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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59화 (159/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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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라고?”

엔디미온은 얼굴을 찡그렸다. 한나절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또 무슨 일이냐?”

베로니카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엔디미온의 손을 잡아당겼다. 몹시 다급한 모양새였기 때문에 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곧장 따라갔다. 베로니카가 향한 곳은 그들이 머물던 방이었다.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던 중에 뒤따라오던 나엘라티나가 엑 소리를 냈다.

“뭐야, 이 녀석들은?”

방 안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것은 상처 입은 자의 냄새였다. 바닥에는 금발의 요정 남자가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고 침대 위에는 거구의 흑인 남자가 눈을 감고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크게 다친 상태였다. 너덜너덜한 옷 너머로 딱지가 굳은 상처가 보였고 그들이 몸을 조금 움직일 때마다 딱지들이 바스스 바닥으로 떨어졌다.

얼굴은 해쓱했으며 몸은 지쳐있었다. 전쟁에서 지고 돌아온 병사들의 모습이었다. 나엘라티나는 얼른 방문을 닫았다. 그 소리에 금발의 요정이 고개를 들었다.

“아, 이제 돌아왔나. 기다렸다고, 엔디미온.”

“라우렌시오······.”

방 안에 있는 금발 요정은 라우렌시오였다. 그리고 침대 위의 흑인은 비다르였고. 엔디미온은 미간을 좁혔다. 아르고디아를 토벌하기 위해 보냈던 그들이 왜 만신창이가 돼서 돌아왔을까. 아르고디아는 까다로운 상대지만 영웅 두 명이서 당해내지 못할 만큼 강력한 적은 아니었다.

약간의 상처를 입을 수는 있었도 이런 꼴이 될 이유는 없었다.

“세상에! 라우렌시오! 비다르! 꼴이 이게 뭐요!”

성검 에투알은 두 영웅의 꼴을 보고서 깜짝 놀라서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녀를 보고서 나엘라티나가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성수! 성수를 주시오!”

성수는 성배가 가진 힘의 정수이고 전능자의 은총이니 세상 모든 병과 상처를 낫게 할 수 있었다. 엔디미온은 얼른 허리춤의 수통을 주었고 에투알은 그것을 라우렌시오와 비다르에게 마시게 했다. 성수의 힘으로 그들의 상처가 빠르게 회복됐다. 하지만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 아주 강력하고 사악한 기운이 상처의 회복을 방해하고 있었다.

라우렌시오는 희미하게 남은 흉터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고약한 저주로군. 성수의 힘으로도 완전히 낫지 않는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꼴은 그게 뭐고. 설마 아르고디아에게 당한 거냐?”

엔디미온의 질문에 라우렌시오가 쓰게 웃었다.

“아무리. 아르고디아 따위에게 당할 만큼 우리는 약하지 않아. 나 혼자서도 충분히 이겼을 거다.”

“그럼?”

“바이올렛이야.”

순간 나엘라티나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녀는 용들을 죽이고 다니는 바이올렛을 증오했다. 복수를 위해서 엔디미온에게 협력하고 있으니 바이올렛의 이름에 민감하게 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이올렛이라고? 그 빌어먹을 년은 어디에 있어?”

나엘라티나가 험악한 얼굴을 들이미는 탓에 라우렌시오의 얼굴도 구겨졌다.

“뭐야, 이 냄새나는 놈은? 구린내가 나는 걸 보니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엔디미온에게 붙잡힌 악마숭배자냐?”

“뭐? 냄새나는 놈? 나 냄새 안 나! 무슨 헛소리야!”

“어쨌거나 사악한 존재와는 할 이야기 없다. 썩 꺼져.”

두 사람이 다투기 시작하자 엔디미온이 말했다.

“용이다.”

“뭐?”

“용이라고.”

라우렌시오가 미간을 좁혔다.

“용이라면 백 년 전에 바이올렛이 다 죽인 거 아니었냐.”

“다 죽은 건 아닌 모양이더라고. 지금도 소수의 용이 생존 중인 모양이야. 이 녀석도 그들 중 하나고.”

“그런데 왜 너랑 같이 다니지?”

“바이올렛이 요즘 남아있는 용들을 죽이고 다닌다더라. 이 녀석은 친구들의 복수를 위해서 나에게 협력 중이야. 탈것으로 아주 쓸 만해.”

“탈것? 용을 타고 다닌다고?”

“그래. 생각 이상으로 쓸 만하다고.”

라우렌시오는 용을 타고 날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했다. 대악마의 수하인 용을 타고 다닌다니. 백 년 전이라면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아니, 그 문제는 일단 넘어가고. 중요한 건 바이올렛이야. 우리의 생각대로 대악마의 적자들을 죽이고 다니니 바이올렛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더군.”

“아르고디아를 죽이고 나서 바이올렛의 습격을 받은 거냐?”

“그래.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가 이길 줄 알았어. 우리는 둘이고 바이올렛은 하나니까. 영웅들의 강함은 서로 비등비등해. 너를 제외하면 누가 더 우위에 있다고 할 만큼 유의미한 실력 차이는 없지. 그러니 숫자에서 우위에 있는 우리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더라고. 싸움을 해보니까 아니었어.”

라우렌시오의 얼굴은 심각했다. 그녀는 바이올렛의 실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백 년 전 가장 가까이에서 그 실력을 볼 수 있었으니까. 백 년 후인 지금은 타락하여 사악한 힘을 받아들였다고 해도 수적 우위를 이용해서 승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졌다. 강철 주먹의 바다르와 요정기사 라우렌시오가 룽고르의 마법사왕에게 진 것이다.

“바이올렛은 강해. 마법사왕이라는 오만한 별명은 그냥 붙은 게 아니었어. 우리 둘을 상대로 승리할 정도니 백 년 전보다 몇 배는 더 강해졌겠지.”

“쳇, 그거 내가 붙기만 했으면 이기는 건데 바이올렛이 비겁하게 멀리서 마법만 날려서 진 거라고.”

비다르가 툴툴댔다. 그는 성수의 힘 덕분에 일부 회복된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움직일 때마다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기는 해도 그런데로 잘 움직였다.

“흠, 솔직히 말해서 비다르가 아니라 라이오넬이 있었으면 이겼을지도 모르지. 이 녀석은 주먹질 말고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야!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하냐? 그리고 주먹질 하나만 다 때려눕힐 수 있는데 다른 걸 왜 배워?”

“······난 네가 왜 영웅으로 뽑혔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비다르와 라우렌시오가 말싸움을 하는 사이에 엔디미온은 미간을 좁혔다. 바이올렛이 타락하여 더욱 강해진 것도 문제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녀의 뒤에 있는 존재다. 타리샤는 마법사왕조차 수많은 가지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럼 몸통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강할까.

라우렌시오는 시끄럽게 큰 목소리를 내는 비다르를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물론 우리가 무력하게 당하기만 한 건 아니야. 우리도 충분히 바이올렛에게 타격을 주었으니까. 그 덕분에 도망칠 수 있었지. 상처를 입은 비다르를 데리고 점멸 마법으로 도망쳤어.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으니 몇 번이나 반복해야했지. 다행히도 바이올렛은 쫓아오지 않았고 마법으로 말을 만들어서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쉬지도 않고 달려왔는데 설마 너희들이 먼저 도착했을 줄은 몰랐다.”

사실 놀란 것은 엔디미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용을 타고 날아왔지만 라우렌시오와 비다르는 말을 타고 달려왔다. 내일이나 모레쯤에 도착할 줄 알았는데 벌써 도착한 것은 꽤 놀라운 일이었다. 아마 마법의 힘이겠지.

엔디미온은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라우렌시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바이올렛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위협적인 적이······.”

“아니, 바이올렛을 말하는 게 아니야.”

“바이올렛 이야기가 아니라고? 그러면?”

라우렌시오는 긴장했다. 엔디미온은 그에게 타리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의 뒤에 아주 강력한 존재가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마법사왕조차 그 존재의 하수인일 뿐이란 이야기. 이야기를 전부 들은 라우렌시오는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게 사실이야? 바이올렛의 뒤에 또 누군가가 있다고?”

“뭐야, 바이올렛만 죽이면 되는 거 아니었어? 또 뭐가 있어?”

비다르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타리샤의 말로는 암흑의 여왕이 온다고 하더군.”

라우렌시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둠의 여왕? 그게 누구지?”

“여왕이라고 한 걸 보니까 대악마가 부활하는 건 아니네. 그 자식 남자잖아.”

“이봐, 비다르. 악마에게 성별은 없어.”

“아니, 어쨌거나 그 녀석이 여자인 건 아니잖아?”

“그건 맞지.”

라우렌시오와 비다르는 저들끼리 어둠의 여왕에 대해서 추측해보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정답을 찾지는 못했다. 어둠의 여왕이라.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대악마의 적자가 충성한단 말인가.

“설마 호수의 여왕은 아니겠지? 바이올렛처럼 타락했다거나.”

“비다르! 그게 무슨 망발이오! 내 어머니를 모욕할 셈이오? 당장 사과하시오!”

비다르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에투알이 발끈했다. 그녀는 당장 검으로 변해서 비다르의 입을 찌를 듯한 기세였다. 때문에 비다르는 식은땀을 뻘벌 흘리며 손을 내저어야 했다.

“미안, 미안! 아니, 그냥 여왕이라고 하니까 무심코 나온 말이야. 네 어머니를 모욕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흥! 비다르! 내가 그 입을 잘라버리지 않은 것은 아직 영웅으로서 해야 할 의무가 남아있기 때문이오! 입조심 하시오!”

“아, 물론이지. 알고 있어.”

비다르가 후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엔디미온이 말했다.

“호수의 여왕이 타락했다면 그녀의 일부인 성검 역시 타락했을 것이다. 그리고 성배의 힘에도 영향이 갔겠지. 호수의 여왕은 아마 아닐 거다.”

에투알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 당연한 일이오! 내 어머니가 타락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 성검의 모습으로 돌아가, 에투알. 방 좁아.”

네 명이서도 좁았던 방에 사람 세 명이 늘어나니 확실히 더욱 좁아졌다. 에투알은 불만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성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바이올렛이다. 그녀는 용들을 죽이며 그들의 시체로 사악한 술수를 꾸미고 있으며 마을과 성을 습격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 또한 어둠의 여왕이라는 존재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도 그녀를 찾아내야 한다. 이제는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 다시 한 번 세상에 백 년 전과 같은 어둠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백 년 전의 어둠. 그 말에 라우렌시오와 비다르가 몸을 움찔했다. 그들은 그때의 싸움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둠의 여왕이란 자가 어떤 존재인지는 몰라도 대악마만큼이나 세상에 위협이 될 것이다.

어둠의 세력이 성장하기 전에 그 싹을 뽑아야 했다. 엔디미온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끼리 바이올렛을 찾는 것은 무리가 있다. 성기사들의 도움을 받아야겠지. 에스메렐다에게 연락해서 성기사들을 차출하도록 하겠다.”

하루라도 빨리 바이올렛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에스메렐다가 이끄는 황금장미 기사수도회, 에우레킬슨이 이끄는 가시왕관 기사수도회, 그림발드가 이끄는 망치와 정 기사수도회, 율리아가 이끄는 철십자 기사수도회, 그리고 비아네가 이끄는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까지.

엔디미온을 도와줄 자들은 많았다. 그들이 바이올렛의 거처를 찾아준다면 엔디미온이 끝장을 내면 될 일이었다.

“아니, 그럴 것 없어.”

하지만 라우렌시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고 있는 엔디미온을 향해 말했다.

“바이올렛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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