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63화 (163/199)

163

“들어가시지요. 여기가 제 집입니다.”

엘리야의 집은 마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른 집보다 더 크기는 하지만 마르티레스 가문의 주인인 엘리야가 머물기에는 초라한 집이었다. 라우렌시오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며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그런데 마르티레스 가문의 성은 여기가 아닌데 왜 엘다르에 머물고 있는 거지?”

마르티레스 가문은 엘다르보다 좀 더 북쪽에 위치한 므셀라와 그 일대를 다스렸다. 백 년 전의 북부 요정들은 므셀라에 결집하여 악마와 악귀들에게 대항했다. 악마들이 수만 마리의 악귀들을 몰고 와도 므셀라 성은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엘리야가 마르티레스 가문의 주인이라면 그녀의 집은 마땅히 므셀라 성이여야 했다. 엘다르의 작은 집이 아니라.

“므셀라 성은 사십 년 전에 무너졌습니다. 요정 가문들끼리의 결집이 약해지고 병사들의 숫자가 줄면서 마르티레스 가문 혼자서 므셀라를 노리는 악마들을 막아내기 힘들어졌습니다. 마르티레스 가문은 므셀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은 므셀라를 버리고 떠나야 했습니다. 지금 므셀라 성은 악마와 악귀들의 소굴입니다.”

“그런······. 므셀라가 함락됐다니. 그런, 그런······.”

라우렌시오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역시 성인이 될 때까지 므셀라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만들었던 수많은 추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므셀라가 무너졌다니. 참으로 충격적이고 애석한 일이었다. 그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리고 곧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엘리야. 내가 의무를 져버리지 않았다면 마르티레스 가문이 오명을 뒤집어쓰는 일은 없었을 거다. 그리고 일곱 요정 가문의 결속이 와해되는 일도 없었겠지. 전부 다 내가 부덕한 탓이다.”

엘리야는 문고리를 잡은 채로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라우렌시오를 빤히 쳐다보다가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말했다.

“조상님, 제가 아까도 말했지만.”

그녀는 손을 뻗어서 라우렌시오의 얼굴을 잡았다. 백 년도 전에 살았던 어른의 얼굴을 손으로 잡고서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엘리야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하지만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돌아온 영웅에 대한 조금의 분노도 느끼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빼앗길 때 화를 냅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누리지 않았으니 없어진 것에 대해 화를 낼 이유도 없지요. 조상님이 제게 사과할 이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엘리야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을 마쳤다.

“그리고 저는 이 집이 마음에 들어요.”

라우렌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부채감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자기 누이의 증손녀에게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고 있을 지도 모르고. 엔디미온은 조용히 엘리야에게 고갯짓을 했다. 신호를 받은 그녀는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갔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와, 집이 엄청 깨끗하네요!”

베로니카는 단정하게 정리된 집 안을 보고 감탄했다. 남의 집에 초대를 받은 손님으로서 반사적으로 하는 칭찬이 아니었다. 엘리야의 집은 실용적인 구조로 꾸며져 있었으나 거기에 서늘함은 없었다. 실용성을 따지면서도 안락함을 추구했다. 베로니카는 벽난로 근처에 있는 흔들의자를 보았다. 상당히 때가 탄 것이 한두 해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저 의자 위에서 벽난로의 온기를 즐기며 차를 마시는 엘리야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이다.

“칭찬 고맙군요. 혹시 이름이?”

“아, 저는 베로니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베로니카 양. 저는 일레야 마르티레스입니다. 그냥 일레야라고 부르면 됩니다.”

성이 있다는 것은 귀족이라는 뜻이다. 일레야 마르티레스. 상당히 우아한 이름이라고 베로니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혹시 어디 출신인지 물어도 될까요? 북부 요정 외에 만나는 것은 오랜만이라서.”

요정들은 어디서나 살지만 대부분은 북부에서 살았다. 북부 요정들은 살결이 희고 키가 큰데 다른 지역에 사는 요정들은 생김새가 약간씩 달랐다. 베로니카는 요정이지만 일레야와는 생김새가 조금 달랐다.

“저는 할리아에서 왔어요.”

“아, 그쪽에도 요정들이 몇 산다고 들었습니다.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겠군요.”

“하하하, 여기까지 오는 건 별로 고생스럽진 않았어요.”

오는 과정에서 생긴 일들이 고생스러웠지. 베로니카는 뒷말을 목구멍 뒤로 삼켰다. 엘리야는 엔디미온 일행에게 차를 내올 동안 쉬고 있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물을 끓여서 찻물을 우려낸 후에 찻잔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

엔디미온 일행은 제각각 자리를 잡고 찻잔을 받았다. 엔디미온은 따스한 찻물이 담긴 찻잔을 손으로 감쌌다.

“지금까지 제 이야기만 한 것 같은데.”

엘리야가 차 한 모금을 마신 후에 말했다.

“여러분들 이야기도 해주실 수 있습니까? 왜 엘다르에 오셨는지 말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엔디미온에게 모였다. 이 무리의 대장은 그였고 사정을 설명해야 하는 것도 그였다. 엔디미온은 입 안의 찻물을 조심스럽게 목 뒤로 넘긴 후에 입을 열었다.

“내가 아까 이 근처에서 마법사를 본 적 있느냐고 물었지.”

엘리야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룽고르를 그 꼴로 만든 것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아니요, 모릅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니까요. 어른들 말씀으로는 어떤 미치광이 마법사가 그랬다고 하더군요.”

거기까지 말한 후에 엘리야가 아 소리를 냈다.

“혹시 찾으시는 마법사가 바로 그 마법사입니까?”

“그래. 정확히는 바이올렛을 찾고 있다.”

“그럼······.”

엘리야가 얼굴을 찡그렸다. 라우렌시오에게 누명을 씌운 것도 그녀라고 했다. 그런데 룽고르를 불태웠던 것도 그녀란 말인가? 하지만 왜?

“바이올렛은 바로 그 룽고르 출신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 고향을 왜?”

“우리도 모른다. 사실 이유는 별로 궁금하지 않아. 세상에 사정이 없는 사람은 없지. 구구절절한 사정에 대해서 들어줄 생각은 없다. 우리가 우선해야 할 것은 그녀에 대한 징벌이니까.”

단호한 말에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쌀쌀맞으신 분이군요. 제 증조모님이 남기신 기록에 따르면 성배기사는 아주 상냥하고 봄날에 내리쬐는 햇볕과 같은 사람이라고 했는데요. 하긴 기록이야 개인의 주관이 들어가는 법이니까.”

엔디미온이 헛기침을 했다. 그는 라우렌시오의 어린 누이와 몇 번 만난 적이 있었고 조그만 꼬마 숙녀는 상냥한 성배기사를 곧잘 따랐었다. 엔디미온이 보기 드물게 부끄러워하자 비다르와 라우렌시오가 킥킥 웃었고 성검 에투알이 으음 소리를 냈다.

“확실히 옛날에는 그랬지. 지금은 아니지만 말이오.”

“오, 설마 이 검이 바로 그 유명한 성검입니까?”

에투알이 엣헴 소리를 냈다.

“에투알이오. 하지만 뤼미에르라고 부르시오. 에투알은 오직 성배기사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뤼미에르.”

“반갑소, 엘리야 마르티레스.”

엘리야는 엔디미온 일행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생각해보니 다른 분들의 이름을 아직 듣지 못했군요. 괜찮다면 이름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 말에 비다르가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쾅 치면서 말했다.

“반갑다. 난 강철 주먹의 비다르다. 들어봤지? 혼자서 악마들 대가리를 모조리 박살냈던 강철의 영웅 말이야.”

엘리야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은 라이오넬이었다.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어,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르네요.”

베로니카가 소곤소곤 말했다.

“노망나서 그래요.”

이제 엘리야는 나엘라티나를 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그녀가 멋쩍은 얼굴로 자기소개를 했다.

“난 나엘라티나. 그리고······.”

“그리고?”

“······용이야.”

용이란 존재를 반기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엘라티나는 자기소개를 하고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렸지만 엘리야는 그냥 고개만 끄덕일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어쩌면 성배기사와 함께 다니는 것을 보고 나쁜 용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자기소개 다 끝났으면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지. 엘리야, 바이올렛에 대한 기록이 남은 것은 없나?”

엔디미온이 묻자 엘리야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북부에는 장서관이라고 기록을 보관하는 곳이 있는데 악마들과의 싸움에서 불타버렸습니다.”

라우렌시오가 또 탄식했다. 그를 무시하고 엔디미온이 다시 물었다.

“엘리야, 너는 순찰대를 이끌고 룽고르를 관리하고 있다고 했지. 혹시 그 근처에서 수상쩍은 일은 없었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의 음기에 이끌려 악마와 악귀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게 주기적으로 순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겁이 없는 악귀들 무리를 쫓아낸 것 외에는 말입니다.”

“이상하군.”

“어떤 점이 말입니까?”

“바이올렛은 우리에게 룽고르로 오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와 싸우기 위해서지. 룽고르로 오라고 한 걸 보면 그곳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막상 가보니 그곳은 무슨 일을 벌이기에는 너무 좁아.”

그리고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낌새도 안 느껴지고. 엔디미온의 말에 엘리야가 으음 소리를 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룽고르에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바이올렛이 그곳으로 오라고 한 걸 보면 무언가 있기는 한 모양이겠지요. 그녀가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보려면 므셀라로 가보는 건 어떠십니까?”

“므셀라? 그곳에는 왜?”

“므셀라는 지금 길리어스라는 악마가 점령하고 있습니다. 자기 부하들을 데리고 말이지요. 바이올렛이 룽고르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다면 므셀라의 주인인 길리어스와 손을 잡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순찰대의 보고에 따르면 길리어스가 이끄는 군세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바이올렛과 아무 연관이 없다고 보기는 힘들겠지요.”

엔디미온이 입을 열려는데 라우렌시오가 먼저 말했다.

“길리어스인가 하는 놈이 므셀라에 있다고? 그럼 당장 가야지! 암! 가야지, 당장! 그 더러운 악마 새끼를 몰아내고 므셀라의 영광을 되찾아야 해!”

라우렌시오의 입장에서는 자기 집을 양아치에게 빼앗긴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곳을 되찾으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서 가만히 무슨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릴 수는 없지. 일단 므셀라로 가서 그 악마 놈에게 정보를 좀 얻자고.”

베로니카가 손을 들며 물었다.

“그런데 그 길리어스라는 악마도 대악마의 적자인가요?”

“아니, 내가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걸 보면 허접한 놈인 게 분명해.”

“그럼 므셀라가 그 허접한 악마에게 함락됐다는 뜻이 되는데요.”

“음? 듣고 보니 그러네. 엔디미온, 당장 그 말 취소해! 길리어스는 엄청 강한 악마일 거다!”

바보냐. 엔디미온은 화를 내는 라우렌시오를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배기사로서 너희 요정들 역시 내가 지켜야 할 어린 양들이다. 길리어스가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세력이 커지고 있는 것은 북부의 요정들에게 분명한 위협이다. 나는 너희의 안전을 위해서 길리어스를 해치우겠다.”

엘리야가 감사하다고 말하려는 순간 엔디미온이 한 마디 덧붙였다.

“난 요정을 싫어하지만 어쨌거나 말이야.”

“······.”

마지막 말만 안 붙였으면 멋있었는데. 엘리야가 흠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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