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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전에 비해 악마들의 세력이 약해졌다고 해도 그들의 하수인인 악마숭배자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힘을 탐하는 법이고 어려운 길보다는 쉬운 길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악마들이 완전히 멸종하지 않았으니 그들의 하수인이 되기를 자청하고 그 대가로 하잘 것 없는 힘을 받는 자들이 많았다.
악마숭배자들은 같은 악마를 주인으로 모시더라도 개별적으로 활동했다. 자매였던 올리비아와 신디아가 똑같이 뷔브르를 섬기면서도 각자 행동했던 것처럼 말이다. 라가르디오를 섬기던 악마숭배자들은 그림자 수도회란 집단을 이루기도 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공동의 목적을 가진 악마숭배자들의 집합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단체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 협곡에 모여 있는 강도들이 실은 악마숭배자란 것은 몹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악마에게 더 많은 힘을 받으려면 더 많은 제물을 바쳐야 하고 그것은 곧 다른 악마숭배자들과의 경쟁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들끼리 연합하여 강도질을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너희는 누구냐?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난리를 치는 게야?”
터번을 쓰고 시미터를 든 남자는 가무잡잡한 얼굴의 중년이었다. 그는 남부의 강렬한 햇살에 의해 알맞게 색이 입혀진 얼굴을 실룩거렸다. 악마숭배자들이 악마의 힘을 이용해 나이를 속일 수 있음에도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그의 취향일 것이다. 어쩌면 다른 악마숭배자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남자가 남들에게 많은 신뢰를 얻고 가장 강력한 권력을 발휘하는 것은 중년일 때니까.
“네가 대장이냐?”
남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아닌데.”
“그럼 대장 데리고 와.”
“건방진 것.”
남자의 얼굴이 사납게 변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시미터를 한 바퀴 회전시킨 후에 그 끝으로 엔디미온을 겨누며 말했다.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까부는 거냐! 나는 황야의 전사이자 두려움을 모르는 늑대다! 홀로 일곱 전사와 싸워 이겼으며 여섯 기사와 맞붙어 여섯 번 승리한 위대한 전사, 그 이름은······.”
휘리릭! 무언가 재빠르게 날아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말이 멈추었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고개가 뒤로 크게 젖혀졌고 억 소리가 났다. 엔디미온은 손으로 돌멩이를 던졌다가 받기를 반복하며 말했다.
“대장 데리고 오라고.”
“······살레리오다. 이 괘씸한 것. 감히 전사가 자기 이름을 소개하는데 공격을 해? 이 빌어먹을 놈이!”
어째서인지 머리에 돌멩이를 맞고 구멍이 뚫렸던 살레리오가 멀쩡히 입을 열었다. 그는 이마에 난 구멍에서 흐르는 뜨끈한 액체를 손등으로 훔친 후에 눈을 부릅떴다.
“뭐냐. 왜 안 뒈져?”
“하하하! 멍청한 놈! 황야의 전사라 불리는 이 살레리오가 그깟 돌멩이에 맞았다고 죽을 리가······.”
쐐애액!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살레리오의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그는 제대로 된 싸움을 한 번 해보기도 전에 심장을 관통당해 쓰러졌다.
“씨발······. 말, 좀, 하자······고. 커윽······.”
살레리오를 향해 돌멩이를 던졌던 나엘라티나가 엔디미온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에는 잘했지?”
“그래. 처음으로 도움이 됐군.”
나엘라티나가 킥킥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엔디미온은 강도들을 향해 말했다.
“기회를 주겠다. 대장을 데리고 와라. 나는 전능자의 뜻을 따르는 종이고 저항하지 않는 자들까지 해치지는 않겠다. 내 목적은 오직 비로크의 주먹을 이끄는 대장을 처치하는 것이다. 목숨이 아깝다면 공연한 저항은 그만 두어라. 이것은 회유인 동시에 경고다.”
강도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그들의 부장인 살레리오가 제대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것도 돌멩이에 맞아서. 강도들 역시 악마숭배자들이지만 살레리오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이 바로 항복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수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싸움을 하면 분명히 사상자가 나온다. 엔디미온과 나엘라티나의 무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무력도 압도적인 수의 차이에서는 무력화되는 법이다. 그들은 진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싸움을 했을 때 발생하는 사상자가 자신일 것을 걱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오······. 힘의 차이가 명백하거늘 아까운 목숨을 버리려 하다니 말이오. 하기는 명석한 자들이라면 악마의 힘에 손을 대지도 않았겠지.”
성검 에투알이 쯧쯧 혀를 찼다. 엔디미온은 슬금슬금 다가오는 강도들을 보며 입술을 비뚜름하게 기울였다.
“그게 너희들의 선택이냐.”
그럼 대가를 치러야지. 엔디미온이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그가 검을 크게 휘두르자 강도 세 명의 머리가 한꺼번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다음 공격은 강도 둘의 가슴을 베었으며 이어진 공격은 강도 하나의 허리를 끊었다. 엔디미온이 움직일 때마다 강도들의 몸이 잘려나갔다.
성검은 마치 종이를 자르는 것처럼 거침없이 강도들의 육신을 참했다. 엔디미온은 양떼를 습격한 늑대와 같았다. 강도들은 그들의 한가운데로 들어온 엔디미온을 향해서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으나 그것은 단 하나의 상처도 내지 못했다.
성배기사의 육체는 괴물 같은 힘을 발휘했고 강도들을 학살했다. 검으로 뼈를 자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뼈는 생각보다 단단하니까. 하지만 성검 에투알의 날카로움과 성배기사의 괴력이 더해진 일격은 뼈를 가볍게 잘라냈다.
강도 하나의 몸이 세로로 길게 잘렸다. 사람이 반으로 갈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방금 알게 된 강도들은 엔디미온을 보고서 두려움에 떨었다. 저것은 인간이 아니라 도살자다.
“어딜 도망가는 거냐.”
상대가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엔디미온도 이만큼 참혹하게 적들을 학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악마숭배자들이었다. 세상의 모든 사악한 것들을 몰아내기로 맹세한 그였기에 이들을 살려두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엔디미온은 도망치는 강도들을 보면서 잠깐 숨을 골랐다. 나엘라티나는 새빨간 색으로 물든 그를 보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는 성배기사가 백 년 전에 얼마나 많은 악마들을 죽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엘라티나.”
“어, 어어, 응?”
“난 도망친 놈들을 쫓아서 안으로 들어간다.”
“어어, 그래, 힘내! 나도 같이 갈까?”
“너는 여기서 혹시나 이 협곡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놈들을 해치워라.”
“해치우라는 건 죽이라는 소리지?”
엔디미온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엘라티나가 씩 웃었다.
“맡겨만 두라고. 내가 잘하는 일이야.”
엔디미온은 나엘라티나의 두 눈에 가학의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지만 무시했다. 그는 협곡 곳곳에 난 굴들을 쳐다보았다. 아래쪽에도 굴이 있었지만 그쪽은 강도들이 도망치면서 바위로 막아버렸다. 주먹으로 부술 수도 있었지만 그는 2층의 굴을 통해 들어가기로 했다.
성큼성큼 벽 쪽으로 걸어서 툭 튀어나온 부분들을 붙잡고 등반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2층까지 올라온 엔디미온은 사색이 된 채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강도들의 목을 베었다.
“도망쳐! 부장들을 불러! 우리는 상대할 수 없어!”
부장이란 놈들이 와도 별 수 없을 텐데. 살레리오는 제대로 된 싸움도 해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부장들 중에서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지만 다른 놈들도 별 다를 것 없을 듯 했다. 엔디미온은 토끼굴을 헤집는 여우처럼 굴 안쪽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복도를 걷다가 마주치는 강도들을 모두 단칼에 베어죽이고 때로는 뒤에서 기습한 놈들의 머리를 주먹으로 부수기도 했다.
협곡은 바깥에서 볼 때 3층까지 굴이 있었다. 엔디미온은 2층을 돌아다니며 강도들을 죽였다. 하지만 그의 일차적인 목적은 비로크의 주먹을 이끄는 대장을 죽이는 것이었으므로 3층으로 올라가는 것에 주력했다.
“이놈! 나는 석양을 베는 검이자 위대한 전사 요루의 아들, 요루에니다! 덤벼라!”
길을 가다보면 가끔씩 부장이란 놈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실력은 강도들보다 나아서 엔디미온과 검을 몇 번 나눌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검을 몇 번 부딪치고 나면 어느새 몸이 반으로 잘려있거나 머리가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몇 합을 나누기는 했으니 살레리오보다는 나았다.
“나는 언덕 아래의 전사, 할리가······.”
“내 이름은 토루스다. 네게 결투를 신청······.”
“덤벼라, 괴력의 투사인 이 내가 상대······.”
부장이란 놈들의 우스운 점은 자기들이 기사라도 되는 것마냥 엔디미온을 만날 때마다 거창한 자기소개를 하며 덤벼들었다는 것이다. 악마숭배자 새끼들이 기사 흉내는. 엔디미온은 죽은 부장의 시체에 침을 뱉었다. 성배기사로서 악마숭배자들의 기사 흉내는 참아주기 힘든 개짓거리였다.
“대충 다 정리한 것 같고. 대장이란 놈은 어디 박혀서 안 나오는 거야?”
엔디미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2층에서부터 3층까지 올라오면서 수많은 강도들을 베었다. 부장들도 몇 명이나 죽였다. 그럼에도 대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만한 소란이 벌어졌으면 모습을 한 번 드러낼 법도 한데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에투알, 네 힘으로 찾아낼 수는 없나?”
“으음, 이 공간에 너무나 많은 악마숭배자들이 있어서 찾아내기가 쉽지 않소. 모두 같은 악마로부터 나온 힘이라 누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가 없소.”
그럼 직접 찾아야지.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굴 안쪽에는 강도들이 머무는 방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는 그것들을 하나씩 열어보면서 다녔다. 문을 열 개쯤 열었을 때 그는 문득 생각난 것을 말했다.
“혹시 진작 도망쳤나?”
“그럴 가능성도 있을 거요. 그 용에게 입구를 지키라고 했지만 우리가 모르는 비밀통로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곤란하군.”
엔디미온이 흐음 소리를 내며 열한 번째 문을 열었을 때였다.
“이 방은 뭐지?”
방의 분위기가 달랐다. 지금까지 보았던 방들은 강도들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감이 느껴졌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빛이 하나도 없었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엔디미온은 반사적으로 그 안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방 안에는 어둠이 가득 했지만 성배기사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서 더욱 안쪽으로 들어갔다. 방은 생각한 것보다 더 컸다. 주변에 가구나 짐 같은 것들이 아무것도 없어서 더욱 크게 느껴졌다.
엔디미온은 방 안에서 느껴지는 악취에 얼굴을 찡그렸다. 무언가 썩고 있는 듯한 냄새. 더 자세히 냄새를 맡아보니 좀 더 복합적인 냄새였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사악한 기운.
“설마······.”
방의 가장 구석에서 엔디미온은 거대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비대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고 툭 튀어나온 말단 부분이 무언가에 의해 상처를 입은 듯 잘려나갔고 그 부분에는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게 쇠사슬로 고정돼 있었고 사지는 없었다. 그리고 두 눈은 안대 같은 것으로 가려져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점이었다.
이 기괴한 생명체가 무엇인지 엔디미온은 단박에 알아보았다. 이것은 악마다. 마치 사육당하는 짐승처럼 악마는 거칠게 호흡을 반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