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78화 (17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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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뒤쳐지지 않게 잘 따라오시오. 낙오자까지 전부 챙길 여유는 없으니.”

엔디미온의 말에 모두가 부지런히 뒤를 따랐다. 그 말이 진심은 아니었지만 사실이기는 했다. 마을에서 토르델까지는 하루가 꼬박 걸린다. 하지만 지금은 무거운 짐을 가진 서른 명의 사람들이 움직여야 하니 그것보다 더 걸릴 것이다. 아마 내일 밤 늦게 쯤에 도착하리라.

이동 시간이 늘어날수록 사람들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은 엔디미온도 잘 알고 있었다. 악마 서른 마리를 죽이는 것은 쉬워도 사람 서른 명을 지키는 것은 어렵다.

그는 강행군을 통해 되도록 빨리 토르델까지 갈 생각이었다.

“존, 이리 와서 방향을 잡아주시오.”

엔디미온은 이 일대의 사람이 아니니 토르델이 어디인지 모른다. 자연히 존이 엔디미온을 도와서 방향을 잡았고 사람들은 그 뒤를 따랐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점심이 될 때까지 걸었지만 악귀나 악마가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그것이 성기사의 은총 덕분이라며 감격했다. 엔디미온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간단히 식사를 했다.

아무리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해도 제대로 먹지 않은 상태에서 강행군을 이어나갈 수는 없다. 지금 엔디미온과 함께 있는 자들은 훈련된 성기사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었다.

엔디미온은 마을 사람들이 간단히 식사를 하는 동안에 주변을 확인했다. 마을 사람들은 성검이 지킬 수 있도록 두고 갔다. 한참 주변을 돌아다녔지만 악마나 악귀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리, 식사 좀 하세요.”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엔디미온에게 존의 부인이 먹을 것을 들고 왔다. 딱딱한 빵과 삶은 감자뿐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몹시 귀중한 식량이었다.

엔디미온은 부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소. 아이들이나 더 먹이시오.”

“하지만······.”

“약자를 위한 선행과 전능자를 향한 믿음이 내 마음의 양식이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오. 가져온 것은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시오.”

“아, 과연 성기사 나리십니다······. 마음이 어찌 그리 고우신지.”

부인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서 기도를 올렸다. 무어라 중얼거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전능자에 대한 감사의 인사일 것이다.

“그래도 하나는 드세요, 나리. 나머지는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게요.”

부인은 기어코 빵 하나를 엔디미온에게 주고 갔다. 넘치는 성배의 힘 덕분에 며칠 동안은 식사를 하지 않아도 거뜬한 것이 성배기사건만 미안해서 그냥 갈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엔디미온은 딱딱한 빵을 이로 찢어서 꼭꼭 삼켰다. 성검 에투알이 허리춤에서 흔들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성기사다운 언행이었소.”

대답은 없었다. 엔디미온은 우적우적 빵을 씹어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백 년 전이었다면 저것보다 더 낯간지러운 말도 했겠지만 요즘은 아니었다. 백 년의 시간은 아주 길어서 엔디미온의 성격과 말투를 바꾸기에 충분했으니까.

그럼에도 무게를 잡고 말했던 것은 마을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였다. 육체가 멀쩡해도 정신이 지치면 사람은 움직일 수 없다. 이들 전부를 살려서 토르델까지 데려가기 위해서 엔디미온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물리적인 수호자가 되어야 했다.

엔디미온의 언행이 고결하면 고결할수록 사람들은 그를 더 의지하고 따르며 끝까지 힘을 짜낼 것이다. 사람은 의지할 곳이 있으면 결코 무너지지 않으니까.

“식사가 끝났으면 다시 출발하겠소. 해가 지기 전까지 이동하고 그때까지 휴식은 없소. 뒤쳐지지 않게 잘 따라오시오.”

엄밀히 말해서 고행이었다. 그냥 걷는 것도 아니고 무거운 짐들을 어깨와 등에 지고서 가야 하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엔디미온의 뒤를 따랐다. 그들에게 엔디미온은 희망이었다. 또한 꺼지지 않는 불꽃이었다.

그 어떠한 어둠 속에서도 따라갈 불꽃이 있다면 사람은 힘을 낼 수 있었다.

“다들 수고했소. 더 어두워지기 전에 잠잘 곳을 찾아봅시다. 동이 트면 출발할 것이니 다들 일찍 자시오.”

타오르던 하늘이 천천히 묵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별과 달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하룻밤 머물 곳을 찾아 움직였다. 그들은 두 대의 마차를 바람막이로 쓰고 모닥불에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밤을 보냈다.

마을 사람들 몇이 불침번을 서겠다고 했지만 엔디미온은 거절했다. 그는 자신이 밤을 샐 것이니 그냥 잠을 자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잠은 자셔야죠. 저희가 불침번을 설 테니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세요.”

존의 말에 엔디미온은 고개를 저었다.

“됐소. 가서 잠이나 자시오.”

“저희만 잠을 자는 건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저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다 나리 덕분인데.”

“만약 당신들이 불침번을 서는 사이에.”

엔디미온은 허리춤의 성검을 나무에 기대어 세웠다.

“악마나 악귀들이 나타난다고 하면 당신들이 막을 수 있소?”

“그, 그건······.”

“그러니 가서 자시오. 나는 하룻밤 정도 자지 않는다고 문제가 생길 만큼 나약하지 않으니까.”

“알겠습니다······.”

존과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엔디미온은 그들이 가족들과 몸을 맞대고 눈을 감는 것을 지켜보다가 모닥불 안에 땔감 몇 개를 더 집어던졌다. 타닥타닥 소리가 나며 불씨가 하늘 위로 튀었다.

고된 행군 탓에 마을 사람들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그들이 모두 잠든 것을 확인한 엔디미온은 불이 꺼지지 않게 땔감을 좀 더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맡긴다, 에투알.”

“산책이라도 가시오?”

“비슷하지.”

엔디미온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리를 움직였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충분히 떨어진 후에 그가 말했다.

“쥐새끼들처럼 숨어서 따라오느라 고생 많았다.”

그 말에 어둠 속에서 새빨간 안광 수십 개가 떠올랐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떠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은밀하게 따라오던 악마와 악귀들이었다.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있음에도 엔디미온의 기세가 영 심상치 않아서 조용히 뒤를 따라오기만 했다. 밤이 되면 습격할 생각이었는데 엔디미온에게 전부 들켜버리고 말았다.

이제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싸우기. 엔디미온이 제일 잘 하는 일이었다.

사방으로 머리가 날아가고 사지가 뜯겨나갔다. 쏟아지는 초록색 액체는 바닥을 적셨고 터져 나오는 비명은 허공을 가득 채웠다.

적의 숫자는 수십이었고 엔디미온은 혼자였으며 무기 하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적들을 압도했다. 맨손으로 악마와 악귀들을 때리고, 부수고, 찢고, 뜯었다. 두 손이 초록색으로 물들 정도로 학살했다.

악귀들은 도망치려 했으나 성배기사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악귀의 아가리를 좌우로 찢어서 내던진 후에 악마의 머리를 주먹으로 박살냈다.

수십 마리의 적들을 모두 끝장내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근처 개울에서 손을 씻은 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성검은 여전히 나무에 기대어져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엔디미온은 가만히 생각했다. 누가 이들을 여기까지 내몰았을까. 바이올렛? 아니다. 그녀는 절벽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바위를 살짝 밀었을 뿐이다. 그녀가 밀지 않았더라도 바위는 불어오는 바람에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벌어졌을 일이라는 소리다. 엔디미온은 입맛이 썼다. 악마들의 군세, 공격 받는 사람들, 도망치는 자들, 맞서 싸우는 자들. 그 모든 것들이 백 년 전의 자신의 노력을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바이올렛은 그에게 만들어진 존재라고 했다. 만들어졌다면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럼 자신은 그 목적을 완벽하게 수행했는가? 아니라면 자신의 존재의의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내 기사님, 아침이오.”

부드러운 목소리에 엔디미온은 성검을 챙겨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사람들을 깨우고 출발할 준비를 했다. 아침 식사는 가면서 하기로 했다. 먹을 것이라고 해봤자 어제와 똑같으니 걸으면서 먹을 수 있었다.

존은 이제 절반 넘게 왔다고 했다. 이 속도라면 늦은 밤이 아니라 저녁 정도에 도착할 것 같다고 했다. 희소식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는 것이 엔디미온의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니까.

엔디미온은 이제 존에게 일행을 이끌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을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그는 단지 가끔씩 무리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갔다가 다시 돌아올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돌아올 때마다 몸에서 역겨운 냄새가 났다.

“나리, 그거 혹시······.”

엔디미온의 소매가 초록색으로 물든 것을 보고 존이 입을 열었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곧 다시 다물어야 했다.

“별 것 아니니 너무 궁금해 하지 마시오.”

“네에······.”

식사 시간이 되면 잠깐의 휴식. 그리고 다시 출발. 이틀 연속의 강행군이었지만 오늘이면 토르델에 도착한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기쁘게 움직였다.

가을의 끝자락이자 겨울의 초입에서 태양은 빠르게 저물었다. 점차 노을이 지기 시작하자 존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토르델 안에 들어가려면 밤이 되기 전에 도착해야 했다. 기껏 토르델에 도착해도 하룻밤을 성벽 아래에서 보내야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저기 토르델이 보입니다!”

마을 사람들 중 하나가 소리쳤고 존은 환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엔디미온을 향해 말했다.

“이제 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전부 나리 덕분입니다!”

“그런데 곧 문이 닫히겠는걸.”

악마와 악귀들이 심하게 날뛰면서 토르델의 성문은 보통 때보다 더 일찍 닫혔다. 성 안의 사람들을 위해서 당연한 일이었다.

엔디미온의 말대로 천천히 닫히고 있는 성문을 보며 존이 낙담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성벽 아래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토르델이 귀족 무리도 아니고 시골 농부들을 위해서 다시 성문을 열어줄 리는 없었다.

“일단 갑시다. 문이야 내가 열어주겠소.”

문을 열어? 무슨 수로? 존은 미심쩍어 했지만 엔디미온의 태도가 워낙 당당했다. 마을 사람들은 일단 성문 가까이까지 갔다.

“너희들은 뭐냐! 문은 이미 닫혔다! 내일 다시 와! 성벽 근처에서 얼쩡거리면 악마나 악귀들이 꼬이니 멀리 떨어지고!”

성벽 위의 병사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존이 낙담했다. 역시나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한숨을 내뱉으며 하룻밤 머물 곳을 찾아 떠나려고 할 때였다.

엔디미온이 성큼성큼 걸어서 성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너 귀머거리냐? 문은 이미 닫혔다고! 내일 다시 오란 말이다!”

“너.”

크게 소리치는 목소리가 아니었음에도 엔디미온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성벽 위까지 들렸다. 병사는 그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말했다.

“너?”

“그래, 너. 빨리 문 열어.”

“이거 완전히 미치광이구만? 문은 닫혔다고! 오늘 닫힌 문은 오늘 다시 열리지 않는다! 이것은 토르델 영주님께서 정하신 규칙이다! 네가 뭐라고 감히 문을 열라 말라야!”

“그럼 이 많은 사람들이 추위에 떨면서 하룻밤을 보내라는 소리냐? 악마와 악귀들에게 습격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그 잘난 토르델 영주의 규칙이냐?”

“이게 감히 겁도 없이 영주님을 들먹여? 네가 뭐 귀족이라도 되냐? 아니면 성기사라도 돼? 네가 뭐라도 되냐고! 이곳은 토르델 영주님의 영토이고 모든 것은 영주님의 뜻대로다! 알았으면 썩 꺼져! 너희들이 떼를 쓴다고 다 들어줄 것 같으면 규칙이 왜 있겠어?”

엔디미온은 그 말에 눈을 부릅뜨고 입을 크게 벌렸다. 그의 입에서 벽력과 같은 노성이 터져 나왔다.

“이 건방진 것아! 이 세상의 모래 한 톨부터 물 한 방울까지 전능자께서 하나도 빠짐없이 오롯이 소유하고 있으신데 어찌 감히 토르델 영주 따위가 토지의 주인을 논하느냐! 네 주인이 이곳의 신이냐? 하늘 위에서 굽어보며 땅을 어루만지는 전능한 자냐? 말해라, 이 얼치기야! 너는 내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오냐, 잘 물었다! 들어라, 이 아둔한 자야! 나는 전능자의 화신이며 번뜩이는 칼날이자 황금장미 기사수도회의 엔디미온이다! 너는 감히 전능자의 종복이 가는 길을 가로막겠다는 거냐!”

커다란 노성에 성벽 위에 병사는 깜짝 놀라 까무러쳤다. 그가 기절해버리자 다른 병사들이 그를 데리고 사라졌고 잠시 뒤에 성문이 열렸다.

다른 병사들이 황금장미 기사수도회의 이름과 엔디미온의 박력에 놀라 성문을 연 것이었다.

“아니, 저, 성기사가 아니라면서요?”

존이 멍청하게 눈을 끔벅이며 묻자 엔디미온이 씩 웃었다.

“물론 아니지. 저들에게 거짓말 한 거요. 그러니 거짓말이 들키지 않게 조심하시오.”

존은 이제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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