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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61화 (161/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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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베로니카는 끔찍한 고통을 경험했음에도 아직 죽지 못하고 있는 요정들이 안타까웠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느낄 만한 감정이었다. 엔디미온 역시 그들을 불쌍하게 여겼으나 도와줄 방법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여기 있는 요정들은 진즉 죽었어야 할 몸이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바이올렛의 사술이 영혼을 억지로 붙들고 있기 때문이지. 성수를 뿌린다고 해도 저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거다. 영혼이 사악한 힘에 의해 붙잡혀 있으니 성수 때문에 오히려 고통을 느끼겠지.”

“그, 그럼 안식을 맞이하게 해주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요?”

이번에도 엔디미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고 베로니카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이들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이올렛이다. 우리가 이 동상들을 부순다고 해도 그들의 영혼은 바이올렛의 사술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자유로워질 수 없어. 이들에게 안식을 선물하려면 바이올렛을 찾아 죽여야 해.”

“결국 바이올렛 씨를 찾아야 하는군요······.”

“걱정할 것 없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베로니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바이올렛은 어디에 있지? 여기가 룽고르라며? 우리한테 거짓말한 거 아냐? 그 녀석의 기운은 물론이고 악마나 악귀의 기운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비다르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살아있는 요정 동상들뿐이었다. 이 마을에서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곳 자체가 사술에 의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악마는 물론이고 그 흔한 악귀조차 없는 듯 했다.

엔디미온 역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나직이 성검의 이름을 불렀다.

“에투알.”

“음, 나 역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소. 어쩌면 비다르의 말대로 바이올렛이 우리를 속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영웅들을 속여 북부의 마을로 보내고서 바이올렛이 무슨 일을 벌였을지도 모른다. 엔디미온은 만약의 상황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일단 흩어져서 마을을 둘러보도록 하지. 뭐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엔디미온 일행은 각자 사방으로 흩어져서 마을을 수색했다. 하지만 삼십 분 동안 구석구석을 뒤져보아도 바이올렛에 대한 단서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이 마을에 있는 것은 열기에 그슬린 집과 딱딱하게 굳은 요정들뿐이었다.

그들은 다시 마을의 중앙으로 모였고 이제는 정말로 바이올렛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할 때였다.

버석버석. 바싹 마른 잡초 따위를 밟는 소리였다. 가까이 다가오다가 어느 순간에 멈췄다. 그리고 침묵. 엔디미온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릴 때 휙 하고 공기 가르는 소리가 났다.

“······웬 놈이냐?”

엔디미온의 손에는 바르르 떨리는 화살이 붙잡혀 있었다. 화살촉은 옅은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그게 맹독임을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화살로 날아왔다. 열 발 정도 되는 화살들이 엔디미온 일행을 노리고 날아왔다.

하지만 그런 화살 따위에 당해줄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모두는 각자의 무기를 들고 화살을 쳐내거나 부러트리고 혹은 막아냈다. 열 발의 화살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그제야 습격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 뒤쪽에서 그림자처럼 나타난 그들은 모두 녹색과 갈색으로 얼룩덜룩한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저 망토 때문에 그들의 모습이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손에 들고 있던 활로 다시 한 번 엔디미온 일행을 공격했다. 하지만 아까와 마찬가지로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활을 버리고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들었다.

칼날이 은근한 곡선을 그리는 세이버였다. 그들의 숫자는 스무 명 정도였고 전부 다 요정이었다. 이 마을에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요정들이 있었나? 엔디미온은 그들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설마 바이올렛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들인가?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데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요정이 입을 열었다.

“이 사악한 놈들. 이 저주 받은 땅에 질리지도 않고 찾아오는구나. 너희들이 그런다고 저주의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여자치고 낮은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모자 밑으로 흘러나온 머리카락은 금색이었다. 엔디미온은 흠 소리를 냈다.

“한 놈도 살려두지 않겠다! 공격해!”

명령이 떨어지자 요정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엔디미온은 자신의 뒤쪽에 있는 일행들을 향해서 말했다.

“죽이지 마라. 아무래도 적은 아닌 것 같으니까.”

“적이 아니라고? 그럼 싸우지 말고 대화로 해결하면 되잖아?”

나엘라티나의 질문에 엔디미온이 무심히 대답했다.

“저 친구들이 말로 한다고 들을 것 같냐.”

재빠르게 달려오는 요정들을 보면서 나엘라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엔디미온 일행은 각자 전투 자세를 잡았다. 이쪽은 여섯 명, 저쪽은 스무 명. 3배가 넘는 숫자 차이지만 겁을 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사악한 힘에 눈이 먼 어리석은 놈들! 모조리 처치해주마!”

요정 전사 한 명이 엔디미온에게 검을 휘둘렀다. 재빠르고 깔끔한 공격이었지만 엔디미온에게는 맞지 않았다. 첫 번째 공격이 빗나가자 요정 전사는 더욱 빠르게 공격했다. 검을 휘두르고 찌르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세 번의 공격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검을 잡은 자세나 휘두르는 모습만 봐도 이 전사가 얼마나 오랫동안 검술을 연습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연습과 노력만으로는 좁힐 수 없는 실력의 격차가 있었다. 엔디미온은 날아오는 검을 보고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뻗어서 검을 붙잡았다.

아무리 성배기사라고 해도 인간은 인간이었다. 요정 전사가 휘두른 검에 약간의 상처가 났지만 엔디미온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칼날을 세게 잡은 뒤에 자신 쪽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생각지도 못한 반격에 요정 전사는 어어 소리를 내다가 엔디미온의 가까이로 끌려왔다.

그리고 곧장 날아오는 주먹에 얼굴을 맞고서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엔디미온 입장에서는 힘을 빼고 날린 주먹이었지만 요정 전사에게는 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손쉽게 한 명을 제압한 엔디미온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흠칫 놀랐다.

어느새 조용하게 뒤를 잡은 요정 전사가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재빠르게 돌면서 주먹을 날리려고 했지만 그 전에 요정 전사의 검이 몸을 찌를 듯 했다. 어쩔 수 없지. 한 대 정도는 내주자고 생각할 때 갑자기 날아온 바람의 주먹이 요정 전사의 몸을 날려버렸다.

요정 전사는 요정답게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한 후 우아하게 착지했지만 마법에 맞은 충격 때문에 연신 기침을 했다.

“이야, 엔디미온 씨. 이거 저한테 빚지신 겁니다?”

“빚은 무슨.”

엔디미온과 베로니카는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마법사다! 저 녀석들에게 마법사가 있다! 우선적으로 제거해!”

베로니카가 마법을 사용하자 요정 전사들은 그녀를 제일 먼저 제거하려고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법사는 싸움의 흐름을 뒤바꿀 수 있는 고급 전력이니까.

“으랏차! 어딜 감히 우리 꼬맹이한테 손대려고!”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하지만 요정 전사들은 베로니카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없었다. 비다르와 라이오넬이 그녀를 단단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묵직한 강철 주먹과 날카로운 검이 요정 전사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그들을 무력화시켰다.

스무 명이나 됐던 요정 전사들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서 이제는 다섯 명도 남지 않았다. 라우렌시오와 나엘라티나 역시 손쉽게 요정 전사들을 제압하는 중이었다.

“말도 안 돼······.”

요정 전사들의 대장은 빠르게 단 한 명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가는 부하들을 보고서 당황했다. 그들은 스무 명이서 악마도 해치울 수 있을 만큼 단련된 요정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그런데 겨우 여섯 명에게 진다니. 글자 그대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마지막 요정 전사는 까드득 소리를 내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검을 세게 쥐었다.

“덤벼라! 엘다르의 검이자 첫 번째 순찰자, 엘리야가 상대해주마!”

엘다르는 룽고르 전에 위치한 마을의 이름이었다. 그곳의 검이자 순찰자라는 것은 역시 이 요정들이 적이 아니란 것을 의미했다. 적이 아니라면 굳이 험하게 다루어야 할 이유도 없다. 엔디미온은 엘리야를 향해 홀로 움직였다.

“당신과 우리 사이에는 작은 오해가 있소.”

“듣기 싫다! 더러운 혓바닥으로 날 우롱하려 하는구나!”

듣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엔디미온은 어깨를 으쓱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성검이 물었다.

“날 뽑지 않아도 괜찮겠소?”

“널 뽑으면 저 녀석을 죽여야 해.”

성검은 낮게 웃었다. 그 말이 맞았다.

“간다!”

엘리야는 힘차게 바닥을 박찼다. 빠르고 날카로운 움직임이었다. 검은 그녀의 손 위에서 신체의 일부처럼 움직였다. 때로는 직선으로 곧게 움직이고 때로는 곡선으로 유연하게 움직였다. 그녀의 검술은 직선과 곡선의 혼합이었다. 직선의 맹렬한 돌격을 곡선의 유려함이 보조하고 곡선의 부드러운 춤을 직선의 호탕함이 보조했다.

하나의 검으로 상반된 두 개의 움직임을 모두 보이며 엘리야는 엔디미온을 압박했다. 제법이군. 엔디미온은 반격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이 요정 전사의 검술을 끝까지 보기 위해서였다.

검을 잡은 손이 축축해지고 얼굴에서 땀 한 방울이 흐르기 시작했을 때 엔디미온은 이제 마지막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엘리야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일격이 온다. 눈을 크게 뜨고 호흡을 멈추고 바닥을 단단히 딛는다. 그리고 손을 뻗는다.

쐐애액! 쇄도하는 검은 화살과 같았다. 엔디미온의 주먹은 그제야 움직였다. 직선으로 날아오는 검을 향해서 똑같이 직선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아주 미세한 차이로 검을 스쳐지나갔다. 주먹은 늦게 움직여서 먼저 때렸다. 엘리야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가며 몸이 바닥에서 떠올라 뒤로 날아갔고 손에 들고 있던 검은 바닥으로 떨어져 쨍 하는 소리를 냈다.

엔디미온은 주먹을 거두고서 쓰러진 엘리야에게 다가갔다.

“큭, 내가 지다니······.”

엘리야는 주먹에 맞았음에도 바로 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주먹에 맞은 충격 때문에 모자가 벗겨졌고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살결은 희고 머리카락은 금색이다. 또한 눈은 녹색이었다.

엔디미온은 그 모습을 보고서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어라, 저 요정 왠지 라우렌시오 씨 닮지 않았어요?”

엘리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베로니카가 툭 내뱉은 말에 라우렌시오는 엘리야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엘리야 역시 시선을 느끼고 라우렌시오를 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 딱 얼어붙고 말았다.

“조······상님?”

도망치려는 라우렌시오를 비다르가 얼른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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