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65화 (165/199)

165

“크르릉?”

지휘에 따라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던 악귀들 중 한 마리가 이변을 감지했다. 늑대처럼 생긴 그것은 세 개의 머리 중 하나를 들어서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거대한 것을 발견했다.

그 다음은 뻔했다. 악귀는 목뼈가 부러졌고 사방으로 질척거리는 장기를 뿌렸다. 쿠우웅 하는 소리에 선두에 선 악마를 따라 움직이던 악귀들이 모두 제자리에 멈추었고 그들은 시끄럽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엔디미온은 수십 마리의 악귀들이 보내는 시선을 덤덤하게 받아내며 반쯤 기절한 베로니카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두 발이 땅에 닫자 드디어 정신을 차린 베로니카는 두 주먹을 꽉 쥐고서 엔디미온의 가슴을 세게 쳤다. 물론 바위를 때린 것처럼 그녀의 손만 얼얼할 뿐이었다.

“아으으, 몸이 돌이야 뭐야? 아니, 엔디미온 씨! 진짜 미쳤어요? 나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요! 혀 깨물 뻔 했어요!”

“그래서 내가 입 다물고 있으라고 했잖아.”

“그걸 말이라고! 저 이번에는 진짜 깜짝 놀랐다고요! 엔디미온 씨, 미워!”

네가 무슨 토라진 애냐. 엔디미온은 베로니카의 말을 무시하며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잡아당겼다. 또 무슨 수작이야 하고서 베로니카가 도끼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있던 자리에 쿵 소리와 함께 라이오넬이 떨어졌다.

“기세는 천둥! 검술은 벼락! 내가 누구냐!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아무나 덤벼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라이오넬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악귀에게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생긴 것은 늑대지만 머리가 세 개고 덩치가 말만큼이나 큰 악귀의 머리가 단칼에 잘려나갔다. 그것은 달려오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멀찍이 날아가서 몸을 버르적거렸다.

악귀 하나가 죽자 다른 악귀들도 흥분해서 달려들었다. 그들을 통솔하던 악마가 제지하려고 했으나 이미 흥분한 그들을 멈추게 할 재간은 없었다. 엔디미온은 이번에는 베로니카의 어깨를 당겨서 자신의 뒤쪽으로 오게 했다. 그리고 주먹을 쥐면서 말했다.

“내 등 뒤에서 나오지 마.”

“······이번에는 좀 듬직하네요.”

엔디미온이 웃으며 달려드는 악귀의 머리를 박살냈다. 뼛조각과 함께 뭉개진 뇌가 날아가는 것을 본 베로니카가 비명을 질렀다. 엄마야!

“길리어스가 부지런히 일했나 보군. 악귀들이 엄청나게 많아.”

“으아아악! 엔디미온 씨! 뒤에서도 오고 있어요!”

베로니카는 엔디미온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 때문에 움직이기 힘들어진 엔디미온이 인상을 썼고 그는 악귀 하나의 목덜미를 붙잡아서 바닥에 그대로 처박았다. 목뼈가 부러져서 끼이잉 소리를 내는 악귀의 다른 두 개의 머리를 발로 짓뭉갠 뒤에 입을 열었다.

“그럼 뒤쪽은 네가 상대하면 되잖아.”

“제가요? 농담이지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말을 하면서도 엔디미온은 악귀들을 해치우고 있었다. 그리고 뒤쪽의 악귀들도 시시각각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빠르게 달려오고 있으니 아마 1분 내로 엔디미온 일행을 공격할 것이다. 과연 혼자서 악귀들을 물리칠 수 있을까? 베로니카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 그녀를 향해서 엔디미온이 다시 말했다.

“넌 할 수 있어.”

“힘들 것 같은데요······.”

“바이올렛은 했어.”

“저는 대마법사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 사람은 영웅이고!”

“세상에 영웅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어.”

엔디미온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겁을 먹은 꼬마를 차분히 달래는 것처럼.

“영웅은 만들어지는 거다. 누구나 영웅이 될 자격이 있다는 뜻이지. 자기 자신을 믿고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그리고 멈추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면 돼. 그게 영웅이야. 베로니카, 자신감을 가져라. 너는 영웅이 될 자격이 있다.”

그 말은 마치 마법 같아서 베로니카의 마음을 따스하게 채워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 속 한 구석에 위치한 용기를 찾아냈다. 불씨를 살리듯 조심스럽게 입김을 불어 기세를 키웠다. 이제 용기는 불씨가 아니었다. 어둠을 몰아내고 환하게 타오르는 횃불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한 번 해볼게요! 안 되면 죽지 뭐!”

용기를 키운 게 아니라 만용을 키운 건가. 엔디미온은 헛기침을 했다. 베로니카는 정신을 집중하며 주문을 외웠다. 몸 안의 마력이 요동치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래, 까짓것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베로니카의 손짓을 따라서 허공에 불씨들이 타올랐다. 그것들은 곧 크기를 키워서 거대한 화염구로 변했고 또 한 번 손짓하자 그대로 달려오는 악귀들을 향해 날아갔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악귀들이 한 번에 몇 마리씩 몸이 터져나갔다.

그녀는 쉬지 않고 마법을 난사했다. 수십 마리의 악귀들이 빠르게 거리를 좁히고 있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뜨거운 불길로 쓸어버렸다. 저급한 악귀들을 상대하는 것은 엔디미온이나 라이오넬보다 그녀가 더 빨랐다. 마법 자체가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데 적합한 방향으로 진화했기 때문이었다.

베로니카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의 실력은 엔디미온과 함께 다니면서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거기에 라우렌시오가 스승 비슷한 역할을 하면서 마법 실력의 상승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또한 이 시대의 마법사들을 쓸 줄 모르는 점멸 마법까지 익히고 있으니 그녀의 실력은 마법사들 중에서 상위에 위치했다.

거기에 더해 대악마의 적자들과 싸우면서 얻은 담력과 임기응변, 실전 경험 덕분에 전투 능력 자체가 월등해졌다. 그럼에도 자신감이 없는 것은 함께 다니는 영웅들 때문에 자기 실력을 객관적으로 볼 기회가 없었던 탓이었다. 엔디미온과 영웅들이 혼자서 악마들을 몇 마리씩 썰고 다니니 베로니카의 마법이 별로 대단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자기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는 자는 상승의 기회가 없다. 위로 올라가려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엔디미온이 굳이 베로니카에게 혼자서 악귀들을 상대하라고 시킨 것은 그녀의 마법 실력이 제법 대단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다보면 베로니카는 언젠가 바이올렛과 같은 위치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저기다! 침입자 놈들을 죽여!”

므셀라의 성문 입구에서 난동을 부린 탓에 주변에서 자꾸만 적들이 나타났다. 악마들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서 엔디미온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숫자가 수백을 넘었다. 모두 해치우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길리어스를 죽이는 것이다.

“베로니카! 성문이다! 성문을 향해서 마법을 날려!”

엔디미온은 마법으로 길을 뚫어서 성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는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는 라이오넬의 뒷덜미를 잡아당겨서 성문을 향하게 했다. 그리고 베로니카의 마법이 주변의 모든 소리를 삼키며 날아가는 순간 힘차게 바닥을 박찼다.

“크아아아아악!”

“키에엑! 키에에엑!”

“놈들이 성 안으로 들어간다! 쫓아! 이 멍청한 악귀 놈들아! 쫓으라고!”

청색 빛의 징벌이 수십 마리의 악귀들을 일소해버린 후에 성문을 향해 곧장 이어지는 길이 생겼다. 엔디미온은 베로니카와 라이오넬의 뒷덜미를 붙잡고 냉큼 달렸고 그 뒤를 악귀들이 뒤쫓았다. 하지만 그들이 성배기사의 달리기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성문에 도착한 엔디미온은 발로 성문을 후려쳐서 박살냈다. 길리어스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 성문이었지만 성배기사의 발차기에는 모래성이나 다름이 없었다. 악귀들은 부서진 성문을 통해서 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엔디미온이 성검을 꺼내서 문루를 향해 힘껏 휘둘렀다.

신성한 일격에 맞은 문루는 여러 개의 바위로 변해서 아래로 떨어졌다. 성문이 있어야 할 자리를 거대한 바위들이 가로막았고 악귀들은 성 안으로 들어갈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한숨 돌렸군.”

“으에엑, 엔디미온 씨······. 저 속이 이상해요.”

“왜 약한 척이야. 일단 이것 좀 마셔.”

성 안으로 들어오니 상당히 조용했다. 덕분에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엔디미온은 베로니카에게 수통을 넘겨주었다. 베로니카는 감사히 성수를 마셨다.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지쳤던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고 두 모금을 더 마시자 바닥을 드러냈던 마력이 모두 회복됐다. 참으로 만능의 물건이었다.

“성수를 마시니까 좀 낫네요. 영감님도 목 좀 축이세요.”

라이오넬은 얌전히 수통을 받아서 성수를 마셨다. 그는 영웅이기에 악귀들을 좀 상대했다고 지치지는 않지만 갈증은 느꼈다. 엔디미온은 베로니카를 향해 말했다.

“수통.”

“영감님, 수통 달래요.”

“내 수통 말고 네 수통.”

내 수통은 왜? 베로니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통을 넘겨주자 엔디미온이 잠깐 손에 쥐고 있다가 다시 넘겨주었다. 베로니카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와, 고맙습니다!”

“성수를 마셨으니 이제 일해야지. 힘들 때마다 마셔라. 물을 구할 데 없으니까 아껴 마시고. 그거 마시면 마력을 전부 회복할 수 있으니까 꾀부리지 말고 열심히 일해.”

“······엔디미온 씨. 지금 그 말 엄청 악덕 고용주 같은 거 알아요? 성수만 있으면 다 된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데 몸은 가벼워져도 정신은 여전히 지쳐있거든요?”

“나약한 소리 하지 마. 하여튼 요즘 마법사들은 근성이 없어. 백 년 전에는 말이야, 이틀 내내 잠 한 번 안 자고 싸울 때도 있었다고.”

“그런 할아버지 같은 말은 됐거든요!”

베로니카가 빽 소리를 지르자 갑자기 라이오넬이 흡 소리를 냈다. 소리를 지른 것 때문에 또 정신이 나가버린 건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뒤에 정신을 집중해 주변의 소리를 들었다.

“누가 오고 있군.”

“그래, 한둘이 아닐세. 성 안에도 악마와 악귀들이 있는 모양이군.”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투알, 적들의 위치는?”

“오른쪽과 왼쪽에서 접근 중이오. 숫자는 대략 쉰. 어려운 상대는 아니오. 다만······.”

“다만?”

“성 안에도 많은 적들이 있소. 상당한 숫자요. 아무래도 저 안에 악귀들을 훈련하는 시설이 있는 모양이오.”

“그럼 길리어스는?”

“성 중심부. 아마 위치상으로는 집무실 쪽일 거요. 마르티레스 가문의 가주가 쓰던 바로 그 집무실 말이오.”

엔디미온과 에투알은 라우렌시오의 초대를 받아서 므셀라에 온 적이 있었다. 당연히 성 안 곳곳을 구경했었고 내부를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었다.

“바이올렛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고?”

“그녀의 기운은 없소. 여기에는 없는 모양이오.”

“그 녀석은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엔디미온은 쯧 하고 혀를 찬 후에 한 발자국 움직였다. 그 순간 에투알이 말했던 것처럼 좌우에서 악마와 악귀들이 나타났다. 악마는 오른쪽에만 있었고 그가 이 악귀들을 이끄는 대장인 듯 했다.

“너희는 누구냐? 귀쟁이들은 아닌 것 같고. 성기사들이냐?”

알 것 없다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내가 누구냐고? 잘 물었다!”

세상 모든 존재에게 자기 이름을 알리지 못해 안달이 난 라이오넬이 검을 휘두르며 뛰쳐나갔다.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저 미친 놈······. 엔디미온과 베로니카가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