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69화 (169/199)

169

“야, 엔디미온! 일단 저 문부터 해결해야 해!”

비다르가 외치는 소리에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얼른 바이올렛을 찾아내 그녀를 막아야 했기에 여기서 악마와 악귀들 따위를 상대하고 있을 수 없었다. 일단은 적들을 쉬지 않고 뱉어내는 문을 없애버리기로 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며 거치적거리는 악귀들을 망설임 없이 베었다. 그리고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로 말했다.

“비다르, 라우렌시오, 그리고 라이오넬. 너희 셋은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보호해라. 그리고 베로니카, 네 역할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이 바로 마법사였다. 본래라면 라우렌시오가 잔챙이 악귀들 따위는 한 번에 쓸어버렸겠지만 그는 지금 바이올렛의 저주 때문에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다. 때문에 지금은 베로니카가 그의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

할 수 있을까. 걱정은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해야 하는 일이란 사실을.

“문을 부수게 둘 것 같으냐! 너는 내가 상대해주마!”

고함을 치며 길을 가로막은 것은 커다란 덩치를 가진 악마였다. 그의 하반신은 뱀이었고 상반신은 여섯 개의 손을 가진 거인이었다. 그가 각 손에 든 몽둥이를 휘두르며 엔디미온을 위협했다. 이곳에 나타난 악마들 중에서 제법 강한 축에 드는 것 같아서 엔디미온은 얼른 헤치우고 나아가려고 했다.

꾸물거리는 하반신으로 엔디미온에게 다가온 악마가 오른쪽에 든 세 개의 몽둥이를 한꺼번에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시야에서 악마의 모습이 사라졌다. 무언가에 의해 하늘 위로 끌려가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들었고 하늘 위를 나는 나엘라티나를 보았다. 하늘을 날던 용은 순식간에 강하하며 악마의 머리를 붙잡고서 다시 위쪽으로 상승한 것이다.

머리를 붙잡힌 악마는 당연히 여섯 개의 손을 휘두르면서 발버둥을 쳤고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몽둥이에 나엘라티나의 발이 맞았다. 거대한 울음소리가 들리고 악마는 드디어 나엘라티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날개가 없는 생물이었다. 당연히 그대로 땅으로 추락했고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지상에 진동을 일으켰다.

강력한 힘을 가진 악마였기에 추락의 충격으로 즉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상당한 충격이었던 것은 틀림이 없었다. 악마는 다시 몸을 일으키며 나엘라티나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하늘 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다음 먹잇감을 노리고 있었다.

“이 멍청한 도마뱀 새끼! 한때 같은 주인을 모셨으면서 감히 배신을 해! 너는 징벌이 두렵지도 않으냐!”

“하! 징벌?”

하늘 위에서 빙글빙글 돌던 나엘라티나가 악마를 노려보며 외쳤다.

“개소리! 내가 대악마 밑에서 일했던 건 내 의지가 아니었어! 나는 대악마를 증오해! 징벌이 두렵지 않느냐고? 대단할 것도 없는 놈이 마법사왕을 믿고 설치는 모양인데 너희는 결국 대악마와 똑같은 꼴이 될 거다! 성배기사가 너희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일 거니까!”

아니, 가만히 있는 나는 왜 걸고 넘어져. 엔디미온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사실 나엘라티나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성배기사는 결코 악을 그냥 두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지껄이는 꼴이란! 마음대로 지껄여라! 결국 마지막에 웃는 것은 우리다! 너는 그때가 되면 배신할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

“하! 내가 단언하는데 그럴 일은 절대로 없어!”

엔디미온은 말싸움을 하는 나엘라티나와 악마를 번갈아보다가 다시 문을 향해 움직였다. 둘이 사이가 나쁜 걸 보니 악마는 나엘라티나가 어련히 알아서 해결하겠지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몇 발자국 걷다가 문득 든 생각에 다시 몸을 뒤로 돌렸다.

나는 것 말고는 잘하는 게 없는 저 멍청한 도마뱀이 악마에게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엔디미온에게 나엘라티나의 존재는 몹시 중요했다. 그녀는 흔치 않은 날아다니는 탈것이니까.

엔디미온은 성검을 세게 쥐고서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힘껏 바닥을 박찼다. 그의 엄청난 각력을 이기지 못한 바닥이 박살나면서 사방으로 돌조각이 튀었다. 엔디미온이 노리는 것은 악마의 목이었다. 세상 그 어떤 적이든 일단 머리를 베면 죽는다. 아니면 심장을 찌르거나.

휙!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검이 악마의 머리를 노렸다.

“비겁하게 기습이냐!”

악마의 어깨가 움직일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등 뒤로 완전히 돌아간 손은 성검을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고 그것은 당연하게도 반으로 잘려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 반격이 약간의 시간을 벌어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 사이에 악마는 뒤로 스르륵 물러났고 간발의 차로 목을 지킬 수 있었다.

엔디미온은 호 소리를 냈다. 제법 빠르네. 건성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갑자기 악마의 목에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그리고 목이 천천히 돌아가면서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히 이상한 방향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목이 돌아갈 수 있는 회전각을 무시하고서 엔디미온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뚝. 악마의 목이 완전히 돌아가서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여섯 개의 손을 달고 있는 어깨들도 마찬가지로 홱 돌아가서 엔디미온을 향했다.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는데 다른 부위들은 뒤쪽을 보고 있는 기이한 모습에 엔디미온은 허 소리를 냈다.

“······무슨 그런 기능도 있냐?”

“성가시군! 너부터 죽여주마!”

악마는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엔디미온을 향해 질주했다. 다섯 개의 몽둥이와 한 개의 주먹을 휘두르며 엔디미온을 곤죽으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공격은 무의미했다. 몽둥이를 휘두르는 힘을 강력했지만 맞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

악마는 빨랐으나 성배기사는 그것보다 더 빨랐다. 엔디미온은 재빠르게 움직이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손이 여섯 개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공격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많은 공격 기회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빈틈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사슬갑옷의 사슬이 촘촘하면 촘촘할수록 찌르기 힘들어지는 것처럼.

일반적인 성기사라면 여섯 개의 손을 가진 악마에게서 빈틈을 찾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달랐다. 성배기사는 빈틈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힘으로 빈틈을 만들어냈다. 사슬갑옷의 틈 사이를 찌르기 힘들다면 그냥 찢어버리는 것이다. 강력한 힘으로 사슬을 찢어버리고 억지로 만들어낸 빈틈에 검을 찌른다. 성배기사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크아악!”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고깃덩어리가 날아간다. 악마는 손을 하나씩 잃어갔고 이제는 왼쪽 상단의 것 하나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억지로 만들어낸 빈틈을 보았다.

압도. 성배기사는 압도했고 악마는 압도당했다. 단지 그것뿐인 싸움이었다.

“커흐흑! 너, 너, 너 이 자식······.”

성검이 악마의 심장을 관통했다. 싸움은 거기서 끝이었다. 엔디미온은 곧장 뒤로 돌아서 다시 문을 향해 움직였다. 이제 그를 막을 상대는 없었다. 악귀들은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았고 악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금 그가 죽인 악마가 그들 중에서 가장 강한 존재였다. 성배기사의 압도적인 힘을 목도한 악마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사렸다. 덕분에 엔디미온은 크게 방해를 받지 않고 문과 마주할 수 있었다.

“이것만 부수면 일단 급한 불은 끄는 셈이오.”

“그래. 빠르게 부수고 주변 정리 좀 하자고.”

엔디미온은 성검을 세게 쥐고서 문을 쳐다보았다. 지금도 악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뒤에서 날아오는 베로니카의 마법에 의해 엔디미온에게는 감히 접근할 수도 없었다.

문은 악마들도 통과할 수 있게 거대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엔디미온의 키보다도 배는 컸다. 그가 인간들 중에서도 굉장히 큰 키를 가지고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문의 크기는 엄청난 셈이었다.

성배기사는 성검을 쥐고서 칼날에 신성력을 집중했다. 이만큼이면 되겠지. 적당한 양의 신성력을 뽑아낸 후에 문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챙!

“음?”

챙 하는 금속음은 그가 생각했던 소리가 아니었다. 문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몰라도 신성력을 두른 성검에 맞았다면 단칼에 토막이 나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문은 약간의 흠집만 나고 멀쩡했다. 신성력이 부족했나? 엔디미온이 미간을 좁히며 다시 한 번 검을 휘두르려고 할 때였다.

우우우웅! 문 안쪽에서 소용돌이가 치더니 갑자기 보라색 광선을 발사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엔디미온은 정면으로 맞고 말았다. 물론 그의 단단한 육체는 그런 공격에 앓는 소리를 낼 만큼 약하지 않았다. 뒤쪽까지 날아간 그는 얼얼한 손목을 탈탈 털면서 문을 쳐다보았다.

그 안에서 무언가 나오고 있었다. 길쭉한 다리, 늘씬한 몸, 뾰족한 귀.

“기껏 만든 문을 부수면 곤란하지. 적어도 내가 나올 때까지는 기다려주겠어?”

굽이치며 흘러내리는 보라색 머리카락. 그리고 똑같은 색깔의 눈. 엔디미온은 입을 다물었다. 드디어 나타났다.

대마법사 바이올렛. 아니, 룽고르의 마법사왕.

“우리를 이곳에 처박아두고 다른 곳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군.”

“하하하, 엔디미온. 난 그런 짓을 할 만큼 비겁하지 않아. 겁쟁이도 아니고.”

싱긋 웃는 바이올렛을 보며 엔디미온이 조소했다.

“악마 새끼들이 붙어먹으면서 성격까지 비열해진 줄 알았지. 그래도 한때 영웅이라고 비겁한 짓거리는 안 한다는 거냐?”

그 말에 바이올렛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마음대로 지껄여.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 똑똑히 말하지. 난 네가 무슨 이유로 이따위 짓을 하는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 나는 해야 할 일을 할뿐이고 그건 널 박살내는 거야.”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군. 해야 할 일, 의무, 그딴 게 다 뭐라고. 엔디미온, 너는 그 어떤 진실도 궁금하지 않다는 거야?”

“그래. 알아야 할 이유가 있나?”

멍청한 놈. 바이올렛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거친 바람이 불었다. 자연적으로 부는 바람이 아니었다. 무언가 날아오면서 일으키는 바람이었다.

“바이올렛! 이 빌어먹을 년! 내 친구들의 원수!”

그것은 바이올렛을 보고 눈이 돌아간 나엘라티나가 일으킨 바람이었다. 그녀는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바이올렛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바이올렛의 머리통을 박살내버릴 생각이었다.

“이 도마뱀은 또 뭐야?”

바이올렛은 얼굴을 찡그렸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불꽃이 일면서 나엘라티나의 날개가 찢어졌다. 화염은 용의 몸을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타올랐고 고통을 이기지 못한 나엘라티나는 그대로 지상으로 추락했다.

“네 애완동물인가, 엔디미온?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용을 길들일 줄은 몰랐는데.”

“애완동물은 아니고 탈것.”

“탈것? 아하, 그런 거였어. 어쩐지 생각한 것보다 더 빠르게 도착했더라니.”

바이올렛이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나엘라티나의 몸을 태우던 불꽃이 사라졌다. 나엘라티나는 끙끙 앓는 소리만 낼 뿐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자비로운 척이라도 하는 거냐.”

“시체가 깨끗할수록 되살리기 쉽거든. 그것뿐이야.”

엔디미온은 흐음 소리를 냈다. 바이올렛은 지금까지 몇 마리나 되는 용들을 죽였을까. 그들 모두를 되살려서 각 도시로 보낸다면 솔직히 막아내기 힘들었다. 성벽은 악마와 악귀들을 막아내는데 효과적이지만 하늘을 나는 용에게는 아무 효과도 없으니까.

“날 여기까지 부르고 굳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나직한 목소리에 바이올렛이 입술을 비뚜름하게 기울였다.

“이제 끝을 보자는 거겠지?”

“그래.”

바이올렛의 두 눈에서 스산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제는 끝을 봐야지, 성배기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