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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히 걸으면 밤이 되기 전에 성 안에 들어갈 수 있겠군.”
지상으로 내려온 엔디미온은 비로크의 성벽을 바라보며 눈대중으로 거리를 가늠했다. 혹시나 여행자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좀 떨어진 곳에 내렸기 때문에 제법 걸어야 할 듯 했다.
엔디미온 일행은 부지런히 걸었다. 너무 늦게 도착하면 성문이 닫힐 것이고 그러면 노숙을 해야 했다. 성벽 바로 아래에서 노숙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쉬지 않고 걸은 덕분에 문이 닫히기 바로 직전에 성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들을 마지막으로 비로크의 성문이 닫혔고 하늘은 완전히 까만색으로 물들었다. 하늘 위에 떠오른 별들이 저들끼리 뭉쳐 그림을 그렸다. 엔디미온은 저게 무슨 별자리였는지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었다.
“일단 여관부터 갈까요?”
베로니카의 물음에 별자리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을 그만 두었다. 엔디미온 일행은 여관 몇 곳을 돌아다녔지만 모두 방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행히도 마지막에 간 여관에서 방 하나를 겨우 빌릴 수 있었다. 너무 늦게 비로크에 도착한 탓에 방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방 하나를 네 명이서 써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나 있는 침대는 라이오넬에게 양보했고 다른 사람들은 바닥에 모여서 짐을 정리하고 잠을 잘 준비를 했다. 나엘라티나와 베로니카는 바닥에 누웠고 엔디미온은 벽에 기댄 채로 잠을 잤다.
고된 육체노동을 했던 나엘라티나는 금세 잠들었고 베로니카 역시 몸을 몇 번 뒤척이다가 잠에 들었다. 그녀가 지금까지의 여행을 통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잘 수 있을 때 자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웅들의 체력은 일반인들과 달라서 그들의 강행군을 따라가려면 틈틈이 체력을 회복해둬야 했다.
라이오넬이야 침대에 눕자마자 잠에 들었다. 벽에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있던 엔디미온만이 아직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그는 왕성한 체력 덕분에 쉽게 지치지 않았고 며칠 동안 잠을 자지 않아도 멀쩡했다. 몸 안에 있는 성배는 두 번째 심장과 같았고 끊임없이 몸 곳곳으로 신성력을 보내며 힘을 회복시켰다.
성배기사는 지친다는 게 무엇인지 몰랐다. 힘이 든다는 것은 알아도 그것은 일시적인 감각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성배의 힘에 의해 회복되기에 단 한 번도 지쳐 쓰러진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엔디미온은 벽에 기대서 눈을 감고 있는 사이에 몸을 만전의 상태로 끌어올렸다. 갑자기 악마가 나타나서 그들을 습격하더라도 바로 대처할 수 있도록 날카로운 감각이 주변을 감지하고 있었다. 귀는 문 너머에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소리까지 모두 듣고 있었다. 바닥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을 통해서 몇 명이 움직이고 있는지까지 확인했다.
복도에는 사람 다섯. 목소리를 들어보면 전부 다 남자. 늦은 밤에 술집이라도 가려고 나온 것일까? 아니면 이제 방으로 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엔디미온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바깥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여기······맞.”
“돈······상인······.”
민감한 청각은 가끔 본의 아니게 남의 이야기를 훔쳐들을 때가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복도에서 남자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던 엔디미온은 갑자기 눈을 떴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영 이상했기 때문이다.
“이 방인 거 확실해?”
“확실하다니까. 내가 몇 번이나 확인했어.”
“여기를 털면 크게 한 탕 할 수 있다는 거지?”
“그래. 돈이 엄청나게 많데.”
“용병들이 달려오면 어떡하지? 낮에 보니까 이 여관에 다섯 명도 넘게 있던데.”
“바보야. 그 녀석들 전부 수면제를 탄 술을 먹고 곯아떨어져 있다고. 걱정할 것 없어. 내가 문을 딸 테니까 잠깐 뒤로 물러나 있어.”
딸깍딸깍 소리가 나면서 문고리가 흔들렸다. 엔디미온은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이 밤중에 좀도둑들이라고? 감히 겁도 없이 성배기사의 방을 털러 오다니. 전능자의 종이자 성배의 대리인으로서 엔디미온은 그들을 그냥 둘 수 없었다.
그는 복도에 있는 남자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슬쩍 방 안을 보니 다른 사람들은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특히 나엘라티나는 입을 헤 벌리고 침까지 흘리며 자고 있었다. 저거 용 맞아? 엔디미온이 백 년 전에 봤던 용들은 전부 잔혹하고 무시무시한 존재였는데 저건 그냥 바보였다.
“잠깐, 잠깐만······. 그래, 그래, 이거지. 다 됐다. 다들 조용히 들어가자고.”
문을 다 딴 것인지 슬며시 문이 움직였다. 엔디미온은 벽에 딱 달라붙어서 자신의 기척을 숨겼다. 그는 어디서나 눈에 띄는 큰 덩치를 가졌지만 이런 어둠 속에서라면 기척을 숨기는 것만으로 모습을 완벽하게 숨길 수 있었다. 좀도둑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엔디미온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숫자를 셌다. 총 다섯 명.
“뭐야, 여기 맞아?”
“바닥에 이 여자들은 뭐야? 몸종인가?”
“저 가방에 돈과 보석이 들어있는 건가?”
좀도둑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리면서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엔디미온은 슬쩍 손을 움직여서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조용한 밤에는 아주 크게 들렸다. 좀도둑들은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고 저들끼리 수선을 떨었다.
“뭐, 뭐야. 바람인가?”
“하지만 문은 닫혀 있는데?”
“귀, 귀, 귀신 아냐?”
“헛소리하지 마. 시간 없으니까 얼른 가방만 챙겨서 나가자고.”
엔디미온은 조용히 좀도둑들의 뒤에 섰다. 그들은 아직도 엔디미온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슬며시 손을 뻗어서 가장 뒤쪽에 있는 좀도둑의 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입을 막고서 목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당연히 좀도둑은 숨이 막혀서 버둥거렸으나 성배기사의 힘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는 곧 축 늘어졌다. 하지만 죽은 것은 아니었다. 잠깐 기절했을 뿐이었다.
본래 엔디미온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짐을 노리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길에서 강도들을 만났을 때 전부 다 죽였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좀도둑을 굳이 죽이지 않은 것은 단지 여관에서 시체를 만들기 싫었을 뿐이다. 어쨌거나 이곳은 그가 한동안 머물 곳이니까.
“야, 이리 와서 이것 좀 같이 챙······. 어?”
좀도둑들 중 하나가 뒤를 돌아보다가 드디어 엔디미온을 발견했다. 커다란 덩치를 가진 그가 소리도 없이 뒤에 와서 있으니 당연히 깜짝 놀랐다. 좀도둑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엔디미온의 주먹이 날아와서 얼굴에 꽂혔다.
“다른 사람들 자잖아. 조용히 해야지.”
“뭐, 뭐야? 씨발, 저 새끼 뭐야?”
좀도둑들이 엔디미온을 발견하고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셋 다 단검을 들고 있었는데 엔디미온은 맨손임에도 여유로웠다.
“덤벼.”
“저 새끼 죽여!”
좀도둑들이 달려들었다. 엔디미온은 단검을 내지르는 좀도둑들의 손목을 손으로 쳐서 단검을 떨어트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반대쪽 손으로 그의 손목을 붙잡아서 자신 쪽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좀도둑은 박치기에 맞고 고개가 크게 뒤로 젖혀졌다. 그대로 뒤로 쓰러지려는 것을 엔디미온이 멱살을 붙잡아서 다시 잡아당겼다.
엔디미온은 좀도둑을 두 손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좀도둑을 향해서 집어던졌다. 두 명의 좀도둑이 서로 부딪쳐서 뒤로 날아갔다. 마지막 좀도둑이 이익 소리를 내면서 달려들었다.
그는 다른 좀도둑들이 당하는 사이에 엔디미온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있는 힘껏 내질렀고 손끝에 분명히 무언가를 찌르는 듯한 감각이 남았다. 그는 큭큭 웃으며 엔디미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뭘 봐.”
“어?”
분명히 찔렀는데? 사람이라면 칼에 찔리고도 덤덤할 수 없다. 좀도둑은 얼른 자신의 손을 보았다. 단검은 엔디미온의 배에 꽂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꽂혀 있는 게 아니라 아주 약간만 상처를 냈을 뿐이었다. 오히려 단검의 끝부분이 구부러졌다. 이게 말이 돼?
“너, 너, 너 뭐야? 사람 맞아? 사람으로 변장한 악마 아냐?”
“누가 봐도 사람이잖아.”
“세상에 칼 맞고 멀쩡한 사람이 어디 있어! 옷 밑에 갑옷이라도 입은 거냐?”
“갑옷을 왜 입어. 내 몸이 곧 강철인데.”
엔디미온이 성큼성큼 좀도둑에게 다가갔다. 반대로 좀도둑은 뒤로 물러났으나 엔디미온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아, 안 돼······.”
“돼.”
엔디미온은 손으로 좀도둑의 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당장 조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부러 느슨하게 목을 쥐고서 좀도둑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주었다.
“말해라. 왜 이 방에 침입한 거지?”
“도, 도, 돈 때문에, 컥.”
“돈?”
물론 엔디미온은 돈이 많지만 여관 안에서 그걸 자랑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왜?
“너희에게 정보를 준 자가 있었나?”
“어, 없어. 우리는 그냥, 컥, 그냥, 방을 잘못 찾은 것뿐이야!”
“뭐?”
“씨, 씨발! 방을 잘못 찾았다고! 원래는, 컥컥, 돈 많은 상인의 방을 털어야 하는데 여기로 잘못 온 거야!”
뭐 이런 멍청한 놈들이······. 엔디미온은 어이가 없어져서 좀도둑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가 자신의 목을 붙잡고 연신 컥컥 소리를 냈다.
“이게 무, 무슨 소란입니까? 무슨 일이 났나요?”
조용히 싸운다고 싸웠는데 여관 주인이 소란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후덕한 인상의 여관 주인이 촛불을 하나 들고서 엔디미온의 방으로 달려왔다. 그는 방 안에 널브러져 있는 남자들을 보고서 헉 소리를 냈다.
“혹시 이 여관에 상인이 머물고 있소?”
“아, 호른 상단의 상단주께서 머물고 있으십니다만 그건 왜······?”
엔디미온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상단주를 노리던 좀도둑들을 잡았소. 이야기는 해줘야겠지.”
“아, 이 사람들이 그······.”
여관 주인은 좀도둑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같이 가시지요.”
“고맙소. 그리고 나엘라티나와 베로니카.”
아까 엔디미온이 좀도둑을 던지면서 난 소리 때문에 두 사람이 잠에서 깬 상태였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녀석들 지키고 있으라고? 걱정하지 마! 우리가 잘 지키고 있을게.”
“하암, 다녀오세요.”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관 주인과 함께 방을 나갔다. 여관 주인은 바로 오른쪽에 있는 방의 문을 두드렸다.
“이걸 헷갈리다니 운도 없는 놈들이군.”
중얼거리는 사이에 안쪽에서 소리가 났다. 누구냐고 묻는 목소리에 여관 주인이 상황을 설명했다. 상단주 역시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들어오십쇼.”
허락이 떨어지자 여관 주인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방 안에 들어간 것은 엔디미온 혼자였다. 그는 촛불을 켜고 의자 위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중년의 남성이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절 습격하려던 좀도둑들을 잡아주셨다고요.”
딱히 상인을 위해서 잡은 건 아니었지만 결과가 그랬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밤에 미안하오. 하지만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아닙니다. 덕분에 재물과 목숨을 지켰는걸요. 그런데 좀도둑들이라니. 하아, 안 그래도 요즘 상단을 운영하는 게 힘든데 기분이 참 씁쓸하군요.”
“장사가 잘 안 되시오?”
“장사가 잘 안 된다기보다는 장사를 하기 힘들다는 게 더 맞는 소리겠지요. 성가신 놈들 때문에 상행길이 몹시 위험해졌습니다.”
“악마와 악귀들 말이오?”
상인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 녀석들도 위험하기는 하지만 아닙니다. 악귀들이야 고용한 악마사냥꾼들로 처리할 수 있고 악마는 보통 자기 영역이 있어서 그곳으로만 안 가면 되니까요.”
“그럼 뭐가 문제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마을을 불태우는 놈이 있습니다. 자신을 룽고르의 마법사왕이라고 소개하던데 아마 정신 나간 악마숭배자겠지요. 그 망할 놈 때문에 거래처가 크게 줄었습니다. 마을이 없으니 제 물건을 사줄 곳도 없어진 겁니다.”
엔디미온은 굳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타락한 영웅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면 그것은 오롯이 그의 책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