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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67화 (167/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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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라니? 초면에 대단히 기분 나쁜 소리를 하는군. 나는 바퀴벌레가 아니다. 므셀라의 진정한 주인이자 열 악마를 이끄는 자다. 내 이름을 들어라. 나는 길리어스다!”

길리어스가 여섯 개의 다리를 흔들거리면서 자기소개를 했지만 베로니카에게는 오히려 혐오감만 심어줄 뿐이었다.

“으악! 바퀴벌레가 말도 해! 엄청 큰데 말을 해! 악! 악!”

베로니카는 길리어스의 모습을 보기 싫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귀까찌 막아버렸다. 눈을 감고 목소리만 들으면 중후한 신사가 생각나는데 실제로는 거대한 바퀴벌레의 모습이라는 것은 제법 끔찍한 경험이었다. 때문에 두 눈과 귀를 모두 막아버린 것이다.

“흐음, 바퀴벌레라. 옛날에 많이 봤었지. 숙영 생활을 할 때면 자주 봤었소. 참으로 그리운 생물이오.”

베로니카와 다르게 에투알은 바퀴벌레에 대한 혐오감이 없었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라 성검이었으므로 일반인들과 감각이 달랐다. 때문에 바퀴벌레를 보더라도 참 오랜만에 본다는 감흥 외에는 없었다. 베로니카는 윽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길리어스.”

물론 엔디미온 역시 바퀴벌레 따위에 놀라지 않았다. 바퀴벌레란 것은 손가락만할 때도 징그러운 법이지만 그 크기가 몇 배로 커지면 징그러움은 몇 십 배가 되는 법이다. 하지만 거대한 바퀴벌레를 봤다고 놀라는 것은 성배기사가 할 만한 짓이 아니었다.

“널 죽이기 전에 물어볼 것이 있다.”

“뭐가 궁금하지, 성배기사?”

길리어스는 엔디미온이 성배기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악마라고 해도 모두가 엔디미온을 보자마자 정체를 알아차리는 것은 아니었다. 사도왕 로아니스는 다르디낭의 적자면서도 엔디미온의 정체를 곧장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길리어스는 특별했다. 감각이 민감하거나 아니면 머리 회전이 빠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날 아는군.”

“네가 올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거든.”

“이야기를 들어? 누구에게?”

“누구겠나. 마법사왕이지.”

마법사왕. 그 이름이 길리어스의 입에서 나왔다. 엘리야의 추측대로 길리어스는 바이올렛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이다. 엔디미온은 주먹을 꽉 쥐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마법사왕이 내가 여기로 올 거라고 알려줬다고?”

“그래, 너라면 룽고르의 모습을 보고 반드시 므셀라로 올 거라고 했지. 성배기사니까 분명히 북부 요정들을 위해 싸울 거라고 말이야.”

씁쓸한 일이었다. 함께 오랜 시간 동안 악마와 맞서 싸웠던 영웅은 성배기사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너는 성배기사가 올 것을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았다는 소리냐.”

“그래.”

“어째서지? 다르디낭의 적자도 아니고 일개 악마에 불과한 네가 날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잖나. 혹시 바이올렛이 네게 비장의 수를 남겨주고 간 거냐?”

“물론 널 상대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지. 그리고 비장의 수? 그런 것은 없어. 난 그냥 내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 널 상대할 뿐이다.”

엔디미온은 기시감을 느꼈다. 길리어스의 태도. 이것은 라티에티에서 상대했던 타리샤와 비슷한 태도였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싸운다. 대체 왜지? 시간 끌기인가? 하지만 무엇에 대한 시간 끌기란 말인가.

“너랑 길게 싸우고 있을 시간은 없겠다.”

“왜?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지?”

길리어스가 킬킬 웃었다. 거대한 바퀴벌레가 더듬이를 흔들면서 웃는 것은 별로 재밌는 장면이 아니었다.

“금방 끝내주마. 너 따위에게 성검을 쓰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엔디미온은 곧장 성검을 뽑았다. 빨리 적을 죽여야 할 상황이 아니라면 느긋하게 주먹을 휘두르며 길리어스의 외골격을 박살냈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하하하, 단칼에 죽으면 체면이 안 살 테니 나도 노력해야겠군.”

길리어스가 여섯 개의 다리로 바닥을 긁었다. 그의 외형은 바퀴벌레였지만 진짜 바퀴벌레와는 조금 다른 점을 가지고 있었다. 등껍질 위에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달려있었고 머리에도 두 개의 길쭉한 가시가 창처럼 솟아있었다. 강력한 악마들은 보통 거대한 크기를 가진 것과 달리 길리어스는 집무실의 절반을 차지하는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거대한 크기였지만 므셀라의 주인인 것치고는 조금 초라해보였다.

“그럼 단칼에 안 죽게 노력해봐라.”

엔디미온이 바닥을 박차고 뛰었고 베로니카는 싸움에 휘말리지 않게 뒤로 물러났다. 집무실은 아주 크지만 전투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은 장소였다. 엔디미온이 성검을 한 번 휘두르자 신성한 빛의 칼날이 날아가 집무실의 벽을 모두 잘라냈다. 길리어스는 무시무시한 공격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서 다리를 재빨리 움직였다.

그는 아직 남아있는 벽 위로 타고 올라가더니 엔디미온을 향해 도약했다. 거대한 바퀴벌레가 달려드는 모습은 제법 끔찍해서 베로니카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당황하지 않으며 검을 눕히고 정면을 향해 내질렀다.

길리어스의 도약은 결국 엔디미온의 검을 향해 뛰어드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길리어스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가 스산한 웃음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등이 들썩거렸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투명한 날개.

푸드드드드득! 시끄러운 날갯짓 소리와 함께 길리어스가 방향을 틀었다. 그는 성검에 찔리기 직전에 위로 날아올랐고 거대한 덩치를 이용해 그대로 천장을 부쉈다. 엔디미온은 하늘을 날고 있는 길리어스를 보고서 입을 열었다.

“뭐야, 바퀴벌레가 날기도 해?”

“종에 따라서는 날기도 한다고 들었소. 그래도 가까운 거리를 나는 정도지 저런 식으로 비행을 하지는 않지만.”

거대한 바퀴벌레가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은 굉장히 진귀한 구경거리였다. 엔디미온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바퀴벌레는 날 수도 있군.

“뭘 그리 멍하니 있나! 이제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거다!”

공중에서 날고 있는 길리어스가 머리의 뿔로 엔디미온을 겨누었다. 두 개의 뿔 사이에서 파지직 하고 전류 같은 것이 흐르더니 곧 끝부분에서 창백한 빛의 구가 생겨났다. 누가 보아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엔디미온은 망설이지 않고 성검을 바닥에 꽂았다. 그리고 베로니카를 향해 크게 외쳤다.

“베로니카! 내 뒤에 딱 붙어!”

“으아아아! 뭐가 날아온다!”

베로니카가 엔디미온의 등 뒤에 숨는 것과 동시에 길리어스의 뿔에서 엄청난 위력의 빛이 발사됐다. 성검이 내뿜은 신성력이 단단한 보호막을 만들었고 덕분에 베로니카와 엔디미온은 창백한 빛에 몸이 쓸려나가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엄청난 광량에 베로니카는 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저 두 귀로 사방의 모든 것들이 박살나고 있다는 것들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차츰 빛이 줄어들고 드디어 눈을 뜰 수 있게 됐을 때 그녀가 본 것은 공터로 변해버린 집무실이었다.

“이게 무슨······.”

베로니카는 길리어스가 무슨 수로 므셀라의 주인이 됐는지 알 것 같았다. 상대가 얼마나 많은 군세를 모았든 이런 공격을 한 번 갈겨버리면 적들은 모두 사기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 양떼를 공격하는 늑대처럼 날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제법이군.”

엔디미온은 바닥의 성검을 뽑고서 길리어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도 공중에서 날고 있었다. 근접전은 불리하니 바닥으로 내려올 생각은 없는 듯 했다.

“베로니카.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제가요?”

“그래. 네가 저 녀석을 떨어트리는 거야. 내가 주의를 끌지. 한 번에 성공해야 한다. 조심성이 많은 놈이니까 두 번은 안 당해줄 거야.”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할 일은 안전한 곳에 숨어서 길리어스를 마법으로 맞춰 떨어트리는 것이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다. 엔디미온은 성검을 들고서 한 발자국 전진했다.

“이 바퀴벌레 놈아! 어서 땅으로 내려와라! 정정당당하게 싸우자!”

“하하하, 정정당당? 웃기는군! 내가 지상으로 내려가면 수 초 만에 갈기갈기 찢겨버릴걸?”

알긴 아네. 엔디미온은 웃으며 성검을 휘둘렀다. 그에게 원거리 공격 수단은 검기를 날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신성력을 많이 소모하기에 자주 날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길리어스가 워낙 재빨라서 잘 맞지도 않았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쉬지 않고 검기를 날렸다. 화가 나서 마구잡이로 날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목적은 길리어스를 베로니카의 사정거리 안으로 모는 것이었다. 길리어스는 애초부터 엔디미온 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니 건물의 잔해 뒤로 숨은 베로니카에 대해서 눈치 채지 못했다.

“이 비겁한 녀석! 당장 땅으로 내려와!”

“하하하! 천하의 성배기사가 아무것도 못하는 꼴이란! 정말 우습군!”

화를 내면서 흥분한 연기를 한다. 그리고 일부러 길리어스의 조롱에 당해준다. 지금 엔디미온은 조금도 화가 나지 않고 조금도 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길리어스에게 충분히 먹혀들었다. 다시 한 번 검기를 날리며 길리어스의 위치를 조정한다. 뒤쪽에는 베로니카가 있다. 언제든 마법을 날릴 수 있게 준비한 상태로.

다시 한 번 검기가 허공을 갈랐다. 엔디미온은 이제 살짝 지쳤고 이마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렀다. 그 모습을 본 길리어스는 반격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공중에서 꼼짝도 않고 아까처럼 두 뿔 사이로 힘을 집중시켰겠지.

엔디미온은 지금 더없이 차분했다. 만약 길리어스가 그의 두 눈을 봤다면 이상함을 눈치 챘을 것이다. 하지만 성배기사를 농락하고 있다고 착각 중인 그는 그런 것을 알아차릴 시간이 없었다.

그게 바로 그의 실책이었다.

“죽어라, 더러운 바퀴벌레 녀석!”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뛰쳐나오는 거대한 빛. 그것은 무엇이든 태워버릴 듯한 거친 기세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그럴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날아오는 것은 화염의 창. 길리어스는 순간적으로 몸을 틀었지만 이미 늦었다. 화염의 창이 그의 날개를 불태우고 불길이 몸 위로 옮겨 붙었다.

날개가 없는 것은 추락한다. 지극히 당연한 진리에 의해서 길리어스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성배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창한 공격은 없었다. 그냥 손에 들고 있던 성검을 한 번 휘둘렀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길리어스의 몸은 두 개로 분리됐다.

“크억······.”

길리어스는 몸의 절반이 잘려나갔음에도 바로 절명하지 않았다. 정말 바퀴벌레다운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더 싸울 수가 없었다. 바닥을 길 수도 없었고 하늘을 날 수도 없었다. 끝이었다.

“약하구나, 길리어스.”

“크크큭······. 그래, 나는 약하지. 너에 비하면 아주 약해. 내가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별로 부끄러울 것도 없어.”

엔디미온은 서늘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이제 끝이다.”

“너는 완벽하게 네 승리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럼 아닌가?”

“아니, 싸움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어.”

큭큭 웃는 길리어스를 보며 엔디미온은 미간을 좁혔다. 설마 숨겨둔 수가 있는 건가? 하지만 길리어스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고 숨겨둔 수를 꺼내기에는 너무 늦은 듯 했다.

“나는 흔하고 흔한 악마일 뿐이었다. 하지만 마법사왕을 만나고 나서 달라졌지. 그녀에게 강력한 힘을 선물 받았고 그 덕분에 므셀라의 주인이 되었지. 그리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차근차근 군세를 모아 북부 요정들을 학살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크크큭······. 멍청한 놈. 마법사왕이 왜 보잘 것 없는 나에게 힘을 줬겠나? 이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기 위해서다! 설마 마법사왕이 나 하나에게만 같은 짓을 했을 것 같나? 그녀는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악마들에게 힘을 나누어주고 세력을 기르게 했다! 다시 한 번 이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기 위해서! 나는 여기서 죽는다! 하지만 마법사왕이 곳곳에 심은 혼란의 씨앗은 이제 막 싹이 트기 시작한 거다! 으하하하하! 전쟁은 이제부터야!”

엔디미온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길리어스를 베지 않고 돌아섰다. 악마에게 1초라도 낭비하는 것이 아깝게 느껴졌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를 향해 길리어스가 크게 웃으며 외쳤다.

“내 역할이 무엇인 것 같나, 성배기사! 나는 그저 미끼야! 널 꾀어내기 위한 미끼! 지금부터 열심히 엘다르로 돌아가야 할 걸! 아니,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 으하하하하!”

엔디미온은 제자리에 멈췄고 베로니카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두 사람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엘다르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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