다르디낭이 돌아왔다고 하면 이번에는 이백 년 동안 호밀밭에 처박혀 있어야 할지도 몰라.”
“하하하, 만약 이백 년 동안 또 같은 짓을 해야 한다고 하면 하실 건가요? 아니면 다른 영웅들처럼 이번에는 도망가나요?”
베로니카는 장난으로 한 물음이었다. 그녀는 엔디미온이 짜증을 내거나 머리를 쥐어박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둘 중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덤덤한 목소리로 한 마디 했을 뿐이다.
“또 하겠지. 욕을 하면서도 하겠지. 그게 내 의무니까.”
“오······.”
“왜?”
“가끔 보면 엔디미온 씨는 좀 무섭네요. 사람 맞아요?”
“그럼 악마겠냐.”
“악마들한테 하는 짓을 보면 악마보다 더한 것 같기도 하고.”
“그 녀석들한테는 그래도 돼.”
베로니카가 깔깔 웃었다.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서 말했다.
“뭐 어쨌거나 마법사왕을 잡으면 진실을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래, 그 말이 맞아. 일단 바이올렛을 잡는 게 제일 급한 일이로군.”
“그럼 이제 돌아갈까요?”
“그러자. 일단 나엘라티나 좀 깨워 봐.”
성수에 처박힌 뒤로 나엘라티나는 줄곧 기절해 있었다. 바깥으로 나온 지금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베로니카가 직접 몸을 흔들어서 깨워야 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몸을 몇 번 흔들자 눈을 떴다. 안 일어나면 따귀를 때릴 생각이었던 엔디미온은 조금 아쉬워졌다.
“으음······? 여긴 어디야?”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나엘라티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뼈만 남은 타리샤를 발견하고서 비명을 질렀다.
“뭐, 뭐야, 저거! 징그러워!”
깜짝 놀란 나엘라티나가 가까이 있던 베로니카를 꽉 껴안았다. 아무리 용들 중에서 약한 축에 속한다고 해도 용은 용이었기 때문에 베로니카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살기 위해서 나엘라티나의 등을 주먹으로 때렸다. 그래봤자 용에게는 간지러운 수준이었지만 나엘라티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베로니카를 놔주었다.
“아, 미안. 너무 놀라가지고.”
까딱 잘못하면 숨 막혀서 죽을 뻔한 베로니카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엘라티나를 째려보았다. 엔디미온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나엘라티나에게 말했다.
“야, 탈것. 바쁘니까 일단 변신부터 해.”
“타, 탈것? 누구 말이야? 설마 나?”
“그럼 누가 탈것인데? 너 말고 베로니카를 타고 라티에티까지 돌아갈까?”
베로니카는 나엘라티나 하나조차 업고 가지 못할 것이다. 나엘라티나는 이름조차 박탈당하고 탈것으로 격하된 자신의 위상에 울상이 되었다.
“······다들 나한테서 떨어져. 변신 도중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엘라티나는 성배기사에게 대들 깡이 없었다. 그녀는 이곳에 왔을 때처럼 용으로 변신했다. 주변의 나무들이 용의 몸집 때문에 부러지거나 휘어졌다.
“이거 주변의 나무 때문에 날갯짓하기가 힘든데.”
“야, 라이오넬. 주면에 나무 좀 잘라 봐.”
“음, 내 실력을 보일 때가 온 것인가.”
라이오넬은 곧장 검을 뽑아서 휘둘렀다. 그 순간 나엘라티나가 비명을 질렀다.
“이 노인네가 뭐하는 짓이야! 그건 나무가 아니라 내 다리라고!”
“음? 분명 여기서 사악한 기운이 느껴졌는데? 어디냐! 내 검을 받아라!”
엔디미온은 한숨을 내뱉었다. 저거 또 정신 놨네.
“베로니카, 라이오넬 데리고 뒤로 물러나 있어. 내가 해결할 테니까.”
“영감님, 뒤로 오시래요.”
“오, 알겠네.”
라이오넬은 유독 베로니카의 말을 잘 들었다. 매일 먹을 것을 챙겨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뒤로 물러나자 엔디미온은 성검을 뽑았다. 그리고 신성력을 담아서 크게 휘두르자 나무들이 우르르 넘어졌다.
덕분에 날갯짓을 할 만한 충분한 공간을 확보한 나엘라티나가 반색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날 수 있겠어! 자, 다들 얼른 내 등 위에 올라타!”
“으······. 또 날아서 가야 한다니.”
베로니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엔디미온이 나엘라티나를 향해 말했다.
“저것도 들고 가야 돼.”
“뭐 말이야?”
“타리샤의 머리뼈. 타리샤를 죽였다는 증거를 보여주면 라티에티 사람들도 안심하겠지.”
“저걸 들고 가라고? 으, 싫은데.”
“저 꼴 나기 싫으면 들고 가.”
나엘라티나는 어쩔 수 없이 날카로운 발톱을 이용해 타리샤의 머리뼈를 꽉 쥐었다.
“자, 그러면 이제 진짜 출발한다! 다들 꽉 잡아!”
모두가 등 뒤에 올라타자 나엘라티나가 날갯짓을 시작했다. 부웅부웅 소리가 몇 번 나다가 용이 그대로 하늘 위로 상승했다. 순식간에 구름 위까지 날아오른 나엘라티나는 구름을 뚫고 직선 방향으로 질주했다.
라티에티에서 여기까지 날아왔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라티에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야 했다. 만약 나엘라티나가 그대로 라티에티 근처까지 날아가면 도시의 모든 악마사냥꾼들이 모여서 창과 화살, 마법을 날려댈 것이다.
귀한 탈것을 얻었는데 다치게 둘 수는 없지. 엔디미온은 왜 백 년 전에는 용을 타고 다닐 생각을 못했는지 아쉬웠다. 그랬으면 더 많은 전장에서 활약하며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저기, 나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는데.”
라티에티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서 나엘라티나가 말했다.
“탈것이라고 안 부르면 안 돼······? 그거 내 정체성을 부정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좀 치욕스럽다고 할까, 어쨌든 좀 그래.”
“그럼 뭐라고 부르는데.”
“이름으로 부르면 되잖아······. 무, 물론 알고 있겠지만 내 이름은 나엘라티나야!”
엔디미온이 지그시 나엘라티나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왠지 모르게 무서워서 나엘라티나가 목을 움츠렸다.
“그래, 그럼 그러지. 가자, 나엘라티나.”
“아, 알겠어!”
나엘라티나가 환하게 웃었다. 엔디미온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따라오는 그녀에게 말했다.
“야.”
“어?”
“저거 들고 와.”
엔디미온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타리샤의 머리뼈가 있었다. 다시 시무룩해진 나엘라티나는 거대한 머리뼈를 어깨 위에 올리고 터덜터덜 엔디미온 일행의 뒤를 따랐다. 저 멀리 라티에티의 성벽이 보였다.
부지런히 걸어서 성벽 근처까지 왔을 때, 엔디미온은 성벽 위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그 커다란 놈의 미간을 콱! 하고 찌르니까 그 녀석이 아무것도 못하고······.”
“야야, 그게 말이 되냐? 거짓말도 적당히 해야지.”
“야! 네가 봤냐? 진짜라니까!”
“왜 또 싸우는데? 싸우지 말고 술이나 먹자고!”
라티에티의 오후는 왁자지껄했다. 모든 악마사냥꾼들이 같은 시간에 사냥에 나섰다가 돌아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일찌감치 일을 끝내고 돌아와 술을 마시는 악마사냥꾼들도 많았다. 토비아스도 그들 중 하나였다.
“야, 잠깐만. 저거 뭐냐?”
그는 성벽 위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본래는 안 되는 일이지만 토비아스가 라티에티의 수비대장과 아는 사이였고 병사들과 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뭐가?”
“저기 저거 말이야.”
토비아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짐승의 머리뼈를 들고서 걸어오는 여자와 그 일행들이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토비아스는 취기 때문에 자꾸만 눈을 깜빡였다.
“저 새끼들 누구냐? 악마사냥꾼들 중에서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신입이야, 토비아스?”
“신입이냐고?”
토비아스는 소처럼 멀뚱히 눈만 깜빡였다. 왜 낯이 익지?
“야, 장난 좀 쳐볼까?”
병사들은 술이 들어가자 겁이 없어졌다. 성벽 위에서 근무 중에 술을 먹는 것 자체가 근무태만인데 거기서 더 나아가 여행자들을 골려주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 순간 토비아스는 왠지 모르게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이, 정지! 어디서 온 나그네들인지 모르겠는데 여길 지나가려면 통행세를······.”
쾅! 커다란 굉음과 함께 갑자기 성문이 박살났다. 성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이제 짐승의 머리뼈가 박혀 있었다. 산적 흉내를 내던 병사는 딸꾹 소리를 내며 말을 끝마쳤다.
“······내셔야 하는데요.”
“그거면 일 년치 통행세는 될 거다. 야, 거기 어제 나한테 맞았던 놈. 내려와.”
토비아스는 이제야 저들이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 그리고 어제 맞았던 일까지 모두 기억났다.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생각했다. 큰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