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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놔!”
“야야, 어딜 도망가려는 거냐?”
비다르가 실실 웃었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엔디미온은 다시 한 번 라우렌시오의 얼굴을 보고 그 다음에 엘리야의 얼굴을 보았다. 어째서 기시감을 느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엘리야는 여자였고 라우렌시오는 남자였으니 완벽하게 닮지는 않았으나 금색의 머리카락과 녹색의 눈, 그리고 눈매나 하관 등이 서로 닮아 있었다. 엔디미온이 기억하기로 라우렌시오는 자식이 없었다. 결혼을 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그에게는 일곱 요정 가문이 있었다.
라우렌시오의 가문은 본가였고 다른 여섯 가문은 분가였다. 엘리야는 본가 출신일수도 있고 분가 출신일수도 있었다. 요정기사가 잠적하고 일곱 요정 가문은 옛날과 같은 위세를 잃고 세가 약해졌으며 일부가 몰락했다. 하지만 분명히 아직까지 살아남은 가문도 있었을 것이다. 라우렌시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 년의 시간이 지나서 자신의 후손과 마주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어. 요정기사는 백 년 전의 사람. 아직까지 살아있을 리가······.”
백 년의 시간은 개인에게는 길지만 가문에게는 그리 긴 시간도 아니다. 세대로 치면 3세대에 불과할 것이다. 라우렌시오와 함께 활동하던 요정이 자기 자식에게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또 그 자식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을 것이다. 요정 가문이 요정기사를 완전히 잊어버리기에 백 년은 너무 짧았다.
그래서 엘리야도 라우렌시오를 단박에 알아봤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요정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까.
“너 뭐해? 입이 딱 붙었냐? 뭐라고 말 좀 해보라고.”
비다르가 이죽거렸지만 라우렌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 때문에 일곱 요정 가문의 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의무가 두려워 잠적해버리고 바이올렛 때문에 타락한 영웅이라는 누명을 썼다. 이러한 일들 때문에 일곱 요정 가문은 배신자의 가문이 되고 말았다.
몰락의 이유를 제공한 그가 이제 와서 내가 요정기사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뻔뻔한 일이겠는가. 백 년의 시간 동안 어디든 돌아다녔던 라우렌시오가 단 한 번도 고향을 찾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이유였다.
“너는······.”
하지만 라우렌시오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고 결국에는 엘리야를 향해 목소리를 냈다.
“······누구의 자손이지?”
엘리야는 그게 부모의 이름을 묻는다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레느 마르티레스가 제 고조모님이십니다.”
“일레느, 내 어린 누이······.”
라우렌시오에게는 나이 어린 누이가 하나 있었다. 악마들과 싸우기 위해 언제나 전장에 나가있던 그를 대신해서 일곱 요정 가문을 이끌던 당찬 여자였다. 라우렌시오는 마음이 울적해졌다.
“내가 너에게 사과하마. 가문을 버리고 도망쳤던 일, 그리고 타락한 영웅의 가문이라는 오명을 쓰게 했던 일, 전부 사과하마.”
본래 라우렌시오는 자신의 정체를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성배기사인 엔디미온이 정체를 말하는 걸 꺼려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애초에 사람들은 요정기사를 타락한 영웅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엘리야에게 자신의 정체를 말했다. 그녀는 진실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으니까.
“나는 북부의 대영주이자 일곱 요정 가문을 이끄는 자, 요정기사 라우렌시오다. 엘리야, 내 후손. 너는 진실을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당신이 정말로 요정기사입니까? 하지만 그는 백 년 전의 사람입니다. 아직까지 살아있을 리가······.”
“나는 지켜야 할 의무가 있고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의무라 하시면······.”
라우렌시오는 엄숙하게 말했다.
“백 년 전에 내가 마땅히 행했어야 할 의무다.”
엘리야는 그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엄숙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우렌시오는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요정 기사가 타락하여 악귀들을 이끌고 세상에 해악을 끼쳤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부끄럽게도 그때의 나는 의무로부터 도망쳐 잠적해 있었고 그런 일이 벌어진 것조차 몰랐다. 너는 이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나는 내 영혼과 이름을 걸고서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고 맹세하마.”
“하지만 역사에는 분명히 요정기사가 타락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럼 그것 자체가 거짓이라는 뜻입니까?”
“그것은······.”
라우렌시오는 말을 하다가 고개를 돌려 엔디미온을 보았다. 진실을 말해도 되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엔디미온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룽고르를 이 꼴로 만든 것은 바이올렛이었다. 엘드라와 바로 이웃하고 있는 마을을 멸망시킨 게 그녀였으니 엘리야도 진실을 알아야 했다.
“······바이올렛이다.”
“대마법사 바이올렛 말입니까?”
“그래, 그녀가 진정으로 타락한 영웅이며 지금 우리 세상의 가장 큰 위협이지.”
“아직 살아있다는 말입니까?”
“죽은 것은 오직 칼라딘과 성녀뿐이다.”
엘리야는 반사적으로 엔디미온 일행을 보았다. 그리고 엔디미온의 얼굴을 보고서 시선이 멈추었다. 커다란 덩치, 단단한 턱, 바다와 같은 두 눈, 금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후광이 비추는 듯한 신성함.
모든 행동은 반사적이었다.
“성배기사를 뵙습니다.”
엘리야는 고개를 숙였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들라고 말했고 그제야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네 친구들은 내가 도와주마.”
엔디미온은 쓰러진 요정 전사들에게 성수를 먹였고 그들은 곧 상처 하나 없이 다시 일어났다. 성배의 기적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엘리야는 정말로 성배기사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그래서 너희들은 왜 우리를 공격했지?”
“아, 그것은 여러분을 악마숭배자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죄송합니다.”
“악마숭배자?”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룽고르는 사악한 저주에 걸려 있습니다. 악마숭배자나 악귀들은 본능적으로 이런 곳을 찾아오게 되는데 그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고 마을을 더럽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 엘다르의 순찰자들이 주기적으로 순찰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곳에서 마법사를 본 적은 없나?”
“악마숭배자들 중에서 사술을 부리는 놈들이 몇 있었습니다.”
엔디미온이 찾는 마법사는 그런 저급한 놈들이 아니었다. 그는 대답 대신에 고개만 끄덕였다.
“혹시 머물 곳이 없으시다면 저희 마을에 와도 괜찮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제가 말해두지요.”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더 있어봤자 얻을 것도 없어보였다. 일단 마을에서 쉬면서 바이올렛이 정말 거짓말을 했는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했다.
“그럼 가시지요. 그리 멀지는 않습니다. 부지런히 걸으면 말입니다.”
엘리야는 다시 정신을 차린 부하들에게 이들은 악마숭배자가 아니며 룽고르를 조사하기 위해서 나온 성기사들이라고 설명했다. 성기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자유분방한 생김새들이었지만 순찰자들은 대장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베로니카는 라우렌시오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마을로 간다는 사실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래도 목소리는 상냥했다.
“뭐가 궁금한가요?”
“혹시 다른 영웅들도 후손이 있을까요? 다들 결혼은 안 하셨겠지만 형제자매들은 결혼을 했을 수도 있잖아요.”
“아마 없을 겁니다. 엔디미온과 라이오넬은 형제가 없고 비다르는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악마들의 습격으로 죽었습니다. 어쩌면 칼라딘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 비다르 씨에게 동생이······.”
누군가 죽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비다르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난 백 년도 더 된 일이라 아무 감흥도 없다. 왜 네가 우울해지고 난리냐?”
“하지만······.”
“시끄러. 그 녀석은 전사였고 한 점 후회 없는 인생을 살다가 갔다. 전사가 전장에서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이야.”
베로니카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우렌시오가 가문을 버렸을 때 많이 낙담했겠군.”
“글쎄요. 저는 그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아서. 별 감정은 없군요.”
엔디미온과 엘리야는 무리의 선두에 서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 말이 맞군. 네 부모나 조부모가 라우렌시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는 않았나?”
“제 조부님은 요정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걸 싫어하셨습니다. 조부님 시절부터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고 하더군요. 싫어할 만도 하겠지요.”
뒤에서 라우렌시오가 큭 소리를 냈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별로 신경 쓰지 않으셨습니다. 저에게 영웅의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하셨지요.”
축 쳐졌던 라우렌시오의 어깨가 다시 위로 올라왔다.
“자, 도착했습니다. 이곳이 엘다르입니다.”
한참을 걸은 끝에 그들은 엘다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외관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마을의 모습이었다. 마을 사람들 전부가 요정이라는 것은 제법 진기한 광경이기는 했지만.
“마을 모습이······. 왜 이래?”
라우렌시오는 홀로 충격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엘다르는 이상할 곳이 없는 마을이었지만 그는 달랐다.
“마을이 왜 이리 작아졌어? 이건 내가 알던 엘다르가 아닌데?”
라우렌시오가 북부의 대영주이자 일곱 요정 가문의 주인으로 지내던 시절의 엘다르는 강성한 세력을 갖춘 도시였다. 나엘라티나의 등 위에서 봤을 때는 그냥 공중에서 봐서 작게 보이는구나 했었는데 땅 위에서 봐도 작았다. 그것도 너무나.
“일곱 요정 가문 중 두 가문이 몰락했고 두 가문은 살 길을 찾아서 북부를 떠났습니다. 남은 가문은 세 가문뿐이지요.”
엘리야가 서늘한 눈으로 라우렌시오를 흘겨보았다.
“세력이 절반보다 더 줄었음에도 이 정도 마을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어, 크흠······. 그래, 확실히 대단하군······.”
라우렌시오의 어깨가 다시 축 쳐졌다. 비다르가 그 모습을 보며 킬킬 웃었다. 하지만 라우렌시오는 화를 낼 힘도 없었다. 영광이 넘치던 북부의 도시가 이런 꼴이 돼버리다니.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가시지요. 저희 집에 잠깐 묵으시면 될 겁니다.”
엔디미온 일행이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요정들은 외부인에게 관심을 보였다. 누구는 호기심이었으나 누구는 두려움이었다. 엘리야는 순찰자들의 대장이자 마을의 장로로서 그들을 안심시켰다.
“임무 수행 중인 성기사들이다. 두려워할 것 없다.”
성기사라는 말에 요정들은 안심했다. 이제 남은 것은 호기심뿐이었다.
“엘리야, 이제는 네가 마르티레스 가문의 주인인 거냐?”
라우렌시오의 질문에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말고 가문을 이을 자가 없었으니까요. 혹시 바라신다면 가주 자리를 돌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 아니, 그럴 것까지는 없고······. 그래, 많이 힘들었겠구나.”
엘리야가 한 쪽 눈썹을 들어보였다.
“뭐가 힘들겠습니까. 제 일인데.”
“그, 그래. 장하구나······.”
라우렌시오는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원망스럽지는 않으냐? 나 때문에 가문이 영락했으니 말이다. 본래 마르티레스 가문은 북부의 대영주였고 설산의 주인이었다. 네가 바란다면 내 의무가 끝난 후에 가문의 부흥을 위해 힘써줄······.”
“조상님.”
“어, 어······. 그래, 말해보거라.”
“원망스러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사람은 무언가가 없는 것보다 무언가를 빼앗길 때 더 크게 분노하는 법입니다. 제가 왜 조상님을 원망하겠습니까? 저는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았고 제 가문은 날 때부터 이랬는데.”
서늘한 시선을 받으면서 라우렌시오는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