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60화 (160/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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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렛의 위치를 알아냈다고? 그게 어디야? 어디냐고!”

나엘라티나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같은 기세였다. 베로니카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힘에서 역부족이었다. 성큼성큼 걸어온 나엘라티나는 라우렌시오의 멱살을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라우렌시오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비틀었다.

“아얏!”

“건방지게 굴지 마라, 도마뱀 놈아.”

“아니, 그래서 바이올렛이 어디 있냐고!”

분노로 이글거리는 두 눈을 본 라우렌시오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룽고르다.”

“룽고르?”

엔디미온이 흐음 소리를 냈다. 룽고르는 바이올렛의 고향이자 그녀가 멸망시킨 도시의 이름이었다. 스스로 룽고르의 마법사왕이라고 자칭하고 다니더니 설마 그런 곳에 있었을 줄이야.

“그런데 라우렌시오. 그녀가 룽고르에 있다는 걸 무슨 수로 알아낸 거냐?”

“바이올렛이 도망치는 우리를 향해서 외치더군. 자신은 룽고르에 있을 것이니 찾아오라고. 이 싸움의 끝을 보자고.”

“너희를 굳이 쫓지 않은 것은 내게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군.”

바이올렛의 목적이 무엇일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어도 성배를 노린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성배의 힘은 성배기사를 지상에 강림한 전능자의 화신으로 만들었다. 바이올렛은 이 힘을 타락시켜 새로운 대악마가 되거나 아니면 자신이 모시는 주인에게 바쳐 어둠의 여왕이 더 강력한 존재가 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바이올렛도 언제까지고 싸움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었다. 목적이 있다면 그걸 이루기 위한 과정도 있어야 한다. 룽고르의 마법사왕은 이제 성배기사와 싸울 준비가 되었다.

“너희 둘을 모두 살려보낸 걸 보면 어지간히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

단순히 말을 전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라우렌시오와 비다르 중 한 명만 살려보내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바이올렛은 둘 다 살려보냈다. 영웅 한 명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 잘 알면서도 굳이 적의 숫자를 줄여두려고 하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바이올렛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다. 타락하면서 더 강해졌다는 것도 알았고. 하지만 그래봤자 주문쟁이일 뿐이다. 네 명의 영웅이 함께 덤비면 바이올렛도 버틸 재간이 없을 것이다.

“룽고르라면 여기서 제법 멀군. 나엘라티나를 타고 간다고 해도 며칠은 걸릴 거야. 오늘은 쉬고 내일 출발하지.”

룽고르는 왕국 북부의 도시였다. 남부의 도시인 비로크에서 룽고르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 지금 당장 출발해야 했지만 라우렌시오와 비다르가 다친 상태였기 때문에 출발은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미안하다, 엔디미온. 아마 우리는 바이올렛과의 싸움에서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야. 아직 그녀의 마법 때문에 생긴 저주의 힘이 남아있어. 악마들 정도는 처리할 수 있지만 바이올렛을 상대하는 건 무리다.”

바이올렛의 마법은 라우렌시오와 비다르의 몸에 저주를 남겼다. 성수의 힘 덕분에 상처는 나았지만 저주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본연의 힘을 완벽하게 낼 수 없었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혼자서도 충분해. 너희 둘은 오늘 휴식하도록 해라. 내일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엔디미온은 라우렌시오와 비다르를 위해서 여관의 방을 새로 잡아주었다. 두 사람은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지쳤는지 금세 잠들었다. 엔디미온 일행도 저녁 식사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내일부터는 또 새로운 싸움을 해야 했다.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더 지독한 싸움을.

“모두 일어났나?”

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찾아왔다. 엔디미온 일행은 짐을 정리한 후에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했다. 베로니카는 며칠 동안 먹을 식량을 구입했고 가방에 가득 담았다.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보급을 한 후에 성문으로 향했다.

엔디미온 일행은 성문을 지나서 북쪽으로 걸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나엘라티나가 변신할 수 있는 공터였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부는 어느 공터 위에서 엔디미온 일행은 나엘라티나만 남겨두고 멀찍이 떨어졌다. 괜히 곁에서 얼쩡거리다가 변신하는데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저거 진짜 용 맞아?”

비다르는 변신을 준비하는 나엘라티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영웅들 중 유일하게 단 한 마리의 용도 죽이지 못했는데 그것은 할 줄 아는 게 주먹질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진짜 용 맞아요. 그것도 엄청 커요!”

베로니카가 정말 크다는 듯 두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 사이에 나엘라티나가 사방에 빛을 뿌리며 용으로 변신했다. 빛이 걷히고 갑작스럽게 엄청난 크기의 용이 나타나자 비다르가 주춤했다.

“진짜 용이네······. 이걸 타고 간다고?”

“용을 타는 건 나도 처음이야. 대단하군. 용이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겠어.”

라우렌시오도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나엘라티나는 그들이 감탄하는 모습에 우쭐하며 꼬리를 아래로 내렸다.

“자, 얼른 올라오라고! 출발해야지!”

사람들은 나엘라티나의 꼬리를 타고서 등 위로 올라왔다. 베로니카는 지난번처럼 끈으로 엔디미온과 몸을 연결했다. 다른 영웅들은 날아가지 않도록 비늘을 꽉 잡았다. 모두가 등 위로 올라온 것을 확인한 후에 나엘라티나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북쪽으로 날았다.

“우아앗! 이거 엄청 빠르잖아!”

“하, 하늘을 난다는 건 이런 기분인가······. 새삼 바이올렛이 대단하게 느껴지는걸.”

용을 처음 타보는 비다르와 라우렌시오는 나엘라티나의 등 위에서 수선을 떨었다. 지상의 모습은 빠르게 변했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다가 너른 들로 변했고 또 다시 자갈밭으로 변했다. 하늘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있었다. 옅은 청색이었다가 짙은 적색으로 변하고 다시 아무것도 없는 암흑로 변했다.

밤이 되면 그들은 지상으로 내려왔다. 식사를 하고 잠을 잔 후에 아침이 되면 다시 날아올랐다. 엔디미온 일행은 그것을 며칠 동안 반복했다. 점차 공기가 쌀쌀해지고 지상의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라우렌시오,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건 맞겠지?”

나엘라티나는 그저 하늘을 날아가기만 할 뿐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엔디미온이다. 그는 룽고르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었다. 왕국 북부에는 요정들이 모여 살았는데 그는 요정이 아니라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부의 대영주이자 일곱 요정 가문의 수장이었던 라우렌시오는 북부의 지리에 익숙했다. 룽고르 역시 일곱 요정 가문의 영토 중 하나였다. 그가 직접 룽고르에 간 적은 없었으나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에샤르를 지나쳤으니 이제 금방이야. 엘다르를 지나면 그 다음이 룽고르지.”

라우렌시오는 마을들의 이름을 말하면서 추억에 잠겼다. 모두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그가 다스리던 일곱 요정 가문은 그들의 주인인 요정기사가 사라지면서 세력이 약해지고 가세가 기울어 대부분 사라졌지만 일부는 남아있었다. 그것은 그와 같은 혈통을 가진 자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소리였다. 다시 말해서 까마득히 먼 후손들이란 소리지만 구태여 찾아가서 얼굴을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일곱 요정 가문에게 있어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니까. 라우렌시오가 내버린 것은 의무뿐이 아니었다. 그는 의무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일곱 요정 가문 역시 내버렸다.

“나엘라티나, 조금만 더 힘내. 얼마 안 남았어.”

나엘라티나는 엔디미온의 격려를 들으며 힘을 짜냈다. 여기까지 날아오면서 속도가 조금 들었지만 그래도 아직 말보다는 빨랐다. 라우렌시오는 방금 막 엘다르를 지났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믿을 수 없군······.”

“왜?”

엔디미온이 묻자 라우렌시오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며 말했다.

“저기야. 저기가 바로 룽고르야.”

라우렌시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마을이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로 가득한 마을이었는데 생각한 것보다 상태가 양호했다. 바이올렛은 자신의 마을을 없애버렸다고 했다. 그럼에도 마을에는 건물이 있었다. 멀쩡하지는 않아도 당장 쓰러질 것 같지는 않았다. 심지어 마을 곳곳에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군. 내려가자, 나엘라티나.”

나엘라티나는 시키는 대로 아래로 내려갔다. 엔디미온 일행은 마을의 입구에서 룽고르의 모습을 똑바로 보았다.

“이럴 수가······.”

베로니카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마을 안의 건물들은 회색과 검은색으로 얼룩덜룩했다. 검은색은 불꽃에 그슬린 흔적이었고 회색은 재가 달라붙어서 딱딱하게 굳은 것이었다. 마치 회오리치는 화염이 한바탕 쓸고 지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바깥에 멀뚱히 서 있는 요정들은 모두 회색이었다. 그리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몸에 달라붙은 재가 엄청난 열기를 만나서 딱딱하게 굳었고 요정들은 그대로 회색의 동상이 되고 만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사실은 그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람들 전부 살아있어요······.”

여기 있는 요정들은 죽은 시체로 만들어진 동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살아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약하게 심장이 뛰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고향을 공격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죽을 수도 없는 몸이 되어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바이올렛의 짓이군. 고약한 놈. 대체 무슨 이유로 자기 고향에 이런 짓을 한 거지?”

라우렌시오가 이를 부득 갈았다. 나엘라티나는 역시 빌어먹을 년이라면서 쯧 하고 혀를 찼다. 비다르 역시 살아있는 요정들의 동상을 보고서 기분이 나빠졌다. 라이오넬은 낮게 욕을 내뱉었다.

“내가 알던 그 바이올렛과 완전히 달라졌군. 이런 짓을 벌인 것을 보면 갱생의 여지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아.”

베로니카는 살아있는 동상들에게서 눈을 돌리며 말했다.

“하지만 정말로 왜 이런 짓을 했을까요? 왜 다른 곳도 아니고 자기 고향을 공격했을까요? 저는 바이올렛 씨가 갑자기 타락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한때 영웅이었던 사람이 아무 이유도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는걸요.”

“무슨 이유야 있겠지.”

하지만 엔디미온만은 덤덤했다. 그는 이 상황에 화를 내지도 않았고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 성검의 손잡이를 꽉 잡았을 뿐이다.

에투알은 그가 아무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지금 여기 있는 불쌍한 요정들을 도와주는 일은 그들을 위해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동정심을 보내는 것도 아니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심 없다. 나는 내 일을 할 뿐이야.”

중요한 것은 바이올렛을 죽이는 것뿐이다. 오직 그것만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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