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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쏟아지는 가을비는 주변의 온기를 앗아갔고 길손으로 하여금 목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바람이 쌀쌀했고 공기가 서늘했다. 젖은 낙엽이 가득한 길 위를 지나다니는 자는 없었다.
시끄럽게 귀를 때리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한 여행자가 감았던 눈을 떴다.
“불이 꺼지겠소.”
동굴 안에는 남자 한 명뿐이었으나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자였다. 허리춤에 매달린 검이 흔들거리면서 다시 여자 목소리가 났다.
“비를 맞았는데 불이 꺼지면 감기에 들 것이오.”
남자는 그제야 손을 움직여서 나뭇가지를 모닥불 안으로 던졌다. 꺼져가던 불꽃이 다시 기운을 차렸다. 그는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말에게 건초를 던져주고서 다시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지만 말의 먹이만 챙겨주고서 그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엔디미온, 내 기사님.”
흔들거리며 목소리를 내던 검은 빛을 뿜어내며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은색의 머리카락이 동굴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흔들거렸다.
“요즘 통 기운이 없으시오. 그래도 식사는 해야지. 입맛이 없더라도 뭣 좀 드시오.”
성검 에투알은 가방을 뒤져서 딱딱한 빵과 햄을 꺼냈다. 그녀는 빵을 반으로 쪼개고 햄을 약간 잘라서 엔디미온에게 내밀었다. 가만히 그것을 쳐다보던 엔디미온은 조용히 받아들었다.
덩치에 맞지 않게 깨작거리며 먹던 엔디미온은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보며 에투알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좀 더 드시오. 아무리 성배기사라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 수는 없소.”
엔디미온은 작은 한숨과 함께 빵과 햄을 마저 먹었다. 에투알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바이올렛이 했던 말이 신경 쓰이시오? 그래서 기운이 없는 거요? 내 어머니가 당신을 속였다고 생각해서?”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엔디미온은 손에 묻은 빵가루를 털어내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시무룩해 할 나이는 지났어. 어떠한 충격적인 진실이 있더라도 나는 도망쳐서는 안 돼. 왜냐하면 성배기사니까. 전능자의 화신이며 빛나는 칼날이니까.”
후우 하는 한숨과 함께 뒷말이 이어졌다.
“······그냥 좀 지쳤을 뿐이야. 단지 그것뿐이야.”
“엔디미온······.”
에투알은 고개를 숙인 엔디미온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부드럽게 어깨를 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은 쉬시오. 더 가지 말고.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달렸잖소. 내 기사님, 당신은 쉴 자격이 있소.”
“휴식이라······.”
엔디미온에게는 낯선 단어였다. 그는 언제나 선봉에 서서 누구보다 먼저 돌격했으며 제일 늦게 전장에서 돌아왔다. 하나의 전투를 끝내고 나면 그 다음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백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그는 오직 자신의 의무만을 위해 달려왔다.
엔디미온은 동굴의 벽에 몸을 기대고서 다리를 쭉 뻗었다. 동굴이 비바람을 막아주고 모닥불이 따스한 온기를 보내주었다. 아늑하다. 그 감각에 그는 몸이 노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잠들면 내일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걸까. 이대로 끝내면 내일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의식이 점차 침전했다. 아래로, 더 아래로. 엔디미온이 절반쯤 눈을 감았을 때였다.
“키에에엑!”
날카로운 괴성과 함께 무언가 동굴 안으로 들이닥쳤다. 에투알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무언가를 보고서 반사적으로 주먹을 날렸다.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쳤던 습격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악귀?”
박쥐처럼 생겼으나 그 크기가 개만 했다. 툭 튀어나온 이빨이 날카로운 게 흡혈로 목숨을 유지하는 악귀인 듯 했다.
에투알은 바닥에서 버르적대는 악귀의 머리를 발로 짓뭉갠 뒤에 동굴 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새까만 악귀들이 열 마리도 넘게 날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비명 같은 괴성을 지르며 날카로운 이빨로 에투알을 위협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에투알은 겉으로 보기에는 가녀린 아가씨였지만 그 실체는 별빛으로 벼려진 성검이었다. 성배기사가 무기로 사용할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했지만 인간의 모습일 때도 저급한 악귀들 따위는 손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그 경로를 따라서 빛의 칼날이 날아갔다. 악귀들은 날개가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다음은 묵직하게 몸을 누르는 빛의 철퇴에 비명을 지르며 절명했다.
순식간에 악귀들을 모두 해치운 에투알은 얼른 동굴 입구 쪽으로 뛰었다. 아직도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기에 시야가 나빴지만 신성으로 빛나는 두 눈은 멀리까지 볼 수 있었다.
“저것들은 설마······?”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커다란 덩치를 가진 것들이 무리를 지어서 움직이고 있었다. 저것들이 짐승일 리는 없었다. 악귀들이었다. 숫자는 대략 스물을 넘는 듯 했고 해가 뜨는 방향에서 지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갑자기 악귀들이 왜? 에투알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엔디미온! 엔디미온! 일어나시오! 큰일이오!”
에투알이 어깨를 잡고 세차게 흔들었기 때문에 엔디미온은 졸음을 털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악귀들의 시체를 발견했다.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것들은 뭐야?”
“겁도 없이 동굴 안으로 들어오기에 내가 죽였소.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오. 악귀들이 나타났소. 무리를 지어서 마을 쪽으로 가고 있소!”
악귀들이 향하는 방향은 본래 엔디미온이 가려고 했던 마을이 있는 쪽이었다. 기사수도회는 대부분 교구가 있는 도시에만 머물기에 작은 마을에는 악귀를 막아낼 성기사가 없었다. 악귀 한두 마리 정도야 마을 자경단이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겠지만 스무 마리도 넘는 악귀들은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엔디미온은 에투알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얼른 성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허리춤에 단단히 성검을 고정한 엔디미온은 말의 고삐를 잡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얼른 말 위에 올라타서 말의 배를 찼다.
말이 히이잉 소리를 내며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세차게 비가 내리고 바닥이 절척거리지만 말은 엄청난 속도로 길 위를 달렸다. 엔디미온이 신성력으로 근력을 향상시키고 체력을 증진시켰기 때문이었다.
힘차게 달려가는 말 덕분에 엔디미온은 금세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악귀들도 마을에 도착하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했고 마을 자경단이 나와서 그들과 맞서고 있었다. 하지만 악귀들은 숙련된 병사들도 고전하는 적이었다. 자경단 따위가 스무 마리나 되는 악귀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 막아! 도망치면 다 죽는 거야!”
“마을을 지켜야 한다! 성기사들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돼!”
마을 자경단은 장대에 식칼을 꽂아 만든 조악한 창을 휘둘렀지만 악귀들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오히려 곰처럼 생긴 악귀의 화를 북돋았고 그 대가로 자경단 한 명의 목이 날아갔을 뿐이었다.
“으으으······. 안 돼! 우리는 다 죽을 거야!”
“야, 멍청아! 어딜 도망가는 거야! 야!”
사람이 인형 부서지듯 죽는 모습에 자경단 한 명이 도망쳤고 다른 자경단들도 충격에 빠졌다.
그 모습을 보며 엔디미온은 말 위에서 성검을 뽑았다.
“이럇!”
그는 보통 싸울 때 말에서 내려서 두 발로 달리며 전투를 했다. 그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격렬한 전투를 말이 견딜 수가 없어서였다. 강력한 적과 싸우다보면 별 것 아닌 공격에도 말이 죽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악귀들을 상대로는 상관없었다. 그들은 말에게 상처 하나를 내기도 전에 모두 목이 떨어질 것이니까. 엔디미온은 사실 기마 전투에도 능숙했다.
“키에에엑!”
악귀들이 본격적으로 마을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자경단 중 일부가 도망치고 일부만 남아서 적들과 맞서는 순간에 엔디미온이 성검을 크게 휘둘렀다. 빛의 칼날은 악귀 다섯 마리의 목을 한꺼번에 베었다.
자경단은 물론이고 악귀들까지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엔디미온은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러 악귀들의 목을 베었다. 그들이 지르는 커다란 비명은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에 묻혔다.
악귀들은 몸을 돌려서 엔디미온을 공격했지만 신성력으로 강화된 말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그들을 농락했다. 성검의 빛이 한 번 번쩍일 때마다 악귀들의 몸이 갈라졌다. 사지가 잘리고 목이 잘리며 몸이 반으로 갈라지기도 했다.
내리는 비는 악귀들의 몸에서 나오는 초록색 액체들을 씻어냈다. 오염된 것 같은 초록색 물이 개울처럼 흘렀다.
몇 분 걸리지도 않고서 스무 마리의 악귀들을 모두 해치운 엔디미온은 젖어서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서 넘겼다. 콧날을 타고 흐르던 빗물이 코끝에서 아래로 뚝 떨어졌다.
“뭐, 뭐야?”
“악귀들이······.”
“호, 혼자서 다 죽였다고?”
자경단은 제자리에서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감히 저항할 수도 없을 만큼 강대한 적을 엔디미온은 혼자서 칼질 몇 번만으로 모두 물리쳤다. 그들은 지금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어디 다친 곳은 없소?”
빗물을 맞으며 말을 타고 다가온 엔디미온의 물음에 자경단이 정신을 차렸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중년의 남자가 어어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저기 혹시······.”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보시오.”
“아, 저기 그, 혹시 성기사십니까?”
말을 타고 다니며 혼자서 악귀들을 썰어버릴 수 있는 것은 성기사뿐일 것이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갑옷도 입지 않았고 망토를 두르지도 않았으며 기사수도회의 문장도 없었다. 그럼에도 자경단은 엔디미온을 성기사라고 생각했다.
성기사를 직접 본 적 없는 순수한 촌뜨기들다운 생각이었다. 엔디미온은 빗물에 젖어 다시 흘러내려온 머리카락을 또 한 번 쓸어 넘기며 웃었다.
“지나가던 길손일 뿐이오.”
“그럼 성기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성기사들은 이런 후줄근한 차림새로 다니지 않소. 갑옷을 입고 망토를 두르고 있지. 가슴에는 기사수도회의 문장을 달고 있고.”
“호, 혹시 악마사냥꾼인가 하는 그런 분이십니까요? 저어, 죄송하지만 저희 마을은 가난해서 돈을 드릴 수가 없는데······.”
농사나 짓고 살던 시골 농부들이 성기사니 악마사냥꾼이니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엔디미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성기사와 악마사냥꾼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은 그들을 만날 일이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렛 때문에 악마와 악귀들이 날뛰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서 이런 조용한 마을까지 악귀들이 들이닥치게 된 것이다.
엔디미온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했잖소. 지나가던 길손일 뿐이라고.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오.”
그 말을 하자 남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엔디미온은 그의 얼굴을 보다가 불쑥 말했다.
“아니, 생각해보니 대가를 좀 받아야겠소.”
남자의 낯빛이 다시 창백해졌다. 엔디미온은 혼자서 악귀 스무 마리를 썰어버리는 자이니 그가 돈을 달라고 칼부림이라도 하면 막을 방도가 없었다. 남자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 저희가 가난하여 드릴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은데······. 돈이 없으니 이번에 수확한 밀이라도 좀 드릴깝쇼······.”
엔디미온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그런 것을 받아서 어디다 쓰란 말이오.”
“죄,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정말 드릴 게 없어서······.”
“따뜻한 목욕물. 그리고 술과 먹을 것.”
“네?”
엔디미온은 당황하는 남자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따뜻한 목욕물과 술을 준비해주시오. 그리고 먹을 것도. 그게 내가 바라는 대가요.”
남자는 어리둥절해하다가 다시 얼굴이 환해졌다.
“아, 그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지요! 자, 얼른 마을로 가십시다!”
엔디미온은 자경단과 함께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허리춤에 얌전히 매달려 있던 에투알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왜 쓸데없는 장난을 친 거요?”
“그냥.”
“유치하시긴.”
엔디미온은 마을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일단 씻고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좀 들어봐야겠어. 요즘 분위기가 어떤지 말이야.”
“너무 심상치 않기만을 바랄 뿐이오.”
엔디미온도 동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