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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렛과 엔디미온은 서로를 노려보았고 두 사람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휘몰아쳤다. 한때 전우였으나 지금은 죽여야 할 적이었다. 하지만 백 년 만에 완전히 뒤바뀌어버린 사이를 섧게 여기는 자는 없었다.
대마법사와 성배기사, 둘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오직 해야 할 일에만 집중했다.
엔디미온은 성검을 들었고 바이올렛은 손끝에 마력을 모았다. 당장 싸움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강함을 알기에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목소리를 낸 자가 있었다.
“바이올렛,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소······. 나는 당신이 얼마나 심성이 고운 자인지 잘 알고 있소. 언제나 가장 위험한 전투에 홀로 나가서 싸우고 병사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소. 격렬한 전투 끝에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면 남몰래 눈물을 짓던 그 모습도 기억하고 있소.”
바이올렛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검 에투알은 울먹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이는 거요? 나는 룽고르에서 당신이 한 짓을 보았소. 그곳은 당신의 고향이잖소. 대체 왜 그들을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모습으로 만들어버린 거요? 왜 그들에게 그런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었소?”
침통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대체 왜 우리를 배신하고 세상을 전란에 휩싸이게 만들려는 거요?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소, 바이올렛. 우리는 친구였잖소······.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던 거요?”
바이올렛은 마력을 모으고 손을 오므려 음산한 기운을 흩어지게 했다. 차갑게 굳어 있던 그녀의 얼굴이 약간이나마 누그러졌다. 벌린 입술을 통해 나오는 목소리 역시 조금은 따듯했다.
“뤼미에르, 별의 공주. 세상의 선의와 순수로 만들어진 내 친구.”
엔디미온은 바이올렛이 떠드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너는 언제나 그랬지. 사람의 선의를 믿고 그들의 양심을 믿었다. 너는 악의라고는 모르는 순수한 소녀와 같아서 볼 때마다 언제나 불안했다. 그 깨끗한 마음이 언젠가는 더럽혀질 것 같아서. 시궁창에 처박힌 장미처럼 끝없는 불행을 맛보게 될 것 같아서. 하지만 다행이구나. 아직도 너는 순수하게 빛나고 있으니.”
바이올렛의 목소리는 덤덤했으나 약간의 열기가 묻어났다.
“그래서 너는 날 이해할 수 없는 거야. 너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사람의 악의를, 그들의 추악한 밑바닥을. 뤼미에르,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물었지? 답은 간단해. 증오하니까.”
“북부 요정들을 말이냐?”
엔디미온이 불쑥 내뱉은 말에 바이올렛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길리어스에게 들었나?”
“그 벌레 놈이 술술 불더라고. 덕분에 고문을 하지 않아도 돼서 시간을 아꼈지.”
“원래 반만 아는 놈들이 신나서 떠드는 법이지. 북부 요정들을 증오하느냐고? 아니.”
바이올렛이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대로 도망치려는 게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그녀의 몸에서 마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했고 엔디미온은 반사적으로 성검으로 겨누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나는 이 세상을 증오해! 사람들 전부를 증오한다고! 내게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내 노력은! 내 선의는! 내 희망은! 모두 이 빌어먹을 세상에게 짓밟혔다고!”
휘몰아치는 마력이 심상치 않았다. 당하기 전에 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엔디미온이 바닥을 박차고 뛰는 순간 베로니카의 몸에서 엄청난 위력이 빛이 발사됐다. 보라색으로 번쩍이는 광선은 다시 한 번 성배기사의 몸을 뒤로 밀어냈다. 두 다리를 땅에 박고서 버티려고 해도 바닥이 가루가 되면서 몸이 뒤로 밀려났다.
상당한 거리를 밀려난 엔디미온은 다시 한 번 바이올렛과의 거리를 좁히려고 했다. 하지만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수백 개의 창들이 그를 노리고 날아왔다. 베로니카는 물론이고 라우렌시오조차 보여주지 못한 엄청난 공격이었다.
엔디미온은 쏜쌀같이 날아오는 창들을 보면서 뒤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그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 뒤쪽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도망쳐! 모두 도망치라고!”
대마법사라 불리는 바이올렛이 진심으로 날린 수백 개의 창을 모두 막아낼 방법은 없다. 아무리 성배기사라고 해도, 아무리 성검을 들었다고 해도, 그것은 명백하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수백 개의 창들 중 몇 십 개만이라도 그의 등 뒤로 넘어간다면 엘다르의 요정들은 극심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내가 막을게! 모두 도망쳐! 전부 도망치라고! 엘리야, 순찰대와 주민들을 이끌고 뒤로 물러나라! 어디든 가!”
라우렌시오가 다급하게 뛰어나오며 마법을 사용했다. 힘이 약화된 탓에 초라한 수준의 보호막이 만들어졌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저도 도울게요!”
베로니카도 뛰쳐나왔다. 그녀는 솔직히 두려웠다. 압도적인 수준 차이. 같은 마법사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규모의 마법을 보고서 두렵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두려움을 이겨냈다. 그녀는 어째서 엔디미온과 영웅들이 강한지 알고 있었다.
해야 할 일로부터 도망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능력이 강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용기가 강한 것이다.
“이런 씹! 이거 다 죽는 거 아니야? 야, 라이오넬! 너도 와서 막아!”
비다르는 주변의 바위를 집어던져서 날아오는 창 몇 개를 부쉈다. 그리고 다른 영웅들과 달리 힘이 약해지지 않은 라이오넬은 재빠르게 뛰어다니며 검으로 창들을 쳐냈다. 그 속도는 과연 천둥검이었다.
“에투알!”
엔디미온은 성검을 바닥에 꼽고서 두 손을 모았다. 그 순간 눈이 멀어버릴 듯한 빛이 터져나오며 주변의 모든 것을 감쌌다. 성배와 성검으로부터 나온 신성한 빛이 사악한 기운을 막아낼 성벽이 되었다.
날아오는 창과 빛의 성벽이 부딪치는 순간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연달아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영웅 행세를 하려는 거냐?”
비웃음이 가득한 날선 목소리. 엔디미온은 바이올렛이 지껄이는 것을 무시하고 다시 한 번 신성력을 뿜어냈다.
“넌 아무것도 지킬 수 없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콰지직! 무언가 우그러지는 소리였다. 엔디미온은 반사적으로 눈을 떴고 그 순간 빛의 성벽을 찢어발기는 거인의 손을 보았다. 그리고 그 틈을 통해서 쏜살같이 날아가는 창도.
슈우우욱! 쾅! 창은 엔디미온의 바로 곁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등 뒤에서 터졌다. 등에서 느껴지는 열기와 사악한 기운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엔디미온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굉음만이 있었고 비명은 없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은 것일까? 아니다. 그 누구도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이다.
“······바이올렛.”
엔디미온의 목소리는 낮았다. 덤덤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는 짐승의 것처럼 낮게 으르렁대고 있었다.
“지금 난 널 용서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다행이군. 그런 마음가짐으로 덤벼주지 않으면 곤란하거든!”
엔디미온은 넝마가 돼버린 자신의 상의를 손으로 찢었다. 단련된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은 마치 성이 난 것처럼 불끈거렸다. 성배기사는 왼손을 들면서 말했다.
“너희는 나서지 마라. 라이오넬과 베로니카는 악마와 악귀들을 상대해라. 비다르는 마을 사람들을 지키고. 라우렌시오, 너는 나엘라티나의 상태를 봐주고.”
각자가 해야 할 일을 정해주고 나서 엔디미온은 천천히 바이올렛을 향해 걸어갔다. 빠르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위협적으로 보였다. 이윽고 그가 처음에 위치에 섰을 때였다. 바이올렛은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날 이길 수 없어.”
그 말에 엔디미온은 저도 모르게 풋 웃고 말았다.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이지만 웃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말이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게 들려서.
“지금까지 나한테 그런 말을 한 놈들은 많았지. 그 녀석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나?”
“······뭐?”
뜬금없는 질문에 바이올렛이 얼굴을 찡그렸다. 엔디미온은 그 사이에 웃음을 거두고서 말했다.
“전부 뒈졌다.”
“······이제는 나쁜 말도 제법 배웠군. 백 년 전이랑 달라졌어.”
빈정거리는 말이었지만 엔디미온은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백 년 전의 그 얼치기는 이제 없다. 네가 백 년 동안 변한 것처럼 나 역시 변했으니까.”
“아니, 너는 변하지 않았어. 변한 척 하는 거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그 빌어먹을 의무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내가 사람들을 지키고.”
한 발자국.
“사악한 것들을 물리치고.”
두 발자국.
“호수의 여왕과 전능자의 뜻을 받드는 것은.”
세 발자국.
“그게 내 의무이기 전에 힘 있는 자로서 지켜야 할 도리이기 때문이다.”
“도리라고?”
“그래.”
바이올렛은 입술을 기울이며 냉소했다.
“결국 말장난일 뿐이야. 너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호수의 여왕이 부리는 인형일 뿐이지!”
“내가 달라졌는지 아닌지는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라.”
성검에 신성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본래 흰색으로 빛나던 검신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황금색 빛으로 물들었다. 엔디미온은 자세를 낮추며 다리 근육을 압박했다. 그리고 튕겨나오는 힘을 이용해 바닥을 부수며 뛰었다.
그것은 질주가 아니었다. 거의 점멸 마법에 가까울 정도의 속도였다. 본래 있던 자리에서 바이올렛이 있는 곳까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성검을 휘둘렀다.
쾅! 검이 사람의 목을 베는 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 딱딱한 것에 성검이 부딪쳤고 바이올렛은 웃었다. 엔디미온은 자신을 가로막는 단단한 보호막을 보았다. 그것은 잘게 금이 갔고 곧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잠깐의 틈. 바이올렛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슈우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사악한 기운을 담은 화살들이 엔디미온을 향해 날아왔다. 몸에 직격하기까지 찰나의 시간. 엔디미온은 발을 들어서 바이올렛의 몸을 힘껏 걷어찼고 그녀가 멀리 날아가는 것과 동시에 성검을 휘둘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였다. 화살이 날아오는 것도, 검을 휘둘러서 쳐내는 것도. 공격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바람이 불어서 그 누구도 접근할 수가 없었다. 수백 조각으로 갈라진 화살들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엔디미온은 다시 움직였다.
바이올렛은 공중에 떠있었다. 발차기에 맞고 몸이 공중으로 붕 떴을 때 비행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녀는 뼈가 부러진 것처럼 왼손으로 자신의 갈비뼈를 쓰다듬었다. 얼굴을 찡그린 채로 오른손을 휘두르자 머리 위에 검은색 구체가 생겼다. 그것은 회전하고 있었고 중앙 부분에서 날카로운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검은색 구체는 오른손을 따라서 생겨났다.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까지, 하늘을 가리고 태양의 빛을 삼킬 만큼 수많은 개수가.
완벽한 어둠의 시간 속에서 바이올렛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죽어.”
하늘에서는 칼날의 비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