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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라우렌시오는 엘리야를 쫓아서 룽고르로 갔을 것이다. 엘다르에서 룽고르까지 제법 거리가 있으니 벌써 도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걸으면 중간에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그는 한 걸음 내딛으면서 바이올렛을 한 번 쳐다보았다. 과연 그녀가 라우렌시오를 데리고 올 때까지 숨이 붙어있을까? 성검과 성배기사가 힘을 합쳐 내지른 공격에 정통으로 맞은 그녀는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다시 고개를 돌리며 걷기 시작했다. 강렬한 의지는 때로 죽음을 늦추기도 하는 법이니까.
그가 열 발자국쯤 걸었을 때였다.
“엔디미온, 그럴 것 없어. 내가 돌아왔으니까.”
약하게 머리를 찌르는 현기증 때문에 땅을 보고 걷던 엔디미온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야 안으로 라우렌시오의 모습이 들어왔다.
“엔디미온 씨! 괜찮으세요?”
그리고 베로니카의 모습도. 엔디미온은 순간적으로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너희가 왜 여기에 있지?”
“왜기는. 널 돕기 위해서 다시 돌아온 거지. 나엘라티나는 엘리야에게 맡겼고 요정들은 라이오넬과 비다르가 보호하고 있어.”
“제가 별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려고 돌아왔어요.”
베로니카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늦게 왔지만요. 다행이에요. 엔디미온 씨가 죽지 않아서.”
“내가 왜 죽어. 그래, 라우렌시오. 덕분에 수고를 덜었다. 바이올렛에게 가자. 그녀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니까.”
라우렌시오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올렛은 그를 증오한다고 했다.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증오한다고 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니 자연스럽게 긴장이 됐다.
“바이올렛.”
눈을 감고 있던 바이올렛이 눈을 떴다. 마치 시체가 다시 눈을 뜨는 듯한 모습이었다. 라우렌시오는 이미 송장에 가까운 꼴이 된 옛 친우를 보고서 착잡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왔다, 바이올렛. 내게 할 말이 있다고.”
“벌써 왔네. 다행이야. 내가 숨이 끊어지기 전에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라우렌시오는 약간 주춤했다. 바이올렛의 말투가 백 년 전과 똑같아서, 그때의 추억이 생각나서, 함께 별빛을 보고 일출을 보던 그 기억이 가슴을 찔러서.
“나는 변절자야. 라우렌시오, 궁금하지 않아? 왜 내가 변절했을까. 왜 너에게 누명을 씌웠을까. 왜 널 증오할까.”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라우렌시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는 동생이 있어. 나한테 가장 소중한 존재였지. 나는 그 애의 미래를 위해서 싸웠어. 내 동생이 악마와 악귀들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길 바라면서.”
바이올렛에게 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는 라우렌시오도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똑같이 북부 출신 요정이었지만 서로의 과거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바이올렛은 룽고르의 고아였고 라우렌시오는 북부의 대영주였으니 두 사람이 만날 일이 없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것은 바이올렛이 엄청난 전공을 올리고 성배기사와 함께할 영웅으로 선택을 받은 뒤였다.
“나는 오직 내 동생 하나만을 위해서 싸웠어. 악마들을 죽이고 찢고 태우면서. 너희도 그랬겠지만 나도 사람인데 길고 긴 싸움이 힘들지 않았던 건 아니야. 하지만 매일 밤 고향의 동생을 생각하며 견뎠지. 이 싸움만 끝나면, 이 싸움만 끝나면, 이 싸움만 끝나면.”
사람은 강철의 생물이 아니다. 몸이 지치고 정신이 지친다. 영웅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라우렌시오도 지치고 힘들었던 때가 있었으니까. 길고 긴 싸움에서 지치지 않은 것은 오직 엔디미온 하나뿐이었다.
“우리는 열심히 싸웠어. 그래, 우리는 정말 열심히 싸웠지. 그래서 대악마도 죽였잖아. 난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지. 고향으로 돌아가서 동생이랑 행복하게 살면 될 줄 알았어. 그런데 씨발 뭐? 이제 백 년 동안 밭이나 갈고 있어야 한다고? 그걸 누가 해? 나는 당연히 도망쳤지. 왜냐하면 할 만큼 했으니까.”
라우렌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밭만 갈면서 보내기에 백 년은 너무 길다. 엔디미온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는 곧장 룽고르로 향했어. 내 동생을 만날 생각으로 잔뜩 신이 난 채로. 아, 그 망할 촌장 놈이 이제는 날 함부로 대하지 못하겠지. 아직도 날 옛날의 그 고아 꼬마라고 생각하고 까불면 마법으로 날려버려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을로 들어섰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더라고. 사람들이 날 보더니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도망갔어. 왜일까. 난 곧장 촌장을 찾아갔고 내 동생이 어디 있냐고 물었지. 그런데 그 노인네가 창백한 얼굴로 우물쭈물하는 것이 영 이상하더라고.”
바이올렛은 바싹 마른 입술을 떨었다.
“그래서 마법으로 머릿속을 뒤져보니 어떤 기억이 나왔는지 알아?”
주변의 마력이 흔들렸다. 마법사인 라우렌시오와 베로니카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공기를 타고 흔들리는 바이올렛의 분노를.
“내 동생을 제물로 바쳤어! 악마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여기 대마법사 바이올렛의 동생이 있으니 데려가라고! 대신에 마을을 공격하지 말아달라고! 그 쳐죽여도 시원찮을 새끼들이 내 동생을 버렸다고!”
하늘이 흐려지고 땅이 흔들렸다. 바이올렛의 분노는 이미 잿더미가 되버린 엘다르를 다시 한 번 부술 듯 거셌다.
“내가 대체 무엇 때문에 싸웠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그 개지랄을 했는데! 내가 그 빌어먹을 새끼들을 지키려고 싸운 줄 알아? 아니야! 내 동생을 위해서였다고!”
바이올렛의 목소리는 이제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울면서 짐승처럼 소리를 질렀다.
“뒤늦게 성기사들이 추격대를 보냈지만 내 동생은 죽었어! 룽고르의 짐승 새끼들을 살리고 말이야! 그런데 내가 더 화가 나는 것은!”
바이올렛의 충혈 된 두 눈이 라우렌시오를 쳐다보았다. 새빨간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마치 혈루처럼 보였다.
“너희 가문이 그걸 그냥 두고 봤다는 사실이지. 네 누이가 추격대를 꾸리기 위해 병력을 요구하는 성기사들에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당장 므셀라를 지킬 병력도 부족하다, 그깟 꼬마 하나 때문에 병력을 뺄 수는 없다. 그깟 꼬마? 하! 그깟 꼬마!”
라우렌시오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는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므셀라에 들리지 않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바로 도망쳤으니까. 요정기사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
“내 누이가······. 그랬다고?”
한바탕 화를 쏟아낸 바이올렛은 이제 힘겹게 숨을 헐떡였다.
“대체 내 노력은 뭐였던 거야······. 내 선의는 뭐였던 거냐고······. 나는 그들을 위해서 목숨도 걸었는데 그 사람들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내가 노력하는 만큼 그들도 노력해야 하는 거잖아. 그런데 그들은······. 그들은 왜 내 동생을 그리 쉽게 버렸던 거야? 나는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이든 했는데 대체 왜!”
흐느끼는 소리가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다. 이 상황에서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성배기사조차도.
“나는 룽고르의 요정들을 용서할 수 없었어. 그래서 그들에게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저주를 내렸지. 그래도 화는 사그라지지 않더라. 이성이 없는 분노는 들불과 같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태워버리니까. 라우렌시오, 나는 네 흉내를 내서 네게 누명을 씌웠어. 내가 고통 받은 만큼 너와 네 가문도 고통 받길 바라서. 성기사들에게 지고 난 후에는 악마들과 접촉하여 그들의 힘을 받아들였지. 그리고 조금씩 힘을 키우며 여기까지 왔어.”
바이올렛은 힘겹게 고개를 돌려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엔디미온. 나는 너무 멀리 온 거야. 돌아갈 수도 없는 지점에 와버린 거야. 분노가 내 이성을 마비시켰고 증오가 내 두 눈을 가렸지.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심연의 가장 아래까지 내려왔고 이제는 태양 아래로 돌아갈 수 없어. 이게 맞는 거야. 그래, 이게 맞는 거라고······.”
바이올렛의 목소리는 꺼져가는 불꽃처럼 천천히 잦아들었다. 베로니카는 그런 그녀를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과연 백 년 전의 영웅을 일개 마법사 따위가 동정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세상의 선의로부터 배신당한 그녀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시선을 느낀 바이올렛은 입술을 움직여 미소 비슷한 것을 지었다.
“어린 요정아. 이리로 오거라.”
바이올렛은 이제 대마법사로 돌아가 있었다. 베로니카는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엔디미온에게 등을 떠밀려 바이올렛에게 다가갔다.
“하, 하실 말씀이라도······.”
“너는 마법사지? 백 년 전의 내 역할을 네가 대신하는구나.”
“아, 아니요! 제가 감히 영웅의 역할을 대신한다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세요!”
베로니카가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베로니카와 바이올렛의 실력 차이는 까마득할 정도로 벌어져 있었으니까.
“그래, 그 말이 맞다. 너는 내 역할을 대신하기에는 미숙하지. 아직 어리고.”
“네에······. 그 말이 맞습니다.”
베로니카가 요즘 마법사들 중에서 특출난 실력이고 라우렌시오에게 마법을 배웠다고 해도 백 년 전의 마법사들에 비하면 보통의 수준일 뿐이다.
바이올렛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손을 주거라.”
“네넵, 손이요? 넵.”
베로니카는 시키는 대로 얌전히 손을 뻗었다. 바이올렛은 손목이 부러져서 덜렁거리는 손을 뻗었다. 당연히 그런 손으로는 베로니카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 눈치를 보던 베로니카가 조심스럽게 바이올렛의 손을 맞잡았다.
따스했다. 그래서 놀랐다. 생각한 것보다 따스해서.
“너는 미숙하고 어리다. 감히 내 역할을 대신하려는 것 자체가 무엄한 일이다.”
하지만 하고.
“너는 올곧다. 불의를 그냥 두고 보지 않고 정의를 행하려고 한다. 또한 용기를 가졌다. 두려움을 누르고 옳은 길로 가려고 한다. 그것은 네가 자격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저어, 무, 무슨 말씀이신지······.”
“어린 요정아. 너는 아느냐?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되는 것이지. 올곧은 마음과 뜨거운 용기를 가진 자만이 영웅이 되는 것이다. 내 말을 알겠느냐? 너는 영웅의 자격을 갖추었다.”
므셀라에서 엔디미온이 했던 말이었다. 베로니카는 멍하니 바이올렛을 쳐다보았다. 사악한 것들을 불태우던 대마법사에서 복수심에 불타던 마법사왕으로 변했던 자. 이제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그저 한 명의 요정이 된 자.
바이올렛은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 내 힘을 넘겨주겠다. 너는 영웅이 될 자격을 갖추었으니까. 하지만 어린 요정아. 잊어서는 안 된다. 큰 힘에는 큰 의무가 뒤따르는 것이다. 너는 새로운 영웅으로서 성배기사를 도우며 네 의무를 다해라. 그것이 불타는 복수심으로 이 세상을 떠돌던 망령이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