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58화 (15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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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군.”

엔디미온은 바닥에 쓰러진 악마 알데리히를 보며 성검에 묻은 오물을 털어냈다. 새로운 힘을 얻어 완전해졌다고 설치던 그였지만 성배기사가 진심을 담아 검을 휘두르자 일격에 쓰러지고 말았다. 강도단 따위에게 붙잡힐 만큼 저급한 악마의 힘을 흡수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 있는 것이 알데리히가 아니라 진짜 악마였다고 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때로는 사람이 악마보다 더 잔인한 법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번 일은 정말 놀랍군.”

“동감이오. 설마 강도단이 악마를 붙잡아서 그 힘을 착취하고 있었을 줄이야.”

성검 에투알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만약 엔디미온이 비로크의 주먹을 박살내지 않았다면 그들은 더 큰 위협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언젠가 알데리히는 악마의 힘을 완전히 흡수했을 것이고 그 힘을 바탕으로 세력을 크게 늘려서 비로크를 침공했으리라.

사람이 악마가 되어 사람을 공격한다는 일 자체가 너무나 끔찍했다. 에투알은 설마 이번과 같은 일이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 만약 어디선가 같은 일이 또 벌어지고 있다면 그들이 막아야 했다.

“이만 나가지.”

세상은 왜 아직까지도 혼란스러운 것일까. 백 년 전 대악마를 죽이고 그 힘을 봉인했음에도 세상에는 아직 그의 자손들이 남아서 활개를 치고 있었다. 또한 한 명의 영웅이 타락했으며 일부 사람들도 전능자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악마의 힘을 받아들였다.

달라진 것이 없는 세상을 보면서 엔디미온은 약간의 회의감을 느꼈다. 본래 그는 그런 감정에 익숙하지 않지만 그게 어떤 맛인지는 알았다. 저무는 해를 보며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켰을 때의 감각. 씁쓸하다.

“잔챙이들은 어쩌겠소?”

“죽여야지.”

엔디미온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본래부터 사악한 존재에 대한 자비가 없는 그였다. 사람이길 거부하고 악마의 힘을 받아들인 존재들에게 내려줄 자비 따위는 없었다.

“야야, 얼른 도망쳐!”

“아니, 그래도 돈은 챙겨가야지!”

엔디미온과 나엘라티나의 습격을 받은 강도들은 각기 다른 선택을 했다. 맞서 싸우거나 혹은 도망치거나. 엔디미온은 당장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서도 재물을 탐내는 강도들을 발견했다.

“헉! 그 녀석이다! 그 녀석이 나타났······.”

쾅! 금화를 가득 담은 주머니를 들고 도망치던 강도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는 엔디미온의 손에 머리를 붙잡혔고 그대로 벽과 충돌했다. 으깨진 머리에서 질척한 것들이 쏟아졌다. 그 모습을 본 강도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으나 금세 엔디미온에게 따라잡혔다.

징벌자는 공정함의 화신이었다. 어떤 적을 만나도 모두 똑같은 벌을 내렸다. 연신 벽이 쿵쿵 소리를 내며 떨렸다. 쿵 소리가 한 번 날 때마다 머리를 잃은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고 엔디미온은 전진했다.

그는 3층에서 1층까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청소라도 하는 것처럼 꼼꼼하게 주변을 확인했다. 도망치는 자들도 있었고 맞서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차이는 없었다. 결과는 모두 같았으니까.

“나엘라티나.”

바깥으로 나온 엔디미온은 나엘라티나를 불렀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시체의 머리를 발로 차면서 과녁 맞추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목이 없는 시체들이 수십 개나 있으니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광경이었다. 아무리 나엘라티나가 약하다고 해도 용은 용이었다. 악마숭배자들 따위가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벌써 끝낸 거야? 잠시만, 이것만 좀 차고. 웃차!”

나엘라티나가 마지막 시체의 머리를 차서 협곡의 벽에 그려진 과녁을 향해 날렸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머리는 벽에 부딪쳐 뭉개졌다.

“자, 이제 다 끝났어.”

“······.”

악마숭배자들의 머리를 발로 차는 것을 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나엘라티나가 용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본질은 용이다. 그들은 사람과 생각하는 것이 달랐다. 엔디미온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돌아가자.”

“그럼 이 시체들은 어쩔까? 내 불꽃으로 다 태워버릴 수 있어. 명령만 해, 대장!”

내가 왜 네 대장이냐. 엔디미온은 콧방귀를 뀌며 나엘라티나를 쳐다보았다.

“왜, 왜······? 왜 쳐다보는데?”

“네 불꽃을 믿을 바에는 내 신성력으로 정화하는 게 더 낫겠다.”

“아니, 아니, 그건, 크흠.”

솔직히 여기서 변명하는 것은 너무 추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나엘라티나의 불꽃은 아무것도 태우지 못한 불살의 불꽃이었으니까.

“시체들은 그냥 둬. 비로크의 주먹이 궤멸됐다는 걸 사람들이 믿으려면 증거가 있어야 하니까. 시체는 나중에 근처의 대교구에 연락해서 처리하라고 하면 돼.”

“알겠어. 그럼 돌아갈 준비할까?”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협곡 바깥으로 나갔다. 나엘라티나는 황무지 위에서 변신했고 곧 거대한 용으로 변모했다.

“그런데 재물들은 좀 아깝네.”

나엘라티나가 날갯짓을 하며 말했다.

“저 녀석들 엄청 많이 모아둔 것 같던데.”

“탐나냐.”

용들의 취미는 조용한 동굴 안에 은거하면서 재물을 모으는 것이다. 그 습성은 대악마에게 세뇌됐을 때도 사라지지 않아서 재물을 탐내다가 영웅들에게 목숨을 잃은 용들도 많았다.

“솔직히 탐이 안 난다고 하면 거짓말이잖아? 이건 내가 용이라서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거라고.”

엔디미온은 흠 소리를 냈다. 아마 베로니카도 같은 소리를 했을 것이다. 비로크의 주먹은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을 것이고 이제 주인 잃은 재물들을 그냥 두고 간다는 것은 참 아까운 일이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저런 부정한 재물에 관심이 없었다.

“그냥 둬.”

“아까운데······.”

나엘라티나는 쩝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그녀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하늘 위를 질주했다.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일부러 도시에서 좀 떨어진 곳에 내려서 걸었다. 엔디미온은 나엘라티나가 참 유용한 탈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떤 말이 며칠은 걸릴 거리를 몇 시간 만에 가겠는가.

“이참에 출발했는데 돌아오니까 저녁이네.”

새빨간 노을을 보면서 나엘라티나가 웃었다. 엔디미온은 그녀의 웃음을 무시하며 성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바로 여관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을 향했다. 그가 가려는 곳은 비로크의 신전이었다.

위치는 성문을 통과하면서 경비병에게 물어보았다. 두 사람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한적한 곳에 위치한 신전을 발견했다. 라티에티의 신전만큼 극단적으로 초라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다른 곳의 신전들보다는 검소했다.

엔디미온은 문고리를 잡고 문을 몇 번 두드렸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다시 한 번 똑똑똑.

“아, 거참 대답 안 하면 대충 영업 끝난 줄 알고 돌아갈 것이지······.”

몇 번 더 두드린 후에야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뚱뚱한 남자 사제였다. 그는 방금까지 자다 일어난 것인지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고 몸에서는 약하게 술냄새가 났다. 나이는 이제 서른을 좀 넘었을까. 나엘라티나는 한심한 꼴을 한 사제를 보고서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그의 불량한 태도를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보고할 것이 있어서 왔소. 잠깐 시간 좀 내주시오.”

“보고할 것? 당신은 누구인데 보고를 하겠다는 거요? 꼴 보니까 악마사냥꾼이신가? 무슨 일 때문에 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오늘 영업 끝났으니까 내일 오쇼.”

“이봐요! 우리가 무슨 일 때문에 온 건지도 모르면서······.”

귀찮은 벌레를 내쫓듯 손을 홰홰 저는 모습을 보고서 나엘라티나가 발끈했다. 하지만 엔디미온이 손을 뻗어서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사제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왜, 왜 이러쇼?”

가까이서 본 엔디미온은 생각한 것보다 더 컸다. 사제는 엔디미온의 덩치를 보고서 겁을 먹은 듯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럼 엔디미온은 전진했고 사제는 또 물러났다. 그런 식으로 그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고서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나엘라티나는 얼른 뒤를 따랐고 문을 닫았다.

졸지에 신전 안에 갇힌 꼴이 된 사제는 영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식은땀을 흘렸다.

“자, 잠깐,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당신 지금 실수하는 거야? 응? 나 사제라고. 나 건드리면 어? 서, 성기사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어? 당신 뭐야! 어? 누군데 이런 식으로 자꾸 사람 겁주면서 협박하느냐고!”

엔디미온은 자신에게 삿대질을 하는 사제를 보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능자의 종이자 번뜩이는 칼날이며 빛나는 징벌자다. 너는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 순간 방 안이 환해졌다. 은은한 빛이 사제의 두 눈으로 흘러들었으며 따스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사제는 신전 안이 바뀌었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오직 엔디미온의 존재감이 그의 오감에 작용하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게끔 하였다. 그것은 남을 어지럽게 하는 현혹이었으나 전능자의 의지였기에 탈 없는 신기루였다.

“나는 황금장미 기사수도회의 성기사인 엔디미온이다. 너는 내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물었다. 답해주마. 나는 전능자의 종이자 빛나는 징벌자로서 내 의무를 행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전능자의 은을 입은 자들이니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사제야, 네 의무가 무엇이냐?”

“저, 저, 저, 저는······. 제 의무는 그러니까······.”

사제는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그는 어느새 바닥에 머리를 납작 붙인 채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사제가 성기사에게 고개를 조아려야 할 이유는 없다. 아무리 이름난 황금장미 기사수도회의 성기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부복한 상태였다. 마치 전능자의 화신이라도 직접 본 것처럼.

“배, 배, 배를 곯는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목이 마른 자에게는 마실 것을 주며 추위에 떠는 자에게는 횃불을 내주는 것이 제 의무입니다. 또, 또한 이 땅에 전능자의 말씀을 널리 알리고 사악한 것들을 몰아내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제 의무입니다······.”

“너는 네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비로크에서 가장 가까운 대교구가 어디에 있느냐?”

“하센 대교구입니다······.”

라티에티에서 아이딘 사제가 말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곳으로 연락을 보내라. 비로크 주변의 협곡에서 활동하던 강도단을 처리했다고. 또한 그들은 악마를 결박하여 사악한 힘을 착취하고 있었다고.”

“강도단이라면 비로크의 주먹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그들이 악마의 힘을 착취하고 있었다고요?”

“그래. 그들의 대장인 알데리히는 악마의 힘을 흡수해 새로운 악마가 됐으나 내 손에 죽었다. 수백 명의 악마숭배자들이 협곡 안에 죽어있으니 그들의 힘이 토지를 오염시키기 전에 처리해야 할 것이다. 나태한 사제야. 하나만 기억해라. 의무를 잊은 것보다 의무를 알고 있으면서 행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죄다.”

그것은 나직한 협박이었다. 사제는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굽실거렸다. 엔디미온은 이제 사제에게 용건이 없었다. 그는 조용히 신전을 떠났고 사제는 문이 닫힐 때까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제 돌아가자. 뒷처리는 성기사들이 알아서 하겠지.”

엔디미온은 여관을 향해서 성큼성큼 걸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엘라티나가 이죽댔다.

“오, 멋있는 척.”

“맞을래?”

“아니요, 죄송합니다!”

두 사람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면서 여관까지 걸었다. 그리고 엔디미온이 여관의 문을 열었을 때.

“엔디미온 씨! 큰일이에요!”

베로니카가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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