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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79화 (179/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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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들 들어갑시다. 다들 지쳤으니 얼른 쉬어야지.”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어도 엔디미온 덕분에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린 것은 사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환호하면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 안은 부산스러웠다. 성벽 위의 병사들은 엔디미온이 영 심상치 않은 존재란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고 성벽 아래의 병사들은 대체 무슨 소란이 벌어진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성벽 위의 병사 하나가 손발을 달달 떨며 들것에 실려나가는 것을 보았고 갑자기 성문을 열리는 것도 보았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상한 일이었다. 일몰 이후로는 성문을 열지 않는 것이 토르델의 규칙인데 성벽 위의 병사들이 그것을 어겼으니 말이다.

대체 누가 행차했기에 이 난리일까. 성벽 아래의 병사들은 목을 쭉 빼고서 성문을 통과해서 들어오는 무리를 보았다.

“뭐야, 그냥 난민들인데?”

행색이 꾀죄죄하고 등 뒤에 커다란 짐을 졌으니 분명히 난민들이었다. 성벽 아래의 병사들은 어리둥절하다가 말을 타고 당당하게 들어오는 엔디미온을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들 역시 엔디미온이 범상치 않음을 느꼈음이다.

“성기사래.”

“황금장미 기사수도회라던데?”

“그게 뭐냐? 유명한 기사수도회야?”

“멍청아! 지금 성도에서 가장 잘 나가는 기사수도회라고!”

병사들은 저들끼리 수군댔고 일부 병사들은 황금장미 기사수도회의 성기사가 왔음을 영주에게 제일 먼저 알리기 위해 경쟁 아닌 경쟁을 했다.

이제 성 안은 물론이고 영주궁까지 소란스럽게 변했다. 불이 꺼져있던 영주궁 곳곳에 촛불과 횃불이 켜졌다.

엔디미온을 따라서 들어왔던 마을 사람들은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여전히 당당한 태도로 말을 몰았다. 우물쭈물하는 난민들과 개선장군 같은 태도의 성기사가 영주궁으로 향했다.

그들이 절반쯤 왔을 때 저쪽에서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갑옷을 입은 무리였는데 무장 상태를 보아하니 일반 병사들이 아니라 성기사들이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잔 모양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무리의 대장은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남성이었는데 그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러서 일견 난쟁이 대장장이들을 연상시켰다.

“이야기는 들었네. 황금장미 기사수도회의 엔디미온 경이라고. 반갑네. 나는 놋쇠 잔 기사수도회의 대장이자 토르델의 영주인 그레이라고 하네.”

한 사람이 두 직책을 겸하는 것은 몹시 드문 일이었다. 그림발드가 다스리는 로게나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정치와 종교는 분리됐다.

엔디미온은 슬쩍 눈을 움직여서 그레이의 가슴을 보았다. 그의 가슴에는 다른 성기사들과 다르게 기사수도회의 문장이 없었다.

시선을 눈치 챈 그레이가 설명을 덧붙였다.

“며칠 전의 싸움 때 놋쇠 잔 기사수도회의 대장인 아르마 경을 잃었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가 임시로 대장 대행을 맡게 됐다네. 부족한 몸이지만 젊었을 적 이등기사였거든. 본래 영주였던 형님이 일찍 타개하지만 않으셨다면 지금까지도 성직에 종사하고 있었겠지.”

엔디미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작은 기사수도회라도 그 대장은 특등기사가 맡는다. 그런데 놋쇠 잔 기사수도회의 대장이 죽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곳에서 벌어진 싸움이 격렬했다는 뜻이었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병사들과 성기사들의 얼굴에 어둠이 가득했다. 이곳의 상황도 그리 낙관적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반갑소, 그레이 경. 황금장미 기사수도회의 엔디미온이오. 이야기를 들었다니 대화가 한결 수월하겠군. 이들은 악귀들의 습격에 마을을 버리고 여기까지 도망을 온 난민들인데 이곳에서 머물게 해주시오.”

“엔디미온 경.”

그레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덥수룩한 수염이 약간 떨렸다.

“병사들을 윽박질러 억지로 성문을 열게 했다고 들었네.”

“나는 죄 없는 사람들이 추위와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했을 뿐이오. 그것이 죄가 될 수 있소?”

“규칙은 지켜야 하는 것일세. 그 어떠한 경우에도 말이지. 규칙이란 것은 질서의 초반이니 모두가 지킬 때 비로소 질서가 바로 서는 것이고 한 명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질서가 무너지는 것일세. 그리고 우리의 규칙은 일몰이 지난 후에 성문을 열지 않는 것일세.”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규칙이 존재하는 것이오.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소. 당신은 성벽 아래에서 악귀에게 잡아먹히고 있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말할 수 있으시오? 그레이 경, 선한 의지가 있다면 어떤 것도 악한 규칙이 될 뿐이오. 기억하시오. 우리는 규칙이 아니라 선의에 의해 살아야 하오.”

“선의라.”

그레이는 고개를 숙이고 빈정거리듯 웃었다. 엔디미온은 턱을 약간 쳐들고서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아르마 경을 왜 잃었는지 아는가? 오늘 같은 밤이었어. 난민들이 몰려왔고 우리는 얼른 성문을 열어서 그들을 받아들였지. 그때 아르마 경이 성문에서 주변을 정찰하고 있었다네. 이제 난민들이 전부 다 성 안으로 들어왔고 성문만 닫으면 되는데 갑자기 악마와 악귀들이 나타났지. 모두 나가서 싸우기에는 너무 많아서 성문을 닫아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는 거야. 그래서 아르마 경이 홀로 맞섰네. 성문을 다 닫을 때까지 홀로 싸우고 또 싸웠네. 그리고 그 날 나는 용감한 성기사이자 오랜 친구를 잃었지.”

엔디미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의 목소리가 너무나 비통해서.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의? 그것은 힘 있는 자들의 것일세. 자네 같은 사람 말이야. 우리에게 강자의 선의를 강요하지 말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차니까. 전능자께서는 세상 모든 소님이 네 가족이자 친구이니 먹을 것과 잠자리를 내주라고 했지만 나는 거절하겠네. 불신자라고 해도 상관없네. 이 땅은 내 형님이 사랑하셨고 내 아버지가 지키셨으며 내 선조가 가꾸신 곳인 동시에 내 백성들의 보금자리이니 나는 이곳을 반드시 지켜야겠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엔디미온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거칠게 말을 내뱉은 그레이는 후 하고 숨을 한 번 고르더니 엔디미온의 뒤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난민들을 한 번 보았다. 그는 버릇처럼 또 한 번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저들에게 머물 곳을 내주고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라. 이미 성 안에 들인 걸 어쩌겠어.”

마을 사람들은 그 말에 다시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들은 성기사들을 따라서 어디론가 향했다. 존이 아직 우두커니 있는 엔디미온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어, 나리······. 정말 고맙습니다. 나리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겁니다요.”

엔디미온은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얼른 마을 사람들을 따라가라고 손짓했다. 존과 그 가족들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가 마을 사람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레이는 영주궁으로 돌아갔고 거리에 남은 것은 이제 엔디미온 혼자뿐이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셨소.”

“······강자의 선의를 강요하지 말라.”

엔디미온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혼잣말을 했다.

“내가 너무 무심했군.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는다더니 딱 그 꼴이야.”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양쪽 다 각자의 입장이 있었던 것뿐이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소.”

성검 에투알의 위로에도 엔디미온은 한참동안 길 위에서 가만히 있었다. 잠시 뒤에 그는 여관을 찾아 걸었다. 마을 사람들을 안전하게 토르델까지 데려왔으니 이제 그의 역할은 끝났다. 내일 동이 트면 곧장 성문을 나서서 호수의 여왕이 있는 곳까지 다시 여행을 떠나야 했다.

발견한 여관의 마구간에 말을 맡기고 여관 안으로 들어간 엔디미온은 방 하나를 빌렸다. 곧장 방으로 들어간 그는 침대 위에서 가만히 생각했다.

나는 왜 싸우는 걸까. 그게 의무기 때문이라는 것은 본질적인 대답이 될 수 없었다.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왜 지키려고 하지? 그게 옳은 일이니까?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며 점점 커졌다. 머릿속이 꽉 찰 만큼 커졌다가 다시 터지면서 백짓장처럼 희게 변했다.

엔디미온에도 이제 어렴풋이 자신과 다른 영웅들의 차이점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욕망이 없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욕망이.

비다르는 부와 명성을 위해 싸웠다. 라우렌시오는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싸웠다. 바이올렛은 자신의 동생을 위해서 싸웠다. 라이오넬은 검술의 끝을 보기 위해 싸웠다.

그럼 엔디미온은? 그에게는 욕망이 없었다. 그저 의무에 대한 강박과 맹목만이 있었을 뿐이다. 욕망은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욕망이 없다면 그 사람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엔디미온이 그랬다. 그는 사람들을 지키고 사악한 것들을 몰아내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여겼다. 거기에 욕망은 없었다. 사람들을 지켜서 부와 명성을 얻으려는 욕망도 없었고 사악한 것들을 몰아내서 더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도 없었다.

완전한 무욕. 그럼에도 그는 살아서 움직였다. 그것은 땔감 없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몹시 기이한 일이었다.

바이올렛은 말했다. 엔디미온은 만들어진 존재라고. 호수의 여왕이 만들어낸 존재라고.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두려웠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두려움이었다. 성배기사는 대악마 다르디낭과 싸웠고 그의 적자들과도 싸웠다. 목숨을 건 싸움을 수없이 했음에도 단 한 번도 느끼지 않았던 두려움을 지금 이 순간에 느꼈다.

엔디미온은 살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나약함을 발견했다. 그것은 분명한 약점이었고 단단한 육체와 엄청난 괴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다. 엔디미온은 침대에 누워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시간의 흐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달과 별의 움직임이 눈에 보였다. 엔디미온은 두 눈을 뜨고서 창문 너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귀에 소란스러움이 감지됐다.

“습격이다! 놈들의 습격이야!”

“제기랄! 녀석들은 잠도 없나? 왜 새벽에 지랄이야!”

병사들이 다급하게 뛰어가는 소리, 욕설, 비명, 어디선가 들려오는 괴성. 성벽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여관 안도 잠에서 깬 사람들 때문에 곧 소란스러워졌다. 여관 안으로 들어온 병사들이 침착하라고 말하며 절대로 여관 바깥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성문이 무너지려고 해! 다들 성문으로 가!”

창문 너머에서 병사들이 달리는 소리가 났다.

“제기랄! 악귀 놈들이 날아서 넘어오고 있다! 인가 쪽으로 가기 전에 막아!”

다급한 외침과 함께 활 쏘는 소리가 났다.

“꺅! 악귀가 제 동생을 잡아갔어요! 도와주세요! 아무나 제발! 도와주세요!”

그 순간 엔디미온은 몸을 일으켜서 성검을 손에 쥐었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에 망설임이라고는 없었다.

자신에 대한 진실은 아직 모른다. 하지만 그게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돕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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