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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71화 (171/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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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 씨!”

뒤에서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베로니카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마법사인 그녀는 바이올렛이 사용한 저 마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 바이올렛은 한 번 쓰는 것도 어려운 마법을 수십 번이나 연달아 사용했다.

성배기사를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서. 아무리 엔디미온이라도 저런 공격에서 무사할 수는 없었다. 베로니카는 본능적으로 엔디미온을 향해서 뛰었다. 바이올렛에 비하면 개미만도 못한 실력이지만 조금이라도 엔디미온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힘차게 뛰쳐나가던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면서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뛰쳐나가는 힘과 붙잡는 힘이 서로 상충하여 순간적으로 어깨가 빠질 뻔한 베로니카는 악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비다르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야, 뭐해? 미쳤어? 저기가 어디라고 뛰어가?”

“하지만 엔디미온 씨가 위험하다고요!”

“너 가봤자 아무것도 달라지는 거 없어! 객기 그만 부리고 뒤로 물러나. 우리도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하, 하지만······.”

비다르와 베로니카가 실랑이하는 사이에 하늘 위에서 떨어진 칼날들이 바닥에 직격했다. 그것들은 단순한 검이 아니라 무언가와 부딪치면 불꽃을 일으키고 굉음을 발생시키며 엄청난 충격을 발산했다.

하나만으로도 집 한 채를 부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충격을 발생시켰다. 그런 것들이 수백 개씩 떨어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꺄아아악!”

지진이 발생한 듯한 착각이 들었다. 화산이 터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수백 개의 칼날들은 지상을 뒤흔드는 거인의 발자국이었으며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업화였다. 단 한 명의 마법사가 불러일으킨 재앙은 지상에 지옥을 현현하게 만들었다.

요정들이 살던 집들은 모두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영웅들과 싸우던 악마와 악귀들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질척한 고깃덩어리로 변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징벌은 공정하게 모든 것들을 벌했다.

“야, 괜찮냐?”

비다르는 쓰라린 등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며 베로니카를 쳐다보았다. 칼날들이 지상을 뒤흔들기 직전에 그가 베로니카를 몸으로 감싸 보호했기에 그녀는 그다지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눈에 초점이 흐린 것이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칫 하고 혀를 찬 비다르는 베로니카를 안고서 그대로 도망쳤다. 라이오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 싸움에서 멀어져야 한다고 느꼈다.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 그는 바이올렛의 상대가 되지 않으니까.

“비다르! 라이오넬이랑 같이 엘리야를 쫓아가! 나도 곧 갈게!”

라우렌시오는 등에 나엘라티나를 업고 있었다. 용의 모습으로 기절했던 나엘라티나는 라우렌시오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겨우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비다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라이오넬과 함께 달렸고 곧 라우렌시오도 뒤를 따랐다.

이제 엘다르에 남은 것은 엔디미온과 바이올렛뿐이었다.

“역시나 튼튼한걸.”

코끝을 찌르는 매캐한 냄새와 검은 연기가 걷히고 엔디미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 곳곳이 상처투성이였고 검댕이 묻어 있었다. 머리카락의 일부도 타서 바사삭 소리를 내며 바람과 함께 날아갔다. 하지만 그는 아직 두 다리로 서있었다.

그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끝이냐.”

엔디미온은 숨을 한껏 들이켰다가 다시 내뱉으며 말했다.

“끝이냐고.”

“끝이라고 한다면······.”

바이올렛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쩔 셈이지?”

“그럼 이제 널 죽이겠다.”

바이올렛은 웃었고 엔디미온은 뛰었다. 단순한 달리기가 아니었다. 단 한 번의 도약. 그것만으로 순식간에 바이올렛과의 거리를 좁혔다. 말도 안 되는 각력이었고 불가능한 도약이었다. 하지만 성배기사는 해냈다.

“죽이겠다고?”

바이올렛의 몸은 보호막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었다. 엔디미온이 휘두른 검이 보호막을 깨트렸지만 곧장 다음 보호막이 발동됐다.

“할 수 있으면 해보시던지.”

대마법사 바이올렛. 그 별명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마법에 두각을 나타내던 천재 중의 천재였고 성인이 되기도 전에 수많은 마법적 발명을 해냈다. 그리고 가장 어린 나이로 성배기사의 선택을 받았다.

그런 그녀는 백 년의 시간이 지나서 더욱 강해졌다. 성배의 힘이 없어도 가지고 있는 마법만으로 다른 영웅들을 압도할 만큼 강해진 것이다.

라이오넬은 엔디미온에게 졌다. 비다르도 졌다. 칼라딘도 마찬가지다. 아직 싸운 적은 없지만 분명 라우렌시오 역시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올 것이다. 성배기사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영웅은 없다. 그것은 가능성의 문제다. 주사위를 아무리 던져도 7의 눈이 나올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바이올렛은 만들어냈다. 여섯 면을 가진 주사위에서 7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아직은 가능성일 뿐이다. 반드시 7이 나오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0과 1의 차이는 크다. 1과 100의 차이보다 훨씬 더.

“네가 가장 강한 영웅이던 시절은 백 년 전에 끝났어, 엔디미온!”

바이올렛은 점멸 마법을 사용해 엔디미온과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공격 마법을 연달아 사용했다. 불꽃이 일어나고 바닥에서 가시가 솟는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고 바람의 칼날이 날아온다.

그런 공격이 한 번에 수십 개씩 날아온다. 마법은 한 번에 한 개씩이 기본이다. 하지만 바이올렛은 그런 상식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자신이 원하는 순간에 원하는 만큼의 마법을 날린다. 그것이 대마법사의 격.

“쫑알쫑알 말이 많군. 주문쟁이들은 원래 다 그러나?”

단 하나만으로도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마법을 상대로 엔디미온의 대응은 간단했다. 성배와 성검을 힘을 믿고서 우직하게 밀고 나간다. 베로니카가 도망치면 쫓아간다. 보호막을 만들면 부순다. 공격이 날아오면 막는다.

수십 개의 마법들은 성배와 성검의 힘으로 만들어진 보호막에 막혔다. 간혹 보호막을 뚫고 들어오는 것들은 성배기사의 몸에 직격했으나 자잘한 생채기만을 남길 뿐이었다. 엔디미온은 황소처럼 나아갔다. 바이올렛이 점멸 마법으로 도망치면 상식을 뛰어넘는 각력으로 쫓아갔다.

두 사람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점멸 마법과 도약. 그 두 가지로 두 사람은 시시각각으로 위치를 바꾸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수십 번의 공방을 이어나갔다. 만약 이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흐릿하게 보이는 인영과 함께 허공에서 튕기는 마법의 잔해만을 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엄청난 싸움이었다. 영웅과 악마가 싸울 때와는 다른 박력이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수십 개의 마법이 발동됐다가 전부 다 성검에 의해 박살났다. 영웅과 영웅의 싸움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는 회오리와 같았다.

그들 주변에 있는 것들은 모두 잘게 부서지며 땅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 날 죽이겠다면서? 좀 더 분발해야 하는 거 아니야?”

바이올렛은 엔디미온을 도발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엔디미온은 곧장 따라붙었고 성검으로 보호막을 부쉈다. 그 다음 보호막이 자연스럽게 생겨났고 이어지는 공격 역시 그것에 막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공격 마법이 날아와 엔디미온의 몸에 직격했다.

지금까지 수백 번이나 반복한 공방이었다. 도망치고 쫓고 공격하고 반격하고. 싸움의 영향으로 주변의 모든 것들이 박살나고 또 박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정작 엔디미온은 아무런 긴장감도 없었다. 그는 오히려 지금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도 달라지지 않는 결과. 끝없이 이어지는 싸움. 지금 상황에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강자가 아니다. 긴장은 약자의 것이니까.

엔디미온은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깨지는 보호막. 보통이라면 여기서 그가 검을 거두고 그 사이에 다음 보호막이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엔디미온의 검이 보호막을 깼고 왼쪽 주먹이 찰나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노리는 것은 얼굴. 바이올렛은 얼굴을 찡그리며 미리 준비한 마법을 취소하고 곧장 점멸 마법을 사용했다. 아무리 그녀라도 이 잠깐의 순간에 멀리 물러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단 한 발자국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그만큼만 물러났다. 일단 보호막으로 막고 공격 마법으로 시간을 벌고 그 다음에 멀리 거리를 벌려도 충분하니까.

그게 실책이었다.

“읏!”

바람이 분다. 몹시 사나운 바람이. 그것은 단단했고 묵직했다. 바이올렛의 얼굴은 주먹에 맞고서 얼얼했다. 코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주먹에 맞지 않았다. 맞은 것은 바람이다. 그저 바람.

한 발자국 거리에서 피한 주먹에서 날아온 단단하고도 묵직한 바람.

“내가 말했지.”

주먹은 망치에서 그물로 변했다. 확 벌린 손아귀가 바이올렛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홱 잡아당겼다. 엔디미온은 바이올렛의 몸을 바닥에 처박으면서 싸늘하게 말했다.

“나한테 깝죽거린 놈들은 전부 다 죽었다고.”

바이올렛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아까 전에 발차기에 맞아서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였다. 그런데 엄청난 힘에 의해 바닥에 내던져졌으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단지 얼굴 근육을 움직였을 뿐인데 몸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 느낌이었다.

“끝을 내자.”

단두대의 칼날처럼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성검을 보며 바이올렛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싸움은 아직 안 끝났어! 잘난 척 하지 말라고!”

바이올렛은 몸 안에 축적해온 엄청난 양의 마력을 해방시켰다. 보라색 마력은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부딪히는 모든 것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리며 성난 짐승처럼 날뛰었다.

그것은 발산이었다. 단순하게 마력을 뿜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분노 자체를 휘두르는 일이었다. 엄청난 양의 마력은 이 자리에 바이올렛 외에 존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성배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큭!”

엔디미온은 가루가 되지는 않았으나 마력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날아갔다. 그는 어느 집의 벽에 부딪쳤다가 무너져 내리는 집의 잔해에 깔렸다. 하지만 곧 돌들을 밀어내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건방진 성배기사야! 내가 누구인지 알아라! 나는 이 세상을 무너트릴 변절자이며 불타는 복수자다! 또한 어둠의 일부를 휘두르는 자인 동시에 마법의 지배자이니 너는 말하라! 내가 누구더냐!”

온통 보라색으로 물든 세상. 그 어떤 생물도 감히 생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농밀하다 못해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듯한 엄청난 마력이 이 공간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지배하는 것은.

“나는 룽고르의 마법사왕! 마법 그 자체다!”

날뛰는 마력은 엘다르를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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