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64화 (164/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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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언제든 므셀라에 가보실 수 있도록 조치를 해두겠습니다.”

엘리야의 말에 엔디미온이 물었다.

“조치를 해두겠다는 말은 네 허락이 있어야 므셀라에 갈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맞습니다. 므셀라로 가는 길은 저희 순찰대가 봉쇄했습니다. 므셀라는 이제 완전히 악마와 악귀들의 소굴이고 그들이 이쪽으로 내려오거나 악마숭배자 따위가 그곳으로 가는 것을 막아야 하니까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제 허락 없이 그곳을 지날 수 없습니다.”

“므셀라의 악마와 악귀들이 엘다르까지 내려온 적도 있나?”

“아직은 없습니다. 룽고르 근처에는 순찰대의 숙영지가 있는데 그 근처에서 악마 몇 마리를 토벌한 적은 있습니다. 므셀라의 세력 싸움에서 밀려나 룽고르로 도망친 악마들이었지요. 가끔씩 악귀 무리가 룽고르에 나타날 때도 있지만 전부 저희가 처리했습니다. 지금까지 룽고르를 통과해서 엘다르까지 내려온 악마와 악귀들은 한 마리도 없습니다.”

“이상하군.”

엔디미온의 말에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엔디미온이 어떤 점이 이상하다고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악마와 악귀들은 아주 호전적이고 위험한 존재들이지요. 난공불락의 성인 므셀라를 함락시킬 만큼 거대한 군세가 아직까지 그곳에만 머물고 있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므셀라의 상황을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엔디미온이 더 설명해보라는 듯 고갯짓을 하자 엘리야는 금세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산에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들이 설치는 법이지요. 만약 므셀라에 대악마의 적자가 있었다면 악마와 악귀들은 모두 그를 구심점으로 결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어중간한 실력의 악마들뿐입니다. 그들은 처음 므셀라를 공격할 때는 서로 협력했으나 공통의 적이 사라지고 나니 자연히 세력이 갈리고 저들끼리 다투게 됐지요.”

“그래서 저들끼리의 세력 다툼 때문에 지금까지 엘다르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므셀라 바깥의 요정들은 별로 위협적인 적이 아니었을 겁니다. 언제든지 없애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일단 저들끼리 벌이는 싸움에 집중했겠지요. 그 덕분에 우리가 힘을 기를 시간이 생겼다는 것을 모르고요.”

엘리야는 거기까지 말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마르티레스 가문의 가주가 되었다. 북부에 남은 요정들을 지켜야 한다는 무거운 의무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덤덤한 태도를 취했지만 그것은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의무였다. 엔디미온은 그녀가 힘겨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길리어스가 다른 경쟁자들을 모두 이기고 므셀라의 주인이 되었으니까요. 그는 세력을 규합하고 군세를 늘리고 있습니다. 올해가 지나기 전에 군세를 이끌고 밑으로 내려올 겁니다. 우리들 역시 전쟁에 대비했지만······.”

목소리가 약간 흔들렸다. 엘리야는 눈을 내리깔고서 우울하게 말했다.

“······솔직히 두렵습니다.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를 제쳐두고서 함께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 사실이 두렵습니다. 참 부끄럽게도 말이지요.”

사람이라면 당연한 두려움이었다. 지금까지 영웅들을 따라다니며 수많은 악마들을 죽이고 대악마의 적자들을 몇 마리나 죽였던 베로니카 역시 아직도 싸움이 두려웠다. 잃은 것이라고는 자기 목숨 하나뿐인 그녀조차 이만큼이나 두려운데 어깨 위에 수천 명의 목숨이 달린 엘리야는 얼마나 두려울까.

“아니,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입을 연 것은 엔디미온이 아니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서 가만히 있었고 라우렌시오가 한 걸음 나오며 말했다.

“그것은 네가 정의롭다는 증거다. 두려움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라.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도망치지 않는 너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겨라.”

“······조상님.”

“약속하겠다, 엘리야. 이 싸움에서 네 소중한 사람들이 죽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단 한 명도 말이다. 이것은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꾀를 가진 자, 성배기사의 친우이자 정의로운 요정 기사로서 하는 약속이 아니다.”

라우렌시오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르티레스 가문의 일원인 라우렌시오 마르티레스로서 하는 약속이다.”

엘리야는 약간 입을 벌렸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본 라우렌시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내 누이를 꼭 닮았구나. 고집스럽지만 실은 연약한 그 눈이.”

엘리야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베로니카가 라우렌시오의 어깨를 툭 쳤다.

“응? 아가씨, 왜요?”

“엘리야 씨는 누이 되는 분의 증손녀라는 거 알고 있으시지요?”

“당연히 알지요. 그런데 그건 왜?”

“혹시나 꼬시려고 하지 말라고요.”

“······아니, 내가 아무리 그래도 가족을.”

라우렌시오는 어이가 없는지 허 하고 혀를 찼다. 그새 마음을 추스른 엘리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지요. 용무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어, 그럼 엘리야 씨는요?”

“저는 친구의 집에 가서 지내면 됩니다. 제 집은 제법 큰 축에 속하니 여섯 명이서 지내기에 그리 좁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요, 그건 좀 너무 미안한데요······.”

엘리야와 베로니카가 서로 괜찮다고 말하는 것을 보며 엔디미온이 입을 열었다.

“호의에 감사한다, 엘리야. 하지만 쉬는 것은 일을 끝내고 나서 하도록 하지.”

“일이요?”

“므셀라의 길리어스는 북부 요정들에게 명백한 위협이다. 언젠가 제거해야 할 위협이라면 그 크기가 더 커지기 전에 없애는 게 효율적이겠지. 지금 당장 므셀라로 가서 길리어스란 놈을 죽이겠다.”

“지, 지금 말입니까?”

갑작스러운 소리에 엘리야가 말을 더듬었다.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용을 타고 날아서 갈 생각이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오늘 안으로 끝날 일이지.”

용을 타고 간다고? 엘리야는 생각지도 못한 이동수단에 미간을 좁혔다. 뒤에서 딴짓을 하고 있던 비다르가 말했다.

“쉬지도 못하고 또 일하러 가야 돼? 어쩔 수 없지. 주먹 좀 써보실까.”

“아니, 비다르 너는 여기에 남는다. 라우렌시오도 마찬가지야.”

“뭐? 남으라고? 왜?”

“너희 몸에 아직 바이올렛의 저주가 남아있으니까. 온전치 않은 몸으로 쓸데없이 힘을 뺄 이유는 없지. 너희는 이곳에 남아서 휴식을 하든 마을의 일손을 돕든 알아서 해라. 므셀라로 가는 건 나와 라이오넬, 그리고 베로니카뿐이다.”

그 말에 나엘라티나가 어 소리를 냈다.

“그럼 나는? 날 타고 간다며? 설마 나 말고 다른 용이 생긴 거야? 너무해, 흑!”

“헛소리 하지 마라. 넌 우리를 태우고 므셀라로 갔다가 다시 엘다르로 돌아와라. 혹시나 우리가 없는 사이에 바이올렛이 나타난다면 내게 빠르게 알려야 하니까.”

“아, 그런 거야? 알겠어, 그럼!”

“지금 나갈 거니까 준비해. 베로니카, 라이오넬 챙겨.”

“하아, 저는 왜 굳이 데려가는 거냐구요······.”

다르디낭의 적자도 아니고 일반 악마를 상대하는데 엔디미온과 라이오넬만 있어도 충분하다. 아니, 둘 중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네가 없으면 라이오넬은 누가 챙기냐.”

“······내가 무슨 보호자야 뭐야?”

베로니카는 툴툴 대면서도 안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이런 싸움에 몹시 익숙해져 있었다.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정말 지금 가시는 겁니까?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하셨는데 좀 더 쉬고 가시지 않고.”

“해야 할 일을 다 끝마치고 나서 쉬려는 것뿐이다. 영영 갈 것처럼 말하지 마라. 나중에 다시 보자.”

엔디미온이 몸을 돌리자 엘리야가 고맙다고 말했다. 전성기에 비해서 세력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 북부 요정들에게 있어서 길리어스의 군세는 몹시 위협적인 적이었다.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적을 대신 상대해주겠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감사한 일이었다.

“엔디미온.”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라우렌시오였다.

“미안하다. 우리 가문의 일인데 너에게 맡겨서.”

“내 의무는 세상의 온갖 사악한 것들을 물리치는 것이다. 네 가문의 일이기 전에 내 의무라는 소리지. 미안해할 것 없어. 너는 바이올렛과의 싸움에 대비하고 있어라.”

라우렌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엔디미온은 라이오넬과 베로니카를 대동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나엘라티나가 얼른 뒤따라나갔다. 그들은 엘리야의 배웅을 받으며 용으로 변신할 만한 장소를 찾아다녔다. 마을 사람들에게 임무 때문에 엘다르를 찾은 성기사들이라고 소개했으니 용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들켜서는 안 됐다.

“여기면 되겠군.”

적당한 장소를 찾아서 나엘라티나는 용으로 변신했다. 엔디미온과 라이오넬, 베로니카는 능숙하게 용의 등 위에 올라탔다. 베로니카는 용을 타고 다니는 것에 익숙해진 자신이 신기했다. 그녀는 성배기사와 함께 하는 모험을 기록으로 남길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만약 기록을 남길 수 있다면 사람들은 베로니카를 성배기사와 함께 용을 타고 다니는 위대한 마법사라고 기억했을 것이다.

“너는 양심도 없냐. 위대한 마법사는 아니지.”

“진짜 위대한 마법사인지 아닌지 사람들이 확인할 것도 아닌데 그냥 위대하다고 좀 해주면 안 돼요? 사실 전 별로 한 건 없지만 그래도 대악마들의 적자를 몇 마리나 같이 잡았잖아요. 지금 시대의 마법사들 중에서 누가 그게 가능하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아닌 건 아니야.”

“거 되게 빡빡하게 구시네. 좀생이.”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영감님은 조용히 하세요!”

엔디미온 일행은 나엘라티나의 등 위에서 시답잖은 잡담을 했다. 그들이 떠드는 사이에 날갯짓을 하던 나엘라티나가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므셀라가 나오는 거야?”

“북쪽으로 가야겠지. 마스티레스 가문이 머물던 곳이니 멀리서도 잘 보일 거다. 아니면 악귀들이 우글거리는 곳을 찾아가면 되고.”

“알겠어. 북쪽으로 쭉 가면 된단 말이지.”

나엘라티나는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보았다. 엘다르가 벌써 까마득하게 멀게 보였다. 그 다음에는 룽고르가 보였다. 살아있는 동상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룽고르 안을 순찰하는 순찰대들이 보였다.

지상의 모습은 홱홱 변했다. 룽고르를 지나치니 순찰대의 숙영지가 나타났다. 대충 눈으로 보기에도 순찰대의 숫자가 일백은 넘는 듯 했고 그들은 기민하게 움직이며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숙영지를 지나치니 이제 악마와 악귀들의 영역이었다.

수많은 악귀들이 길 위를 뛰어다니며 서로가 서로를 사냥했다. 어떤 악마는 들짐승들을 잡아서 먹고 있었고 한 무리의 악귀들이 어디론가 분주하게 움직이기도 했다. 그 뒤에도 또 다른 무리의 악귀들이 같은 방향으로 뛰어갔다.

자유분방하게 생활하는 악귀들이 저런 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통제를 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엔디미온은 길리어스가 군세를 늘리고 요정들의 마을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엘리야는 올해가 지나기 전에 전쟁이 시작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상황을 직접 보니 바로 내일부터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 오길 잘했군.”

“저도 동감이에요. 아직 므셀라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이만큼 많은 악귀들이 있는 걸 보면 벌써 준비가 상당히 됐다는 뜻이겠지요.”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영감님, 제발.”

머리 위로 거대한 크기의 용이 날아가자 부지런히 움직이던 악마와 악귀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곧 고개를 숙이고 가야 할 방향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저게 므셀라인가?”

나엘라티나는 절반쯤 무너지고 으스스한 안개로 감싸진 성을 발견했다.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맞을 거다. 내 기억에 있는 것과 비슷하게 생겼군. 나엘라티나, 너는 이제 엘다르로 돌아가라.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여기로 날아오고.”

“알겠어. 그래서 착지는 이번에도 똑같이?”

“그래.”

똑같이? 베로니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엔디미온이 그녀의 몸을 들어올렸다.

“으악! 가, 갑자기 무슨 짓이에요!”

“입 다물어라. 혀 깨문다.”

혀를 왜 깨물어? 베로니카는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엔디미온이 나엘라티나의 등에서 뛰어내렸기 때문이다.

“꺄아아악! 미, 미쳤어, 진짜!”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비명을 지르는 베로니카를 따라서 라이오넬도 지지 않을 만큼 크게 소리를 지르며 아래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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