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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77화 (177/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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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으로 오시지요. 여기가 저희 집입니다. 금방 목욕물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집 안으로 엔디미온을 안내했다. 그의 아들로 보이는 소년이 얼른 나와서 말의 고삐를 넘겨받았다. 마구간으로 말을 끌고 가는 것을 보다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엔디미온은 남자의 부인에게 수건을 받아서 젖은 얼굴과 머리카락의 물기를 훔쳤다. 흠뻑 젖은 그를 보고서 부인이 화로 쪽으로 와서 몸을 녹이라고 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고개를 저었다.

성배의 힘을 받아들인 그의 몸은 추위를 몰랐고 감기에도 들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았다. 마른 나무 바닥에 자국이 생겼다.

“목욕물이 준비됐습니다요.”

남자가 다시 돌아와서 엔디미온을 욕실로 데리고 갔다. 욕실이라고 해봤자 사람 한 명 들어갈 정도로 좁은 공간에 커다란 나무통 하나 있는 것이 전부였다. 나무통 안에서는 희끄무레한 김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욕실 안은 목욕물의 온기로 후끈했다.

“느긋하게 씻으시고 나오세요. 바로 술과 먹을 것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고 남자는 욕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엔디미온은 젖은 옷을 벗어서 바닥에 내던졌다. 목욕물의 온도를 확인하고 발을 담그려는 순간 갑자기 욕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아, 새 수건을 드린다는 걸 까먹어서······. 어?”

수건을 들고 욕실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던 남자는 엔디미온의 뒷모습을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단련된 근육들은 움직임을 따라서 불끈거렸다. 그것은 마치 섬세하게 만들어진 조각상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남자가 놀랐던 것은 근육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몸 때문이 아니었다.

등 뒤의 그림. 완벽한 역삼각형 모양을 자랑하는 등 위를 가득 메운 커다란 그림 때문이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잔 위를 장미의 줄기가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림이었지만 실물을 보는 것처럼 완벽했다.

“어······.”

엔디미온은 고개만 돌려서 말했다.

“무슨 일이오?”

“아, 아니, 수건을 드리려고······. 그, 뭐냐, 등의 그림이 멋있네요.”

저 순진한 남자는 자신이 전설 속에나 나오는 성배를 직접 목도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엔디미온은 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건은 거기 두시오. 칭찬 고맙소. 이제 그만 씻게 나가주시겠소?”

“아, 알겠습니다.”

남자가 후다닥 나갔다. 엔디미온은 이제 미지근한 정도로 식은 목욕물 안에 몸을 담갔다. 그는 따끈한 목욕물에 몸이 녹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삼십 분 정도 목욕물에 몸을 담근 후에 일어나 몸을 씻었다.

개운하게 씻고 나서 수건으로 집었는데 바닥을 보니 성검이 쓰러져 있었다. 분명히 씻기 전에 벽에 기대어 뒀는데 왜 쓰러졌는지 알 수 없었다.

“뭐해?”

“크흠,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옷이나 입으시오.”

“너 설마 부끄러워하는 거냐?”

“크흠! 어찌 숙녀가 사내의 헐벗은 모습을 그냥 보겠소! 빨리 옷이나 입으시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씻을 때 성검을 욕실 안으로 들고 들어온 적이 없었다. 엔디미온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닦고 옷을 입었다. 그리고 성검을 집어서 허리춤에 매다는데 조금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

“아, 나오셨습니까? 술과 먹을 것을 준비해뒀습니다.”

식탁 위에는 술병과 음식들이 있었다. 가난한 마을이라 그런지 차린 것은 별로 없었지만 엔디미온은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는 가방에서 자신이 가져온 먹을 것을 더 꺼내서 식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침을 꼴깍 삼키고 있는 소년을 보며 손짓을 했다.

“와서 먹어라, 꼬마야. 당신들도 드시오.”

소년은 부모의 눈치를 봤고 엔디미온이 한 번 더 손짓을 하자 가족들 전부가 식탁으로 다가왔다. 엔디미온이 꺼낸 것은 훈연 햄으로써 이런 마을에서 보기에는 꽤나 고급인 음식이었다. 소년이 조심스럽게 햄을 잘라서 한 입 먹고 눈을 크게 떴다.

엔디미온은 웃으며 술잔을 집었다.

“미안한데 술 좀 따라주시겠소? 내가 내 손으로 술을 따를 수 없는 저주에 걸려서.”

그게 무슨 저주야? 남자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시키는 대로 술잔을 채웠다. 엔디미온은 술이 성수로 변하기 전에 얼른 목구멍 뒤로 넘겼다. 목구멍이 찌르르 하고 배가 떨렸다. 상당한 독주였다.

“저희 집에서 빚은 벌꿀주입니다. 맛이 어떠신가요?”

“······상당한데.”

“하하, 좀 독하긴 하지요.”

엔디미온과 남자의 가족들은 술과 음식을 즐겼다. 이제 슬슬 배가 좀 찼을 때 엔디미온이 불쑥 말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요즘 악귀들이 자주 출몰하오?”

악귀라는 말이 나오자 남자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는 일생 밭을 갈고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고 악귀를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런데 오늘 스무 마리의 악귀가 나타났고 그것들 때문에 마을이 몰살될 뻔 했다.

악귀라는 말만 들어도 깜짝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곳에는 악마나 악귀들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우리 마을에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요. 저희도 이제 짐을 싸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벌써 다른 마을 몇 곳이 망해버렸다고도 합니다. 함락된 도시도 있다고 하고요.”

마을이야 악귀들의 공격만으로도 망할 수 있지만 도시가 무너지려면 강력한 힘을 가진 악마가 있어야 한다. 엔디미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올렛이 일으킨 전란은 이제 온 세상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로 갈 생각이오?”

“근처에 도시가 하나 있습니다. 토르델이란 곳인데 그쪽으로 갈 생각입니다. 그런데 토르델이 우리 마을 사람들을 받아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 난민들이 그쪽으로 몰리고 있다고 하거든요. 일단 받아주든 아니든 그쪽으로 갈 생각입니다. 여기서 더 버티고 있어봤자 남는 건 개죽음뿐이니까요.”

개죽음이라는 말이 나오자 소년이 남자를 쳐다보았다. 부인은 소년의 귀를 손으로 부드럽게 막으며 방으로 돌아가라고 속삭였다. 소년은 총총걸음으로 방으로 돌아갔고 엔디미온이 입을 열었다.

“그 토르델이란 곳은 어디에 있소?”

“서쪽으로 가면 하루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전하시오.”

“뭘 말입니까?”

엔디미온은 마지막 잔을 비우고서 말했다.

“내일 아침에 토르델로 떠나게 짐을 챙기라고. 내가 토르델까지 가는 길에 함께하겠소.”

남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살기 위해서는 토르델로 가야하지만 저들끼리 갈 엄두가 나지 않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이 함께 한다면 안전하게 갈 수 있었다. 남자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감사하다고 말했다.

“난 방에 가서 쉬고 있겠소. 내일 아침이오. 한 명도 늦는 사람이 없게 하시오.”

남자는 얼른 집을 나가서 마을을 돌아다녔다. 엔디미온은 부인이 안내해주는 방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했다.

“왜 저들을 도와주겠다고 하셨소?”

“나랑 가는 방향이 같으니까.”

호수의 여왕을 만나러 가려면 서쪽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토르델도 서쪽에 있으니 이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참으로 친절하시오. 과연 성배기사.”

“힘이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나와 같이 했을 거다.”

엔디미온과 성검 에투알은 시시한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내리는 비 때문에 해가 일찍 졌다. 마을을 돌아다니던 남자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모두 전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도 집 안의 물건을 정리하며 내일 토르델로 떠날 준비를 했다. 엔디미온은 마을에 마차가 있냐고 물었고 남자는 있다고 했다.

다행인 일이었다. 마을에는 당연히 아이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걷는 속도는 어른보다 한참 느리다. 어른들이 자기 자식들을 버리고 갈리는 없으니 자연히 무리의 이동 속도가 느려질 것이고 그것은 그들이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마차가 있다면 안심이었다. 엔디미온도 사람인지라 그들 전부를 완벽하게 보호할 자신은 없었다. 위험과 마주치는 일은 최대한 줄여야 했다.

“당신도 일찍 자시오. 말해두겠지만 나는 되도록 빨리 토르델로 가는 것에 집중할 거요. 뒤쳐지는 사람들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다는 뜻이오.”

으름장을 놨지만 에투알은 엔디미온이 단 한 명도 그냥 두고 가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흔드는 것으로 웃음을 대신했고 엔디미온이 큼 소리를 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 그······.”

“엔디미온이오.”

“네, 엔디미온님. 명심하겠습니다. 저는 존입니다.”

“그럼 내일 봅시다, 존.”

“네, 그럼 내일 또.”

존이 방을 나갔고 엔디미온은 바닥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그는 눈을 감고서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벌써 아침이군.”

아침이라기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일찍 일어난 엔디미온은 창문을 통해 날씨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비는 그쳤지만 땅이 젖어서 걷기 힘들 듯 했다. 그는 짐을 챙겨서 거실로 나왔고 부지런히 아침 준비를 하던 부인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어라, 일찍 일어나셨군요.”

존이 부스스한 꼴로 나타났다. 그 뒤에 그의 아들이 일어났고 엔디미온은 존의 가족과 함께 간단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들은 어제 미리 정리해둔 짐을 챙겨서 바깥으로 나갔다. 마을 광장에는 다른 마을 사람들도 짐을 들고서 모여 있었다. 그들은 저들끼리 불안한 듯 수군거리다가 존과 함께 나타난 엔디미온을 보고서 입을 딱 다물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엔디미온의 존재는 하늘에서 내려온 초인과 같았다.

특히 자경단원들은 그가 어제 혼자서 스무 마리의 악귀들을 쓸어버리는 것을 보고 경외감 비슷한 것을 가졌다.

“성기사님, 저희와 함께 가주신다고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능자께서 당신을 축복할 겁니다, 성기사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늙은 여인 하나가 엔디미온의 손을 잡고 연신 감사하다고 말했다. 엔디미온은 자신이 성기사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시골 사람에게는 칼 잘 쓰고 악귀 잘 죽이는 사람은 전부 다 성기사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모든 성기사들의 우상인 성배기사였으니까.

“아이들과 노인들은 마차에 태우시오. 잠시 뒤에 출발하겠소.”

엔디미온이 시키는 대로 아이들과 노인들은 마차 두 대에 각각 나누어서 탔다. 말 위에 탄 엔디미온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에 빠진 사람은 없느냐고 물었다. 존이 전부 다 모였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출발하겠소.”

따각따각 하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의 바퀴가 굴러갔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길이 모두 진창으로 변해 이동 속도가 느려졌으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차 두 대와 짐을 짊어진 서른 명의 사람들은 엔디미온과 함께 목숨을 건 여정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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