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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저 녀석에게 맡기도록 하지.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검을 휘두르는 라이오넬은 악마와 악귀들의 시선을 끌기 딱 알맞았다. 엔디미온은 베로니카와 함께 정면으로 달렸다. 악귀들은 라이오넬의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오직 악마만이 그들이 달리는 것을 발견했다.
악마는 얼른 몸을 움직여서 엔디미온과 베로니카를 막아섰다. 그는 하반신이 말이고 상반신도 말이었는데 하반신에 달린 네 개의 다리 외에도 상반신에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었다. 양손 모두 단창을 들었고 그것을 현란하게 휘두르면서 엔디미온과 베로니카를 위협했다.
거센 콧김과 함께 시뻘건 안광을 빛내던 악마가 소리쳤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 어딜 살금살금 숨어들어가려고!”
엔디미온은 악마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특이하게 생겼군.”
베로니카도 동감했다. 상반신이 사람이고 하반신이 말인 반인반마의 괴물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있지만 상반신과 하반신이 모두 말인 괴물은 처음 봤다. 사람 머리가 달려있어야 할 곳에 말대가리가 붙어있으니 정말 기괴한 생김새였다.
“말조심해라! 나만큼 미남인 악마가 어디 있다고!”
“너는 거울도 안 보고 사냐.”
“하! 인간 따위가 뭘 알겠나! 이 남자다운 허벅지 근육! 이 남자다운 두꺼운 목! 이 남자다운 각선미!”
악마는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육체미를 뽐냈다. 거대한 체구의 말 악마가 근육 자랑을 하는 것은 별로 아름다운 장면이 아니었으므로 베로니카는 얼른 눈을 질끈 감았다. 엔디미온은 조용히 한 마디 했다. 제정신이 아니군.
“야, 말대가리.”
“마, 말대가리? 이 멍청한 놈! 내가 누구인지 알고 까부는 거냐!”
내가 그것까지 알아야 하나. 엔디미온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네가 누군데.”
악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입을 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므셀라의 주인이신 위대한 길리어스님의 측근 중의 측근! 길리어스님이 세력을 모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갔던 세 악마들 중 하나! 말하자면 개국공신! 이 미천한 인간아! 내 이름을 들어라! 그리고 벌벌 떨어라! 나는 쌍창의 오르트다!”
거창한 자기소개를 끝마친 후에 오르트는 양손의 든 창을 현란하게 휘둘렀다. 거대한 덩치답게 엄청난 근력을 가진 그는 두 개의 창을 바람개비처럼 돌렸고 그로 인해서 세찬 바람이 불었다. 엔디미온은 오 하고 소리를 냈다. 성기사들이 실력에 따라 이등기사니 일등기사니 나누어지는 것처럼 같은 악마라도 각기 강함의 수준이 달랐다.
지금 여기 있는 오르트는 제법 강한 축에 속하는 악마였다. 물론 대악마의 적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쌍창의 오르트라고 자칭할 정도의 실력은 있는 것이다. 부하의 수준을 봤으니 대장인 길리어스의 수준도 유추할 수 있었다. 길리어스는 아마 라가르디오와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그 정도 강함이라면 북부 요정들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더더욱 살려둘 수가 없겠군.”
“뭘 살려둘 수가 없어?”
엔디미온은 허리춤의 성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너희 전부 다.”
빛이 번쩍였다. 오르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번쩍이는 빛 때문에 눈이 멀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검을 뽑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일 수도 있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나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두 자루의 창은 반으로 갈라져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르트는 한 발자국 느리게 상황을 인지했다.
창이 잘렸다. 그것도 눈 깜짝할 새에. 우월한 악마의 시력으로도 감히 쫓아갈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오르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위험하다. 도망쳐야 한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이겠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오르트의 머리는 도망치라고 외쳤지만 그의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기세에서 압도당했다. 호랑이와 마주친 토끼처럼 다리는 덜덜 떨리기만 할 뿐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이대로면 죽는다.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촤악! 뜨거운 초록색 액체를 뿌리는 것과 동시에 바닥으로 말의 머리가 떨어졌다. 그리고 말의 몸통 역시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오르트를 해치운 엔디미온은 검에 묻은 오물을 털어내고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자.”
“휘유, 대단한데요. 역시 저 따위는 영웅들의 발끝도 따라가기 힘들겠어요.”
“내가 말했지. 영웅은 만들어지는 거라고. 너도 우리처럼 하루도 쉬지 않고 악마들과 싸웠으면 똑같이 됐을 거다.”
“으, 그런 방식으로 되는 영웅이라면 안 될래요. 너무 고통스럽잖아요.”
“그래, 고통스럽지.”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본래 화려하게 꾸며져 있어야 할 홀은 온갖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있었고 벽에 붙어있어야 할 커다란 모자이크는 다 깨져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뻥 뚫린 구멍을 통해서 차가운 바람이 들락날락거렸고 가구들은 완전히 박살나서 악귀들의 장난감이 돼버렸다.
“꼴이 말이 아니군.”
“흠, 라우렌시오가 봤으면 엄청 화를 냈을 거요.”
엔디미온과 에투알이 기억하던 므셀라 성의 아름다운 모습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곳은 본래 라우렌시오의 집이었으니 그가 왔다면 이 처참한 광경을 보고서 불 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그리고 마법으로 성 자체를 날려버리려고 했겠지.
“크르르릉······.”
사방에서 악귀들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들은 늑대를 닮은 것도 있었고 곰을 닮은 것도 있었다. 대부분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머리가 하나씩 더 많거나 덩치가 거대하거나 했다. 개중에는 날개가 달린 것도 있었는데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뒤에 날갯짓을 하는 식으로 공중을 날았다.
겁도 없이 엔디미온을 노리고 날아왔던 악귀는 베로니카가 날린 화염구에 맞고 고통스럽게 바닥을 굴러야 했다. 악귀 하나가 당하자 다른 악귀들이 호전적으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엔디미온은 베로니카를 보면서 말했다.
“나한테서 안 떨어지게 조심해라.”
“떨어지라고 해도 절대 안 떨어질 거라고요. 저는 제 목숨이 소중하거든요!”
“그래. 그럼 일단 나한테 업혀.”
“업히라고요? 갑자기?”
엔디미온은 정말 등에 업히라는 것처럼 자세를 낮췄다. 베로니카는 그의 널찍한 등을 보면서 당황했다.
“갑자기 왜 이래요?”
“난 여기서 이 허접한 놈들과 시답잖은 싸움을 할 생각이 없어. 지금부터 곧장 길리어스가 있는 곳까지 달릴 건데 너는 내가 뛰는 속도를 따라올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업히라고.”
“아하, 그런 거였군요. 진작 설명을 하시지.”
베로니카는 얼른 엔디미온의 등에 착 달라붙었다. 생각보다 승차감이 나쁘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한 손으로는 베로니카의 몸을 붙잡고 다른 한 손은 주먹을 쥐었다.
“지금부터 달린다. 너는 내 등 위에서 마법을 날려.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호기롭게 외쳤지만 베로니카는 모르고 있었다. 전력으로 달리는 엔디미온의 등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마법을 날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그녀는 언제나 엔디미온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기만 했을 뿐이지 업혀서 함께 달려본 적은 없었다.
그런 탓에 지금 이 순간 엔디미온이 힘차게 한 발자국 내달리는 순간 등 위에서 마법을 날리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인지를 깨달았다.
“으아아아아악! 이거 떨어진다! 무조건 떨어져! 떨어진다고요!”
“시끄럽네. 내가 한 손으로 잡고 있으니까 안 떨어져. 마법이나 날리라고.”
“안 돼요! 한 손이라도 떼는 순간 떨어진다니까요! 우웁! 나 속이 이상해요!”
“입 꾹 다물어라.”
엔디미온은 베로니카를 등에 업은 채로 질주했다. 그에게 달려드는 악귀들을 주먹 하나로 때려눕히면서 눈을 좌우로 빠르게 굴렸다.
“에투알! 어느 방향이냐!”
“오른쪽이오! 그 다음에는 직진! 그리고 왼쪽!”
에투알의 도움을 받는 엔디미온은 길리어스가 있는 곳까지 가장 빠른 경로로 달렸다. 비록 등에 베로니카를 업고 있고 주먹을 하나만 쓸 수 있다고 해도 악귀들 따위는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주먹을 번개처럼 휘둘러 악귀들을 때려눕힌 후에 거침없이 질주했다.
“엔디미온! 왼쪽! 창문이오!”
창문이라는 것은 그쪽으로 뛰어내리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반사적으로 왼쪽의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유리창이 깨지면서 거대한 새처럼 생긴 악귀가 뛰어들었다. 그것은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 엔디미온을 잡아채려고 했다.
“우웁! 저리 꺼져!”
하지만 그 전에 베로니카의 마법이 발사됐다. 빛의 창이 악귀의 날개를 관통했고 그 충격으로 악귀가 비틀거리다가 아래로 추락했다. 추락하면서도 엔디미온을 공격하려 했지만 그가 훌쩍 뛰었다가 다시 착지하면서 발로 머리를 으깨버렸기 때문에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뭐야, 할 수 있잖아.”
“······말 시키지 마세요. 저 지금 진짜 나올 것 같거든요.”
“삼켜.”
“삼키라니······.”
엔디미온은 픽 웃더니 다시 달렸다. 에투알의 탐지 능력, 엔디미온의 주먹, 베로니카의 마법. 이 세 가지 합쳐지니 길리어스의 방까지 가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이제 잠시 뒤면 도착이오!”
에투알의 외침에 엔디미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달려드는 악귀의 머리에 커다란 구멍을 내주고서 손을 한 번 털었다. 이제 좀 엔디미온의 속도에 적응한 베로니카는 위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것을 참으며 마법을 날렸다. 악마의 왼쪽 어깨가 날아가고 그 다음에 날아온 주먹에 의해 상반신이 질척한 고깃덩어리로 변했다.
“저 문이오! 이제 다 왔소!”
엔디미온은 복도의 끝에 위치한 커다란 문을 보았다. 저곳은 본래 백 년 전에 라우렌시오가 쓰던 집무실이었다. 지금은 길리어스의 침실이 됐을 뿐이지만.
쾅! 엔디미온은 곧장 문을 발로 차서 박살냈다. 그리고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왔군. 빨리 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빨라서 놀랐어.”
중후한 목소리였다. 악마치고 꽤 괜찮은 목소리라고 생각했던 베로니카는 엔디미온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광택이 나는 검은색의 매끈한 몸, 단단해 보이는 외골격, 잔망스럽게 움직이는 여섯 개의 다리, 머리에 달린 길쭉한 더듬이.
악마들은 본래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고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외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본질이 남을 괴롭히고 해악을 끼치는데 있기 때문이다. 베로니카는 지금까지 수많은 악마들을 봐왔기 때문에 어지간한 것에는 내성이 생겼다. 방금 전에 봤던 오르트 역시 기괴하게 생겼으나 별로 역겹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그런 그녀도 이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베로니카는 정말 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런 씹, 바퀴벌레? 우욱!”
거대한 바퀴벌레······가 아니라 악마 길리어스는 더듬이를 흔들면서 침입자들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