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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손을 통해서 엄청난 양의 마력이 거침없이 베로니카에게로 넘어왔다. 그녀는 정신이 아찔해 정도로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마력을 느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세상은 새하얀 빛에 휩싸인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력은 천방지축으로 날뛰면서 베로니카의 심장을 향해 달렸다. 심장 주변에 거대한 공처럼 뭉친 마력은 세찬 맥박을 따라 혈액과 함께 몸 곳곳으로 움직였다. 심장에서 사지 말단까지 내달렸던 마력은 다시 머리를 돌려서 심장으로 되돌아왔다.
마치 이 몸이 자신이 머무를 공간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쉼 없이 순환하며 자신의 존재를 몸 곳곳에 각인시켰다.
“으으윽······.”
갑작스럽게 몸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강렬한 힘에 베로니카는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녀의 몸은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웠으며 은은한 보랏빛을 뿜어냈다. 바이올렛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이가 내 힘을 완전히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거야. 라우렌시오, 네가 저 아이를 지켜봐 줘.”
“알겠어.”
라우렌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올렛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베로니카에게 힘을 전달한 그녀는 이제 한 마디 하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모래 한 줌만큼도 없다는 사실을. 손 안에 움켜쥔 모래가 점점 떨어져 곧 바닥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엔디미온······. 미안해. 내 잘못을 너에게 떠넘기게 되어서.”
“상관없다.”
뒷말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그게 의무라는 사실을.
“의무에 너무 집착하지 마, 엔디미온······. 너는 사람답게 살아야 해. 인형이 아니라. 호수의 여왕이 부리는 인형이 되서는 안 돼.”
“매번 말하지만 나는 인형이 아니야. 사람이고 단지 해야 할 일을 하는······.”
“아니야, 엔디미온.”
바이올렛이 물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마치 불쌍한 것을 보는 듯 했다. 측은한 눈빛에 엔디미온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한 발자국 물러나는데 바이올렛이 말했다.
“너는 만들어진 존재야, 엔디미온. 호수의 여왕에 의해서.”
***
싸움은 끝났다. 엘다르 주민들은 엘리야의 인도에 따라서 마을로 돌아왔다. 그들은 잔해조차 남지 않은 마을을 보고서 망연자실했으나 엘리야가 그들을 독려했다. 괜찮다고,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다른 마을의 협조를 받아서 빠른 시일 내에 마을을 재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말을 들은 요정들은 다시 힘을 냈다. 그들은 엘리야를 믿고 다시 한 번 일어서기로 했다.
라우렌시오는 그들에게 므셀라를 되찾아주겠다고 했다. 그곳에 남은 악마와 악귀들을 모두 몰아내고 북부 요정들의 영광을 되돌려주겠노라 말했다. 바이올렛이 죽고 저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니 혼자서도 가능한 일이었다.
엘리야는 감사하며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비록 므셀라가 악마와 악귀들에게 한 번 함락됐다고는 하나 아직 형체는 멀쩡했기에 수리해서 쓰면 집 잃은 요정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모두가 함께 므셀라를 되찾기로 했다. 엘다르의 순찰대와 영웅들, 용 나엘라티나와 새로운 힘을 얻은 베로니카까지 힘을 보태기로 했다. 악마와 악귀들은 흔적도 없이 사자리 것이고 므셀라는 다시 북부 요정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정말 떠날 거냐, 엔디미온?”
모두가 힘을 합치기로 한 가운데 딱 한 사람만은 엘다르를 떠나기로 했다. 엔디미온이었다. 그는 순찰대로부터 받은 말 위에 짐을 실었다. 그는 건초를 먹고 있는 말의 목덜미를 쓸어주며 말했다.
“가야지. 내가 없어도 너희들이 알아서 잘 할 거라고 믿는다.”
“도망치는 거냐?”
라우렌시오는 날선 목소리로 말했으나 그의 눈은 엔디미온을 애처롭게 보고 있었다.
“받아들이려는 거지.”
“굳이 지금 그럴 것 없잖아.”
“아니, 지금 해야 돼.”
“왜? 바이올렛이 한 말이 그 정도로 신경 쓰여? 네가 만들어진 존재라는 말이?”
엔디미온은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던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답지 않게 눈을 내리깐 채로 말했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몰라.”
목소리는 낮았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내 기억에는 구멍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라우렌시오, 나는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내 부모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며 자랐는지, 그 어떤 기억도 없어. 유아기의 기억이 아무것도 없다고. 그게 정상일까? 아니야.”
라우렌시오는 묵묵히 들었고 말은 이어졌다.
“나는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어른이었고 맨손으로 악귀들을 때려눕혔어. 내 이름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람들을 지키고, 함께 싸울 사람들을 모으고, 너희들을 만나서 성배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성배기사가 되어 대악마를 물리쳤지. 그 다음은? 모두가 도망쳤으나 미련하게 혼자 남아 의무를 끝까지 다했다. 그 다음은?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의무를 다시 한 번 행하고 있다.
바이올렛의 말이 맞아. 이건 사람이 아니야. 그 어떤 고결한 성기사도 이럴 수는 없어. 사람은 의무에 대한 맹목과 광신만으로 살 수 없다고. 그럼에도 나는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의무를 위해 살아가고 있지.”
“엔디미온······.”
“나는 호수의 여왕을 만나야 해.”
엔디미온은 등자를 밟고 훌쩍 뛰어서 말 위에 올라탔다. 말이 투레질을 한 번 했다.
“나라는 존재의 순수성을 되찾기 위해서.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들이 내 의지였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그리고.
“세상 모든 사악한 것들을 몰아낸다는 내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엔디미온은 그런 사람이다. 의무로부터 도망칠 이유를 찾지 않는다. 의무를 행해야 할 이유를 찾는다.
“그래······. 그게 네 생각이라면 어쩔 수 없지. 대신 빨리 돌아와야 할 거야. 너도 알겠지만 세상은 다시 한 번 전란의 위협에 빠져들었어.”
그 모든 것은 바이올렛이 꾸민 일이었다. 악마들에게 힘을 나누어 주고 그들이 군세를 이끌게 하여 도시와 마을을 공격하게 했다. 죽은 용들을 되살려 하늘을 날며 불을 뿜게 했다. 북부는 아직 조용하지만 아래쪽은 벌써 싸움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빠르게 다시 돌아와서 사악한 존재들을 몰아내야 했다.
“바이올렛에게 배후에 대해 물었어야 했는데.”
“상관없다. 누가 배후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바이올렛은 엔디미온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서 숨이 끊어졌다. 싸움이 끝난 뒤에 당장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녀였으니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라우렌시오, 너는 이제 어쩔 셈이냐.”
“일단 므셀라를 되찾은 후에 북부 요정들을 결집할 거야. 물론 엘리야를 주축으로 해서. 그 다음에 군대를 이끌고 밑으로 내려올 생각이고.”
“그럼 북부는 네게 맡기겠다. 비다르와 라이오넬은 뒤르겔로 보내라. 거기서 에스메렐다 추기경을 돕도록 하고. 나엘라티나는 마음대로 하게 둬. 이제 자기 둥지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그냥 보내 주라고. 그리고 베로니카는 네가 맡아라. 바이올렛이 부탁했으니까.”
“알겠어.”
라우렌시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엔디미온은 고삐를 당겨서 말의 머리를 돌렸다. 그가 당장 떠날 듯이 보이자 라우렌시오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도 없이 그냥 가게?”
“영영 떠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인사. 곧 다시 만나게 될 거다. 나는 너희들과 다르게 의무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니까.”
뼈 있는 농담이었다. 라우렌시오는 어색하게 웃었고 아참 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바이올렛의 시신은 룽고르에 묻어줄 생각이야. 비록 동생의 시신은 찾지 못했지만 동생의 무덤도 함께 만들어줄 생각이고.”
“잘 생각했다.”
“엘리야도 함께 용서를 구하기로 했어. 마르티레스 가문의 잘못이니 가주인 자신도 사죄해야 한다면서.”
“착한 요정이로군.”
“어······. 그거 칭찬 맞지? 비꼬는 게 아니라.”
줄곧 딱딱한 얼굴이었던 엔디미온이 작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것까지 비꼬지는 않아. 이건 그냥 진심으로 칭찬한 거야. 그런데 라우렌시오, 룽고르는 이제 어쩔 셈이냐.”
“룽고르의 건물들을 모두 허물고 그 자리에 신전을 세울 생각이야. 죽은 자들의 혼을 기리고 바이올렛의 저주가 너무 강력해서 사람이 살 수 없으니 신전의 힘으로 정화도 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들의 잘못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만 바이올렛의 저주는 너무 끔찍했어.”
바이올렛이 죽고 나서 룽고르의 요정들은 저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었던 그들의 몸은 허물어져서 그 안에 갇혀 있던 영혼들을 하늘로 날아갈 수 있게 되었다.
백 년, 무려 백 년. 그들이 지은 죄의 값은 충분히 치른 셈이었다. 라우렌시오는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나서 북부의 상황이 안전해지면 그때 신전을 짓겠다고 말했다.
“그럼 나는 이제 그만 가보겠다. 열심히 해라, 라우렌시오. 아, 그리고 비다르한테 혹시나 도망치면 내가 찾으러 간다고 전해. 그 자식은 나 없다고 도망칠 수도 있으니까.”
“너는 비다르를 얼마나 안 믿는 거냐······. 너 그것도 일종의 혐오야, 혐오.”
“농담이야. 비다르도 이런 상황에서 자기 목숨만 챙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라우렌시오, 베로니카를 잘 챙겨 줘. 너도 알겠지만 그 녀석은 자기 능력에 비해서 너무 강대한 힘을 얻었어. 그녀가 그 힘을 잘 다룰 수 있도록 도움을 줘.”
“너 베로니카 아가씨를 참 아끼는구나.”
“아낀다기보다는 미안한 거지. 너무 멀리까지 끌고 왔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금화 백 개만큼의 일은 다 한 것 같은데. 이제는 내가 급여를 지불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말굽으로 바닥을 헤집으며 장난을 치고 있던 말이 또 한 번 투레질을 했다. 대체 언제 출발하는 거냐고 투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말의 갈기를 한 번 쓰다듬은 엔디미온은 말의 배를 힘껏 찼다. 히이잉 소리가 나며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조심히 다녀오라고 소리치는 라우렌시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엔디미온은 아무도 없는 길 위를 말을 타고 질주했다. 성배의 힘으로 체력을 강화시킨 말은 자신이 늑대라도 된 것 마냥 거침없이 내달렸다.
길 위를 지나다니던 악귀들도 무시무시한 기세로 질주하는 말을 보고서 감히 덤벼들 마음을 먹지 못했다. 저만큼 빠른 속도로 달리는 말을 막아섰다가는 그대로 멀리 날아갈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엔디미온은 연속해서 이럇 소리를 내며 말의 배를 찼다. 그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성배를 찾았던 바로 그 호수. 성검의 어머니이자 호수의 주인이 잠들어 있는 곳. 성배기사는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여행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