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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51화 (151/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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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과 나엘라티나는 여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물건을 구매하느라 벌써 저녁 시간이었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악마사냥꾼들이 자리를 잡고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었고 여급 하나가 바쁘게 돌아다니며 주문을 받았다.

“엔디미온 씨! 나엘라티나 씨!”

앳되면서도 당찬 목소리는 베로니카의 것이었다. 그녀는 그간의 여행을 통해 덩치 큰 남자들 사이에서 홀로 테이블을 잡을 수 있는 배짱을 얻었다. 또한 술꾼들의 고함소리에 지지 않을 만큼 커다란 목소리도.

엔디미온과 나엘라티나는 그녀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베로니카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처럼 익숙하게 맥주 한 잔을 시키고 땅콩을 까먹고 있었다.

“여기 토박이 같은 걸.”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얻은 교훈이 하나 있다면 정 붙이면 어디든 고향이라는 사실이에요.”

“이번에는 베테랑 여행가 같군.”

엔디미온은 웃으며 의자를 당겼다. 나엘라티나도 얼른 의자에 착석했다.

“라이오넬은?”

“영감님이야 늘 똑같죠. 주무세요. 요즘 부쩍 잠이 느셨다니까요.”

“나이를 먹어서 그래.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모르겠군.”

베로니카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불길한 소리는 하지 마세요.”

“농담이야.”

“영감님이 오래 사시길 빌어야겠어요.”

“그 녀석은 충분히 오래 살았어. 그리고 나도. 우리도 언젠가는 죽겠지. 그게 지금 당장이 아닐 뿐.”

그 말이 맞았다. 영웅들은 오래 살았다. 충분히를 넘어서 지나치게.

“이런 이야기는 됐고 뭐 좀 먹자. 음식 시켰어?”

“아직이요. 아무거나 시켜두세요. 전 영감님 좀 깨우고 올게요.”

베로니카가 라이오넬을 깨우러 간 사이에 엔디미온은 지나가는 여급을 붙잡아서 음식과 술을 주문했다. 여급은 상당히 지친 듯 했지만 그래도 직업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알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여급은 그 사이에 또 다른 테이블에 불려갔다.

“여기가 왜 장사가 잘 되는지 알겠어.”

“왜 잘 되는데?”

“저 친구가 일을 열심히 하잖아.”

“여급한테 치근대는 남자가 많아서겠지.”

“그것도 맞고.”

덜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베로니카와 라이오넬이 나왔다. 라이오넬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어디서 사악한 냄새가 나는데······.”

나엘라티나가 몸을 흠칫 떨었다. 용치고 전투능력이 떨어지는 그녀는 라이오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거기에 라이오넬의 실력도 봤으니 더욱 조심해야 했다. 그녀는 엔디미온 일행과 겨우 하루를 보냈을 뿐이지만 라이오넬의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차, 착각이겠지······.”

“음? 이 목소리는 누구인가? 많이 낯선데.”

라이오넬은 그새 나엘라티나를 까먹은 듯 했다.

“나는 나엘라티나야.”

“오, 나엘라티나인가. 반갑네.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일세.”

“응, 알고 있어.”

“날 아는겐가? 이런! 내가 이만큼 유명해지다니!”

나엘라티나는 라이오넬이 착각을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식사 나왔습니다! 술도요!”

여급이 주문한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왔다. 그녀는 바쁘게 식탁 위에 음식을 내려두고서 다시 다른 손님들에게 가버렸다.

“많이 바쁜가 본데.”

“물어보니까 이 여관이 제일 장사가 잘 된대요.”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먹음직스럽게 구워져 나온 돼지고기를 포크로 찍었다. 그가 식사를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얼른 음식을 먹었다.

술과 음식을 맛있게 먹던 중에 엔디미온이 말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거니까 다들 일찍 자.”

“알겠습니다. 이야, 내일부터 또 부지런히 말을 타야겠네요.”

“아니, 말 안 타고 날아갈건데.”

“나, 날아가요?”

베로니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엘라티나에게로 움직였다. 시선을 받은 용은 어깨만 으쓱했다.

“그럼 말들은 어쩌고요?”

“팔았는데.”

“팔았다고요? 말들을요?”

“그래. 나엘라티나가 그 말들까지 다 태우고 다닐 수는 없잖아.”

충격적인 소식에 베로니카가 허 하고 숨을 뱉어냈다.

“말하고 정이 많이 들었는데······.”

“그럼 이제 용한테 정을 붙여.”

“나엘라티나 씨한테 말인가요?”

베로니카는 와구와구 음식을 먹고 있는 나엘라티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시선을 느끼고서 고개를 움직였다. 동그란 눈으로 뭘 보냐는 듯 우적우적 음식을 씹고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말 대신에 정을 붙이는 게 가능할 것도 같았다.

“식사 다 했으니까 먼저 일어난다.”

엔디미온은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 남은 사람들도 잠시 뒤에 식사를 끝낸 후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엔디미온과 한 방을 쓰는 라이오넬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베로니카의 말대로 요즘 부쩍 잠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나도 일찍 자야겠군.”

엔디미온 역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이 찾아오는 시간은 빨랐다.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은데 벌써 햇살이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언제나와 같이 제일 먼저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일어나 아침을 먹은 후에 짐을 정리했다.

엔디미온은 여관 주인에게 그동안 값을 지불한 후에 바깥으로 나갔다. 햇살이 아직은 미지근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따끈하게 달아오를 것이다.

“어제처럼 여기서 날아가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은데?”

나엘라티나의 말대로 지금은 새벽이 아니라 아침이었기 때문에 길거리에 사람들이 많았다. 엔디미온은 성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성에서 좀 떨어진 후에 변신해야겠군.”

엔디미온 일행은 성문을 향해서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성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 걸어야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어제 그들이 성문을 부쉈기 때문이었다. 엔디미온은 자신은 모르는 일인 것처럼 아무 말도 없이 성문을 통과해서 나갔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엔디미온 일행을 알아보고 수군댔다.

“한 시간 정도 걸어야 안전하겠지. 괜히 라티에티 근처에 용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나면 곤란하니까.”

용이 사라진지는 오래 됐다. 악마와 악귀들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데 용까지 다시 나타났다고 하면 여명교단이 뒤집어질 게 분명했다. 엔디미온은 괜한 소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엘라티나도 마찬가지였다.

엔디미온 일행은 부지런히 걸어서 아무도 다니지 않는 공터에 도착했다. 건조한 바람이 불고 햇살이 따갑게 쏟아졌다. 나엘라티나는 혼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거대한 용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녹색의 용은 날개를 힘껏 흔들었다. 만약 지나가던 여행자가 우연히 봤다면 놀라서 기절했을 모습이었다. 하지만 엔디미온 일행은 익숙하게 용의 등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엔디미온이 베로니카에게 끈 하나를 내밀었다.

“끈은 왜요?”

“몸에 묶어.”

베로니카는 얌전히 시키는 대로 했다. 그녀가 끈을 몸에 묶자 엔디미온은 끈의 반대쪽 부분을 자신의 몸에 묶었다. 그 모습을 보고 베로니카가 아하 소리를 냈다. 서로 연결돼 있으니 만약 베로니카가 용의 비늘을 놓쳐도 엔디미온 덕분에 뒤로 날아갈 일은 없었다.

“출발해.”

엔디미온이 찰싹 소리가 나게 등을 때리자 나엘라티나가 날갯짓을 시작했다. 그녀는 몇 번의 날갯짓만으로 하늘 위로 날아올랐고 하늘을 난다는 감각에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목적지는?”

“비로크.”

“비로크 말이지. 알겠어! 그럼 꽉 잡으라고! 나는 세상에서 제일 빠른 용이니까 말이야!”

나엘라티나가 순간적으로 속도를 내자 베로니카는 뒤로 벌러덩 뒤집어져서 날아갈 뻔 했다. 하지만 엔디미온과 연결돼있는 끈 덕분에 땅으로 떨어지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대신에 끈에 묶인 채로 공중에 떠오른 꼴이 되고 말았다.

“오, 마치 연 같은데.”

“으아아아아악!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 죽을 것 같다고요!”

엔디미온은 픽 웃으며 공중에 떠서 펄럭거리는 베로니카의 모습을 보았다. 다시 보아도 웃겼다.

“야호! 신난다!”

나엘라티나는 신나서 소리를 지르며 날갯짓을 했다. 그녀의 속도는 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하늘을 날고 있기 때문에 거칠 것이 없었다. 라티에티에서 비로크까지는 며칠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이 속도라면 이틀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물론 이틀 연속으로 날 수는 없으니 간간이 휴식을 취해야겠지만 그래도 말을 타고 달리는 것보다 아주 빠른 속도였다.

“저기서 잠깐 쉬었다 가자.”

나엘라티나의 거대한 덩치 때문에 지상에 자주 내려올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길을 가는 여행자들이 용을 보고서 깜짝 놀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그들은 밤이 됐을 때 지상으로 내려왔다. 거의 하루 종일 날갯짓을 했던 나엘라티나는 지상으로 내려오자마자 인간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으으······. 난 나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싫어졌어. 이렇게 오랫동안 날아본 건 처음이야.”

“왜 엄살이야. 아직 하루는 더 가야 하는데.”

“엄살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난 지금 어깨가 빠질 것 같다고! 이건 사람으로 치면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행군하는 것과 같은 거라고!”

정말로 힘들었는지 나엘라티나가 엔디미온에게 대들었다. 불을 피우기 위해 주변의 마른 나뭇가지들을 찾아다니던 베로니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엘라티나 씨가 오늘 정말 고생했어요. 하루 종일 날갯짓을 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내 말이! 성배기사는 날 너무 부려먹어!”

엔디미온은 탈것의 고충을 들어주기로 했다. 말도 팔았는데 이대로 나엘라티나가 뻗어서 이동에 지장이 생기면 안 되니까.

“이거 마셔.”

“응? 오, 물도 챙겨주고 이제야 날 인격적으로 대할 마음이 든 모양이군!”

나엘라티나는 엔디미온이 내민 수통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얼른 한 모금 마셨다.

“푸확! 이거 뭐야!”

하지만 그녀는 한 모금 마시자마자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물을 모두 뱉었다. 엔디미온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뭐하는 짓이야? 그 귀한 걸 왜 뱉어?”

“이거 성수잖아! 난 용이라고! 날 죽일 셈이야?”

아참, 그랬지. 엔디미온은 본의 아니게 나엘라티나를 괴롭히고 말았다. 그가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나엘라티나가 꽥꽥대면서 대들었다. 두 사람의 다툼을 보고 있던 베로니카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식사 다 됐으니까 그만 싸우세요.”

“오, 식사다!”

나엘라티나는 단순했다. 식사가 다 됐다는 말에 얼른 모닥불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엔디미온 일행은 베로니카가 만든 스튜를 나누어 먹었다.

“이야, 이거 맛있네. 요정 아가씨, 요리 잘하는데?”

“흐흥, 제가 좀 하긴 하죠.”

식사가 끝난 후에 뒷정리를 하고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밤이 되면 달이 뜨는 것처럼 낮이 되면 해가 떴다. 슬며시 몸을 쓸고 지나가는 햇살에 엔디미온이 일어났고 그는 아직 자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깨웠다.

“자, 그럼 오늘도 부지런히 가볼까!”

어제 그렇게 날았으면 근육통이 생길 법도 한데 나엘라티나는 멀쩡했다. 용치고 약하기는 해도 용은 용인 모양이었다. 엔디미온은 좀 더 부려먹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엔디미온 일행은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한 후에 용과 함께 날아올랐다.

아침 일찍 하늘을 가르는 것은 몹시도 상쾌한 일이었다. 베로니카는 이제 용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는 요령을 익혀나가고 있었다. 나엘라티나가 가속하자 의미 없는 짓이 됐지만.

용은 거침없이 날갯짓을 하며 전진했다. 어중간하게 하늘에 걸려있던 태양이 점차 제자리를 찾아갔다. 하늘을 나는 용의 바로 위를 태양이 지나갔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태양이 발갛게 하늘을 불태우기 시작할 때 저 멀리서 회색의 성벽이 보였다. 비로크였다.

“내려가자.”

나엘라티나는 강하했다. 이제야 이 지옥 같은 비행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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