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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68화 (16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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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 씨!”

비명에 가까운 베로니카의 외침에 엔디미온은 미간을 찡그렸다. 설마 이게 전부 함정이었을 줄이야. 그는 쯧 하고 혀를 차면서 성검으로 길리어스의 머리를 겨누었다. 단칼에 베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아직은 죽일 때가 아니었다. 그에게 들어야 할 대답이 있었다.

“하나만 묻자. 마법사왕의 목적은 내가 아니었나? 굳이 날 이곳으로 꾀어낸 후에 엘다르를 치는 이유가 뭐지?”

바이올렛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배기사를 죽이고 성배를 빼앗는 것이다. 엔디미온을 룽고르로 부른 것도 그러한 목적 때문이겠지만 정작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갑작스럽게 엘다르를 공격하고 있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엔디미온과의 싸움에 엘다르가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해서일까? 하지만 바이올렛은 영웅들의 숫자를 줄일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굳이 라우렌시오와 비다르를 살려서 보냈다. 영웅들 전부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고 자부하는 그녀가 겨우 요정 군대 따위가 두려워 치졸한 수를 쓸 리는 없었다.

정 엘다르의 군대가 걱정됐다면 지금 여기에 있는 므셀라의 길리어스에게 상대하라고 시키면 될 일이었다. 애초에 그것을 위해서 기르고 있던 군세가 아닌가?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뿐이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일단 엘다르로 돌아가야 했다. 엘다르를 지키고 바이올렛과 끝을 보기 위해서.

“증오하니까.”

“뭐?”

길리어스의 얼굴은 바퀴벌레의 것이었기 때문에 감정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즐거움이 묻어났다. 이런 질문을 받는 것 자체가 너무 재밌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것처럼.

“증오한다고. 바이올렛은 요정들을 증오해. 북부의 요정들을 증오한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증오하는 건 바로 라우렌시오야.”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엔디미온의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한 번 쓸어내렸다. 그는 영웅들을 이끄는 자로서 회의감을 느꼈다. 목숨을 건 전장에서 전우애가 생겨나는 법이고 영웅들은 강력한 적들에게 함께 맞서며 몇 년 동안이나 서로의 목숨을 지켜왔다. 당연히 서로 친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라이오넬은 비다르와 다시 만났을 때 사실 그를 싫어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이올렛은 사실 라우렌시오를 증오한다고 한다.

엔디미온은 대악마와의 싸움에서 그들 사이에 유대감이 자라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그딴 건 없고 그냥 그들은 공동의 목적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어이가 없네. 엔디미온은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마법사왕이 왜 엘다르를 공격했냐고? 라우렌시오에게도 똑같이 경험하게 해주기 위해서지. 자신이 경험했던 그 상실감을! 소중한 것을 잃는 고통을!”

길리어스가 음산하게 웃었다.

“그 말을 믿으라고?”

“마법사왕이 왜 굳이 라우렌시오에게 누명을 씌웠을까?”

엔디미온은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그거야 영웅들이 자기 일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그랬겠지.”

“그럼 왜 라우렌시오에게만 그랬지? 라이오넬은? 비다르는? 왜 다른 영웅들은 그냥 두고 라우렌시오에게만 그랬지? 답은 명확하지. 그를 증오하니까.”

그 말이 맞았다. 바이올렛은 다른 영웅들은 그냥 두고 라우렌시오에게만 누명을 씌웠다. 하려고 한다면 모두에게도 씌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제쳐두고. 그럼 바이올렛은 왜 라우렌시오를 증오하지?”

“내가 말해줄 수도 있지만 그건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게 어떠냐. 그래야 마법사왕의 분노를 좀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얻어낼 수 있을 만큼의 정보는 모두 얻어냈다. 이제 길리어스와 대화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엔디미온은 성검을 머리 위로 들었고 길리어스는 흐흐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엔디미온이 말했다.

“즐겁냐.”

“그럼 즐겁지. 영웅이란 작자들이 서로 반목하며 물어뜯는 모습이 즐겁지 않을 리가 없잖나.”

건방진 놈. 엔디미온은 망설임 없이 길리어스의 목을 잘랐다. 거대한 바퀴벌레의 머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가자.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엔디미온은 베로니카와 함께 곧장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창문을 쳐다보았다.

“베로니카, 이리로 와.”

“오······. 설마 아니겠지요?”

“맞으니까 빨리 와.”

베로니카는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엔디미온에게 다가갔다. 그는 베로니카를 안아들고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가 곧장 창문을 향해 뛰었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엔디미온은 아래로 추락했다. 그는 성검의 보호막도 사용하지 않고 맨몸으로 착지한 다음에 베로니카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그녀는 속이 울렁거리는지 우엑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라이오넬! 돌아간다!”

엔디미온이 크게 소리치자 끊임없이 몰려드는 악귀들을 상대하고 있던 라이오넬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렸고 곧 엔디미온과 합류해서 성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뒤를 쫓아오는 악귀들을 무시하며 엘다르 방향으로 달렸다. 한참 달리고 있는데 하늘 위에서 거대한 짐승의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나엘라티나 씨! 우리 여기 있어요! 나엘라티나 씨!”

하늘 위를 날아가는 나엘라티나였다. 그녀는 베로니카의 외침을 듣고서 바로 머리를 돌려 지상으로 착지했다. 불안한 자세로 지상에 착지한 나엘라티나는 변신도 해제하지 않고 용의 모습 그대로 다급하게 외쳤다.

“지금 마을에 난리가 났어! 악마와 악귀들이 엄청나게 많이 몰려왔어! 마을을 나가있던 순찰대들은 거의 다 당했고 지금 라우렌시오와 비다르가 적들을 막고 있기는 한데 엄청 위험한 상태야! 빨리 가야 해!”

빠르게 말을 주워섬기는 나엘라티나의 모습을 보니 상태가 몹시 심각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몸을 보니 곳곳에 비늘이 벗겨지고 발간 살이 드러난 것이 여기까지 오면서 적들에게 제법 공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엔디미온 일행은 재빨리 그녀의 등 위에 올라탔고 엘다르로 향했다.

“이럴 수가······.”

베로니카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신음을 흘렸다. 엘다르의 모습은 끔찍했다. 곳곳에서 불꽃이 치솟고 있었고 수많은 악귀들이 마을 안을 뛰어다니며 요정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순찰대를 이끄는 엘리야가 적들과 맞서고 있었지만 순찰대의 일부가 순찰을 위해 마을을 나간 상태였기에 숫자가 너무 적었다.

거기에 악귀들 뒤로 악마들까지 움직이고 있으니 그들만으로 막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엘다르에는 비다르와 라우렌시오가 있지만 그들은 이미 바이올렛과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악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거대한 문이었다.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칠해진 문은 마치 심연처럼 새까만 구멍을 가지고 있었고 그 안에서 쉬지 않고 악귀들이 튀어나왔다.

비다르와 라우렌시오, 그리고 순찰대가 아무리 열심히 악귀들을 해치워도 적들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았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단 저 문부터 없애야 했다.

“내려간다! 다들 조심해!”

나엘라티나는 빠르게 하강했고 엔디미온 일행은 그대로 땅으로 뛰어내렸다. 그들이 등에서 내리자 나엘라티나는 발톱으로 악귀들을 후려치며 다시 상승했다. 적들의 숫자가 많으니 본래 모습으로 싸울 생각인 듯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엔디미온은 달려드는 악귀의 머리를 주먹으로 부순 후에 성큼성큼 걸었다. 악귀들 따위야 무기를 뽑을 것도 없이 주먹만 휘둘러도 대처가 가능했다. 그는 순식간에 열 마리도 넘는 악귀들을 때려죽인 후에 라우렌시오와 비다르를 발견했다.

“라우렌시오! 비다르! 이게 다 무슨 일이냐?”

검으로 악귀의 목을 자르고 마법으로 악마를 날려보내던 라우렌시오가 엔디미온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벌써 왔구나! 다행이야. 덕분에 급한 불은 끌 수 있겠어.”

“아니, 무슨 일이냐고. 왜 갑자기 마을에 악마와 악귀들이 나타난 거냐?”

“우리도 잘 모르겠어. 갑자기 저 문이 나타났고 저기서 악마와 악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어. 저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아무런 전조도 없이 저런 거대한 문이 나타나다니. 저게 바이올렛이 한 짓이라고 해도 마법인 이상 나한테 들키지 않고 문을 만들 수는 없어. 미리 준비를 해두지 않은 이상······.”

말을 하던 중에 라우렌시오가 갑자기 아 소리를 냈다. 그는 칫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아니, 미리 준비를 해뒀겠군. 우리를 룽고르로 부른 건 바이올렛이야. 그녀가 모습을 숨기고 엘다르에 미리 수작을 부려놨을 가능성은 농후해. 이건 바이올렛의 짓이야. 그런데 이상하군. 왜 엘다르지? 여기를 노릴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우리를 엘다르로 부르면 됐잖아? 그리고 겨우 이런 악마와 악귀들 따위로 우리를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그럴 리가 없어. 바이올렛의 생각을 알 수가 없군.”

자기 혼자 빠르게 말을 내뱉는 라우렌시오를 보며 엔디미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우렌시오, 혹시 너 바이올렛에게 미움 받을 만한 짓을 한 적 있나?”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미움 받을 짓? 그럴 리가. 영웅들 중에서 그녀랑 가장 친한 게 나야. 바이올렛의 대화 수준에 어울려줄 수 있었던 건 같은 마법사인 나뿐이었다고. 마법 연구도 몇 번 같이 하기도 했고. 물론 난 조수 역할에 가까웠지만.”

라우렌시오는 바이올렛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 하지만 보통 잘못한 사람은 자기 잘못을 잘 모르는 법이다. 어쩌면 그 자신도 모르게 바이올렛에게 미움을 살 만한 짓을 한 것은 아닐까?

“길리어스가 그러더군. 바이올렛은 널 증오한다고.”

“······뭐?”

라우렌시오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잠시 뒤에 입을 열고 더듬더듬 목소리를 냈다.

“나, 날 증오한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증오해? 대체 왜?”

“그거야 나도 모르지. 생각나는 거 없어?”

“아니, 대체 날 왜? 이해가 안 가는군. 싫어할 거면 비다르를 싫어했어야지. 비다르가 바이올렛한테 사실 옛날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고 했거든.”

“······.”

이 자식들은 서로 친구가 맞는 걸까? 라이오넬은 비다르를 싫어하고 비다르는 바이올렛을 싫어하고 바이올렛은 라우렌시오를 싫어한다. 그럼 라우렌시오는 누구를 싫어하는 걸까. 서로 결속하여 거대한 악에 맞서야 할 영웅들이 사실은 서로를 싫어한다니. 엔디미온은 오랜만에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꼈다.

혹시 영웅들이 의무를 저버리고 도망친 것은 사실 성배기사랑 같이 있기 싫어서가 아닐까. 엔디미온은 가능성 있는 상상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 부분은 됐고 일단은 마을부터 구하자. 혹시 주변에서 바이올렛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나?”

“이 주변에 바이올렛은 없는 것 같아.”

“그럼 다른 곳에 있는 건가.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하고 성도를 공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게 정말이야?”

“내 추측일 뿐이야.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바이올렛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거야. 백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세상을 불태울 거대한 전쟁 말이야.”

라우렌시오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꼭 막아야겠군.”

“그래. 이제 전쟁이라면 사양이야.”

엔디미온과 라우렌시오는 검을 들고서 나란히 섰다. 백 년 전의 그때처럼. 엔디미온은 달려오는 악마를 쳐다보다가 문득 말했다.

“······그런데 혹시 나한테 서운하거나 그런 건 없지?”

“없는데.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없으면 됐어.”

엔디미온은 헛기침을 하며 악마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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