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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닥에 쓰러진 마법사왕은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그녀의 살갗은 엉망진창으로 찢겼고 뼈는 부러져서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그 꼴은 마치 실이 끊어지고 관절이 부러진 인형 같았다.
“······졌다고.”
압도적인 힘을 가졌던 마법사왕은 이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굳이 숨을 끊지 않더라도 얼마 뒤면 자연히 심장이 멈출 것이다. 엔디미온은 연신 기침을 하는 그녀를 보면서 성검을 바닥에 꽂았다. 칼자루에 몸을 기대려다가 약한 현기증에 몸을 휘청거렸다.
성배기사 역시 꼴이 말이 아니었다. 마법사왕을 이기기 위해서 모든 신성력을 공격에 집중했다. 힘과 힘의 충돌은 서로가 과연 버틸 수 있느냐의 싸움이었다. 엔디미온은 버텼고 마법사왕은 버티지 못했다. 그 차이가 결과를 갈랐다.
“괜찮소, 엔디미온?”
인간으로 변신한 에투알이 휘청거리는 엔디미온의 몸을 부축했다.
“······괜찮아. 현기증일 뿐이야. 조금 있으면 낫겠지.”
엔디미온은 에투알의 부축을 받으며 마법사왕에게 다가갔다. 물 위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숨만 헐떡이고 있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바이올렛.”
마법사왕이 아니라 바이올렛. 그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마법사왕은 다시 영웅 바이올렛이 되었다. 백 년 전에 성배기사를 도우며 위용을 떨쳤던 바로 그 위대한 대마법사로 돌아갔다.
“너는 호수의 여왕에게 받은 숭고한 의무를 도외시하고 대의를 저버렸다. 이것이 네 첫 번째 죄.”
바이올렛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의미 없는 호흡을 반복했다. 그 주기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너는 요정기사를 사칭하여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고 라우렌시오에게 누명을 씌웠다. 이것이 네 두 번째 죄.”
성배기사는 덤덤한 목소리로 바이올렛의 죄를 말했다.
“너는 악한 마음을 먹고 변절하여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네 세 번째 죄.”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바이올렛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말을 하기에는 너무 지쳐있었다.
“전부 다 극악한 죄라는 사실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나는 성배기사이자 전능자의 화신으로서 너를 벌해야 할 의무가 있다.”
엔디미온은 에투알에게 손을 뻗었다. 에투알은 손을 맞잡았지만 그게 부축해달라는 뜻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성배기사에게는 지켜야 할 책무가 있다.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아주 잘 알고 있음에도 에투알은 망설였다. 그녀는 성배기사와 함께하는 영혼의 동반자인 동시에 바이올렛의 친구였다. 성검을 휘두르는 것은 엔디미온이지만 직접 목숨을 끊는 것은 에투알이었다.
그녀는 세상의 악을 몰아내기 위해 별빛으로 벼려졌다. 베어야 할 것은 사악한 존재들이었다. 오랜 친구가 아니라.
“나는······.”
“성검 에투알. 네 의무를 다해라.”
성배기사의 목소리는 엄숙했다. 에투알은 그 목소리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곧 성검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한 손으로 칼자루를 잡은 엔디미온은 바이올렛을 겨누었다.
“죄인 바이올렛, 너는 백 번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 이것은 마땅히 벌해야 할 일이니 전능자의 화신인 이 내가 직접 집행하겠다. 너 극악한 죄인아,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남겨라.”
바이올렛은 입을 열지 않았다. 점차 보라색으로 물들어가는 입술을 보며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성검을 거꾸로 들고서 바이올렛을 향해 힘껏 내리찍었다.
저항감은 없었다. 젖은 모래를 찌르듯 부드럽게 안쪽으로 들어가는 성검의 감각에 엔디미온은 칼자루에서 천천히 손을 떼며 말했다.
“나는 네게 어떤 사정이 있든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고 말했다. 내 할 일을 할 뿐이라고 했지.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진심이냐.”
들려오는 목소리에 성검 에투알은 아 소리를 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디에 꽂혀있는지 보았다. 바닥, 바이올렛이 쓰러져 있는 곳 바로 왼쪽의 바닥.
“너는 죄인이다, 바이올렛.”
엔디미온은 말을 이었다. 덤덤하지만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또한 내 소중한 친구였다.”
에투알은 얼른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그녀가 화색하며 소리쳤다.
“엔디미온! 그래, 내 기사님이 그럴 리가 없지! 잘 생각하셨소, 내 기사님! 바이올렛, 바이올렛! 괜찮으시오? 잠깐만 기다리시오. 성수를 마시면 기운을 차릴 거요. 엔디미온, 어서 성수를······.”
바이올렛은 힘겹게 손을 들었다. 그리고 호들갑을 떠는 에투알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말했다.
“뤼미에르, 우리 아가씨. 괜한 짓이야.”
바이올렛의 말투는 백 년 전 성검의 소중한 친구였을 적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바이올렛? 이대로 두면 곧 죽는단 말이오! 성배기사가 당신을 용서했소! 죗값을 치를 때 치르더라도 일단은 살아야 할 것 아니오!”
“내 몸에 신성력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당연한 일이지. 성배의 뜻을 저버리고 변절했으니. 대신에 나는 다른 힘을 얻었어.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뤼미에르?”
“그게 무슨, 당신, 설마?”
바이올렛은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으나 목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처연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래. 나는 이제 악마와 다름없어. 성수로 내 상처를 낫게 할 수는 없다는 뜻이지. 날 그냥 내버려두렴, 뤼미에르. 이대로 차갑게 식어가게 두란 말이야.”
“하지만, 하지만······.”
에투알이 울먹거렸다. 바이올렛은 희미하게 웃었다.
“울 것 없어. 내가 마땅히 맞았어야 할 결말이니까. 아, 나도 참 멍청하지. 성배기사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이런 바보 같은 짓거리를 하다니. 내가 아무리 강해져도 엔디미온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야.”
엔디미온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왜지?”
다음에 이어질 말은 정해져 있었다.
“왜 배신한 거냐.”
바이올렛은 몸을 약간 움직였다가 부러진 뼈가 배를 찌르는 바람에 얼굴을 찡그렸다.
“언제는 관심 없다면서.”
“나는 관심 없지. 하지만 라우렌시오는 아니야. 그는 사정을 알아야 할 정당한 권리가 있어.”
라우렌시오는 하지도 않은 짓에 대한 누명을 썼다. 그리고 그 탓에 그의 가문은 영락해버렸다. 엔디미온의 말대로 라우렌시오에게는 진실에 대한 권리가 있었다.
“그에게는 참 못할 짓을 했어. 내 연구를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는데. 라우렌시오는 태양과 같은 남자였어. 언제나 따스했고 명랑했지. 난 겨울바람에 말라비틀어진 초목이었고. 그래서 더 잘 맞았는지도 몰라. 서로 다르니까.”
“그를 질투했나?”
“질투했냐고? 그래, 그럴 지도 모르지. 나는 라우렌시오를 질투하고 그는 나를 질투했지.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존재였거든.”
“열등감?”
엔디미온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친우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전부 안다고 자부하는 것이 지독한 오만이라면 약간 정도는 오만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백 년이 지난 지금 자신은 몰랐던 일에 대한 것들을 알게 되었다. 비다르와 라이오넬의 사이가 어땠는지, 바이올렛과 비다르의 사이가 어땠는지, 라우렌시오와 바이올렛의 사이가 어땠는지, 전부 백 년만에 새롭게 알게 됐다.
“라우렌시오는 다재다능하지. 검술도 일류, 마법도 일류, 지휘 능력도 나쁘지 않고 병사들을 감복시킬 만한 카리스마도 있어.”
하지만 하고 바이올렛은 말을 이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기침 몇 번을 했다.
“어느 것도 정점은 아니지. 검술은 라이오넬보다 아래야. 마법은 나보다 아래고. 지휘 능력은 그보다 더 뛰어난 성기사들이 많았지. 카리스마? 그건 너보다 아래였어. 할 줄 아는 것은 많은데 어느 것도 정점이 아닌 기분은 어떨까? 너는 모를 거야. 나도 모르고.”
엔디미온은 침묵했다. 그가 기억하는 라우렌시오는 언제나 웃고 있었다. 쓰러져도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싸우던 요정기사, 지친 병사들을 독려해 결국 승리를 쟁취해내는 요정기사, 언제나 뒤에서 자신을 도와주던 요정기사.
기억 속에 열등감을 느끼는 요정기사는 없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모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을 뿜어내는 등잔의 바로 아래가 가장 어둡다는 사실을.
“라우렌시오가 가장 많이 열등감을 느낀 부분은 바로 마법이야. 그는 본래 마법사를 지망했고 내가 유명세를 떨치기 전까지는 북부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사였어. 하지만 라우렌시오는 나를 만나고서 벽을 느꼈지. 그것도 아주 커다란 벽을. 그래서 그때부터 검술을 연마하기 시작한 거야. 그것도 결국 라이오넬이라는 벽을 만났지만.”
연신 기침을 하던 바이올렛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상처 입은 자부심을 회복하는 건 어렵지. 라우렌시오는 날 보면서 언제나 웃었지만 날 알아. 그게 쓴웃음이었다는 것을.”
에투알은 나직이 탄식했고 엔디미온은 말라붙은 입술을 한 번 핥은 뒤에 말했다.
“그럼 네가 느낀 열등감은 뭐지?”
바이올렛은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천출이야.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고아였지. 내가 기억하는 건 하나뿐이야. 눈이 엄청 내리는 날에 나는 갓난아기를 손에 안고 덜덜 떨고 있었다는 기억.”
역시나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엔디미온은 자신이 얼마나 영웅들의 과거에 무지했는지 통감했다.
“고아인 나와 내 동생을 룽고르의 촌장이 거두었지. 입양? 그런 게 아니야. 촌장은 그냥 날 막일이나 시킬 일꾼으로 부리려고 데리고 온 것뿐이야. 나는 여섯 살 때부터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 해야 했어. 촌장에게 얻어맞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의 괄시도 받아가면서. 어린 꼬마가 버티기 힘든 괴로움이었지. 그래도 난 힘냈어. 나한테 의지하는 어린 동생이 있으니까. 솔직히 힘들었어.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데 동생까지?”
바이올렛의 미소는 동생을 생각하는 것처럼 따스했다.
“하지만 언니를 부르며 잠꼬대 하는 그 어린 것을 버릴 수가 없었어. 나는 열심히 일했지. 그리고 열다섯이 됐을 때였나. 내가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 그것도 아주 엄청난 재능이.
내가 마법사란 것을 알게 된 이후로 마을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을까? 아니야. 난 잡부에서 마법 쓸 줄 아는 잡부가 됐을 뿐이야. 참 바보 같지? 그 힘으로 마을 사람들 전부를 굴복시킬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경험이란 게 참 무섭지. 이제 목줄을 끊어버릴 힘이 생겼는데도 겁쟁이처럼 벌벌 떨게 만들었으니까.”
자조적으로 웃던 바이올렛은 말을 이었다.
“악마와 악귀들의 공세가 거세지자 왕국에서는 마법사들을 징집했지. 어린 동생을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나는 기꺼이 징집령에 응했어. 왜냐하면 내 동생이 살아갈 이 세상을 지켜야 했으니까. 나는 성기사들을 따라서 종군했고 거기서 널 만났지.”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고 바이올렛은 말했다.
“그런데 그거 알아? 내 뒤로는 언제나 천출이라는 게 낙인처럼 따라다녔어. 너도 알겠지만 우리가 언제나 이겼던 건 아니잖아? 하지만 똑같이 지더라도 나만 심한 비난을 받았지. 왜냐하면 천출이니까. 출신이 천해서 그런 거라고, 천한 것이 알량한 힘만 믿고 나댄다고.
하지만 라우렌시오는 아니었어. 그는 북부의 대영주이자 일곱 요정 가문의 주인이니까. 누가 감히 뭐라고 하겠어?
엔디미온, 내가 느낀 열등감이 뭐냐고 물었지? 바로 신분이야. 그와 나의 신분 차이. 똑같은 과정에 똑같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비난을 받는 것은 언제나 나였지. 내가 왜 혼자 다녔는지 알아? 내 마법이 위험해서? 아니! 그 빌어먹을 성기사들이 내 명령을 우습게 아니까!”
엔디미온은 고개를 숙였다. 성배기사이자 바이올렛의 친구로서 그가 해결했어야 할 일이었다.
“······혹시 사람들의 태도에 실망하여 변절하게 된 것이오?”
에투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에게 비난만이 돌아온다면 누구나 마음을 달리 먹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바이올렛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나에 대한 비난은 참을 수 있어. 내 동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하겠어. 내가 왜 변절했냐고? 그 이유가 궁금하다면 라우렌시오를 데리고 와. 그에게 진실에 대한 권리만이 있는 게 아니야. 의무도 있어. 진실을 알아야 할 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