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53화 (153/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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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마법사왕에 대한 소문을 들은 곳이 어디요?”

엔디미온은 이 문제를 하루라도 빨리 해결하려고 했다. 백 년 전 누구보다 많은 악마들을 죽였던 바이올렛이 갑작스럽게 변절한 것에는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이유와 사정이 있든 성배기사로서 신경 써야 할 것은 오직 악의 처단뿐이었다.

물론 한때 영웅들을 이끌었던 입장에서 바이올렛의 변절은 입맛이 썼다. 그래도 그녀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면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했다. 엔디미온은 상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목이 마른지 자리끼를 한 모금 마신 후에 입을 열었다.

“제가 들은 소문에 따르면 이곳에서 남쪽으로 닷새 정도 떨어진 곳에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무슨 술수를 썼는지 하늘을 날아다니며 이곳저곳에서 신출귀몰한다고 합니다. 며칠 전의 소문이니 아마 지금은 거기에 없겠지요. 기사수도회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서 멀리 도망갔을 겁니다. 어쩌면 대담하게 뒤르겔 근처에 숨어있을지도 모르지요.”

바이올렛의 백 년 전의 마법사였다. 그것도 하나뿐인 대마법사. 당연히 지금의 마법사들과 수준이 달랐으며 그들이 쓰지 못하는 마법들도 자유롭게 사용했다. 하늘을 날아서 멀리 도망치는 것 정도는 그녀에게 간단한 일이었다.

영웅들이 다르디낭의 적자들을 해치우고 다녔던 것도 바이올렛이 직접 나타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엔디미온은 혹시나 상인에게서 바이올렛의 위치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까 했지만 역시나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답변 고맙소. 혹시 좀도둑들의 얼굴을 보시겠소? 그들은 내 방에 기절해 있으니 보려면 같이 가십시다.”

“아, 절 노렸던 간 큰 놈들이 누구인지 한 번 봐야겠습니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상인이 뒤를 따랐고 그들은 엔디미온의 방으로 돌아갔다. 방 안에는 라이오넬이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잠을 자고 있었고 네 명의 좀도둑들이 벽에 기댄 채로 기절해 있었다. 베로니카는 그런 그들을 감시하는 중이었고 나엘라티나는 좀도둑 하나를 바닥에 깔고 깔아뭉개고 있었다.

“내가 감시하라고 했지 괴롭히라고 했냐.”

“아, 돌아왔구나. 이 녀석이 까불길래 내가 손 좀 봐줬어.”

나엘라티나가 눈을 찡긋 했다. 뭐 어쩌라고. 엔디미온은 그녀를 무시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엘라티나의 밑에 깔려 있는 것은 엔디미온이 가장 마지막에 상대했던 좀도둑이었는데 아마 방 안에 노인과 여자들만 남은 것을 보고 도망치려고 했을 것이다. 그는 나엘라티나가 용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니 그대로 당했을 것이고.

“이 다섯 명이오. 혹시 아는 사람들이오?”

“어······. 이 사람들 혹시 죽은 거 아닙니까?”

엔디미온에게 호되게 당한 좀도둑들은 모두 죽은 듯 조용했다. 촛불 하나에 의지해서 보는 방 안의 모습은 오싹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기절한 것뿐이오. 혹시 죽였어야 했소?”

“아, 아닙니다! 죽일 것까지야! 그냥 좀 놀랐을 뿐입니다.”

“다행이오. 나도 죽일 생각은 없거든. 이대로 경비병들에게 넘기면 되겠소?”

“흐음,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얼굴을 좀 보려고요.”

상인은 좀도둑들의 얼굴을 골똘히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전부 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로군요. 아마 이 도시의 할 일 없는 한량들이겠지요. 참 겁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제 밑에는 용병으로 고용한 악마사냥꾼들이 다섯 명이나 있는데 무슨 자신감인지.”

“그 사람들은 전부 수면제를 탄 술을 먹고 곯아떨어졌다고 하던데.”

“네? 그게 정말입니까?”

“이 녀석들이 한 말이니 정말이겠지. 진짜인지 아닌지는 확인해보면 알 일이고.”

“하아······. 비싼 돈을 주고 고용한 자들인데 영 미덥지가 못하군요. 이래서 악마사냥꾼들이 성기사들보다 못하다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직업의식이 없어요, 직업의식이.”

엔디미온은 소리 없이 웃었다.

“이 녀석들은 줄로 결박해서 창고 같은 곳에 처박아 두겠소. 아침이 되면 경비병들에게 인도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네, 감사합니다. 내일 일을 마치고 나서 제 방에 잠깐 들러주시겠습니까? 도움을 받았으니 마땅히 성의를 보여야겠지요.”

엔디미온은 그럴 것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인이 꼭 받아달라고 간청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또 뵙겠소. 난 좀도둑 놈들을 창고에 처박아 두고 오겠소.”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또.”

상인이 공손하게 인사하며 물러났다. 엔디미온은 나엘라티나와 베로니카의 도움을 받아서 좀도둑들의 손목을 끈으로 결박했다. 그들을 줄줄이 연결해서 끌고 나가려는데 유일하게 기절하지 않은 좀도둑이 입을 비틀면서 무어라 중얼거렸다.

“······제기랄. 이번 일만 성공했으면 비로크의 주먹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자기는 아주 조용하게 중얼거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도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소음이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성배기사였고 그는 아주 작은 소리조차 들을 수 있었다. 비로크의 주먹이라는 단어는 그의 주의를 끌기 충분했다.

엔디미온은 여관 주인에게 창고의 문을 열어줄 것을 부탁했다. 여관 주인은 거부하지 않았고 얼른 창고의 열쇠를 주었다. 열쇠로 창고의 문을 열면서 엔디미온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비로크의 주먹이 뭐냐.”

“어, 어어?”

좀도둑은 당황했다. 엔디미온이 자신의 말을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엔디미온의 눈치를 보았다. 질문에 대한 답이 얼른 나오지 않았지만 엔디미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창고의 문을 열고서 줄줄이 연결된 좀도둑들을 집어던졌을 뿐이다. 사람 다섯 명을 쓰레기 버리듯 던져버린 그는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그나마 안쪽으로 들어오던 달빛이 끊겼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좀도둑은 두려움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크다. 그것은 본능적인 것이니까. 그는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 여기에는 좀도둑이 다섯 명이나 있고.”

엔디미온의 목소리에는 굴곡이 없었다. 윽박지르는 것도 아니고 협박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좀도둑을 더욱 두렵게 했다.

“그건 내가 질문할 기회가 다섯 번이나 있다는 뜻이지.”

말하지 않으면 죽는다. 좀도둑은 자신에게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다급하게 외쳤다.

“가, 강도단이야! 비로크 주변에서 활동하는 강도단의 이름이야!”

“비로크의 주먹 말이냐?”

“그래! 이 주변에서 가장 큰 강도단인데 거기 속한 사람들의 숫자가 수백 명이야! 재물을 바치면 일원으로 받아준다고 해서 상인의 방을 털려고 했던 거야!”

“이해가 안 가는군.”

엔디미온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상인의 재물을 훔쳤으면 그 돈으로 멀리 떠나면 되는 것 아닌가? 왜 굳이 강도단에 바치고 그 아래로 들어가려는 거냐?”

“장물을 처리하려면 수르덴으로 가야 하는데 거기로 가는 길목에 비로크의 주먹이 도사리고 있어. 지나가려고 해봤자 돈을 다 뺏길 뿐이야. 차라리 그들에게 재물을 바치고 일원이 되는 게 낫지. 거기 대장은 통이 커서 말단들에게도 재물을 많이 분배해주거든.”

할 일 없는 한량들에게 있어서 마음대로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는 강도단은 제법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엔디미온은 좀도둑들을 한심하게 여기며 말했다.

“이 도시의 병사들은 왜 그 녀석들을 그냥 두는 거지? 악마사냥꾼들은?”

“말했잖아. 수백 명 규모의 강도단이라고. 알데리히는, 비로크의 주먹을 이끄는 대장이야, 사실상 그 일대의 영주나 다름없어. 그리고 악마사냥꾼들이 왜 굳이 자기들 목숨을 버려가며 그들에게 대항하겠어? 그 사람들은 악마와 악귀들 처치하는 것만 해도 바쁘다고.”

백 년 전보다 악마들의 세력이 약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빈자리를 같은 사람들이 채우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강도단이 그만큼 성장할 때까지 병사들과 악마사냥꾼들이 그냥 보고만 있었다는 사실에 헛웃음 소리를 냈다. 왕국 남부가 다른 지역처럼 교세가 강했다면 기사수도회가 나서서 비로크의 주먹이 성장하기 전에 뿌리를 뽑았겠지만 이곳에는 기사수도회가 없었다.

남부 사람들은 악마사냥꾼들이 성기사들을 완벽하게 대체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런 점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그 녀석들은 어디에 있지?”

“어? 누구 말이야?”

“누구겠냐. 비로크의 주먹인가 발인가 하는 놈들 말이야. 내가 설마 네 집이 어디 있는지 물었겠냐.”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좀도둑은 서둘러 대답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수르덴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동남쪽으로 가면 협곡이 하나 나오는데 거기가 그들의 본거지야. 그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걷고 있지.”

“괘씸한 놈들이군. 네 생각은 어떠냐.”

“내 생각?”

“그래. 네 생각. 그 녀석들은 다른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하고 재물을 빼앗으며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할 만한 일인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고.”

좀도둑은 눈알을 한 번 굴렸다. 그는 엔디미온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객관적인 관점에서 비로크의 주먹은 분명한 거악이었다. 상인이나 여행자들의 통행을 방해하는 짓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비로크를 말려 죽이는 짓이었다.

상인들이 꼭 비로크와 거래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 목숨을 걸고 이곳으로 와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를 제쳐두고서 사람들의 목숨과 재물을 빼앗는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악인이었다.

좀도둑은 생각을 마치고 엔디미온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어둠 때문에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에도 감정이 묻어나지 않으니 대충 감으로 찍어야 했다. 잘 모르면 일단 맞다고 하자.

“그래, 뭐······. 나쁜 놈들은 맞지.”

“나쁜 놈들이라면 누군가 벌을 줘야겠지?”

“어······. 아마도. 그게 맞겠지?”

그 말에 엔디미온은 만족했다. 그는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고 좀도둑은 어어 소리를 내며 말했다.

“잠깐만. 혹시 비로크의 주먹에게 덤빌 생각은 아니지?”

“내 걱정해주는 거냐.”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 진짜로? 아니지? 수백 명이라니까? 당신이 강한 건 알겠는데 그 녀석들 상대하려면 군대를 데려와야 한다고.”

좀도둑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혼자서 다섯 명을 제압하는 엔디미온의 실력을 인정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특등기사나 그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악마사냥꾼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반드시라는 것은 없었다. 기습을 당하거나 물량 공세에 밀려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필요 없어.”

하지만 엔디미온은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창고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천천히 문을 열자 달빛이 창고 안쪽으로 들어왔다. 좀도둑은 그 순간 엔디미온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입술을 움직여 목소리를 내는 그의 얼굴을.

“내가 군대야.”

그 말과 함께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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