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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80화 (180/199)

180

“자, 잠깐만! 지금 나가면 위험······.”

엔디미온은 자신을 말리는 여관 주인을 밀어내고 바깥으로 나갔다. 여관의 문을 열자마자 날벌레처럼 생긴 악귀가 날아왔고 엔디미온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날렸다.

그는 손을 한 번 털고서 여관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여관 안의 사람들에게 당부했다.

“절대로 나오지 마시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후에 엔디미온은 성큼성큼 걸었다. 비명을 질렀던 소녀는 멀리 있지 않았다.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울고 있는 그녀를 일으켜 세운 엔디미온은 동생이 어디로 잡혀갔냐고 물었다.

“아, 악귀가 저쪽으로 데려갔어요. 얼른 구해야 해요! 흐흐흑!”

엔디미온은 잡혀간 동생은 자신이 구해올 테니 소녀에게 여관 안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말했다. 소녀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엔디미온은 바닥을 박차고 달렸다. 소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얼마 정도 달리자 하늘을 날던 악귀 하나가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벌레처럼 가느다란 다리로 꼬마 하나를 안고 있었는데 땅으로 내려오면서 들고 있던 꼬마를 거칠게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긴 빨대 같은 입으로 꼬마의 체액을 빨아먹으려고 했다.

악귀를 죽일 방법은 많았다. 성검을 휘두를 수도 있었고 돌을 던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굳이 악귀에게 다가가서 목과 머리를 분리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내가 싫어하는 벌레처럼 생겼군.”

여름이 되면 사람들을 괴롭히는 벌레와 비슷하게 생겨서. 엔디미온은 기절한 꼬마를 등에 업고서 다시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덜덜 떨고 있는 소녀에게 돌려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드릴 게 없어서······.”

“괜찮다. 이게 내 의······무니까.”

늘 하던 말을 하면서 엔디미온은 이상야릇함을 느꼈다.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는 연신 감사 인사를 하는 소녀를 뒤로 한 채로 다시 성벽 쪽으로 뛰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건만 성 안은 곳곳의 횃불 때문에 아주 환했다.

본래라면 튼튼한 성벽이 악귀들을 막아주어야 했지만 이번에 나타난 악귀들은 전부 날벌레의 형상을 하고 있었기에 성벽을 가볍게 넘어왔다. 엔디미온은 마주치는 악귀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면서 전진했다.

하지만 그 혼자서 모든 악귀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몇몇 악귀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서 난리를 쳤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그러면 또 다른 악귀가 날아와서 사람의 머리를 붙잡고 하늘 위로 올라갔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열심히 창칼을 휘두르고 있지만 별 소용은 없는 모양이었다.

“마을 사람들을 영주궁 안으로 이동시켜라! 절반은 영주궁을 지키고 절반은 나를 따라오도록!”

그레이는 자신의 백성들이 잡아먹히는 모습을 보고 노성을 토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서 성기사들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절반은 성벽으로 향했고 절반은 영주궁으로 향했다. 그레이는 당연히 성벽으로 움직였다.

그의 무기는 철퇴였는데 날아오는 악귀들의 머리를 단숨에 으깨버렸다. 무거운 갑옷을 입었고 나이가 제법 있음에도 그의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한때 성직에 종사했고 이등기사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엔디미온은 어째서 다른 성기사 대신에 그가 대장 대행을 맡았는지 알 것 같았다. 토르델 영주 그레이는 타고난 무재였다. 아마 그대로 성직에 쭉 있었다면 특등기사에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성벽으로 올라가! 일단 날아다니는 놈들만 다 죽이면 돼! 어려울 것 없어! 가자! 얼른 올라가!”

그레이는 성기사 스무 명을 이끌고 성벽 위로 올라갔다. 힘겹게 싸우던 병사들은 성기사들이 나타난 것을 보고서 환호했다. 악귀들을 상대로 병사들은 시간 끄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었다. 그들을 죽이려면 성기사들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전능자시여! 당신의 종이 바라옵건대 이 싸움에 한 점 부끄럼 없도록 하시옵소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어린 양에게 무한한 용기와 커다란 힘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오늘 이곳으로 당신의 성전으로 삼으리다!”

성기사들은 그레이와 함께 기도했다. 그들의 기도는 두려움을 잊게 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심리적인 효과 말고도 실질적으로 육체의 능력을 일정 시간 늘려주는 효과도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나왔고 날벌레 같은 악귀들은 그 빛에 홀려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다. 그레이는 철퇴를 들어 올리며 외쳤다.

“악한 것들을 벌하라!”

성기사들이 함성과 함께 자신들의 무기를 휘둘렀다. 단지 스무 명의 성기사들이 성벽 위로 올라왔을 뿐인데 전황은 순식간에 변했다. 그들은 악귀들의 주의를 끌어서 성벽을 넘어가지 못하게 했고 또한 신성력으로 빛나는 무기로 적들을 효과적으로 처치했다.

엔디미온은 이미 성 안으로 들어온 악귀들을 무찌르면서 성벽으로 움직였다. 어쩌면 자신의 도움이 없어도 될 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병사들은 성벽 아래로 화살을 쏴라! 저 빌어먹을 놈들이 성문을 부수지 못하게 막아! 제라, 헬슨, 툴라! 너희들은 병사들이랑 밑으로 내려가서 성문을 보강해라! 뚫리면 다 뒈지는 거야! 가서 막아!”

그레이가 크게 외치자 세 명의 성기사들이 일부 병사들을 데리고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성문은 성벽 너머의 악귀들이 몸을 세게 부딪치고 있어서 자꾸만 흔들거렸다.

“쏴라, 쏴! 성벽을 기어서 올라오는 놈들에게 돌을 던지고 끓는 기름을 부어! 우리가 힘을 합치면 이겨내지 못할 적은 없다! 우리는 오늘 또 살아가는 거다! 또 한 번 태양을 보는 거다!”

외침은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는데 도움이 됐다. 그들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성벽을 기어서 올라오는 악귀들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럼에도 악귀들은 쉬지 않고 다시 올라왔다.

“하하하핫! 벌레들이 발버둥을 치는구나! 그런다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 같나? 너희들은 오늘 이곳에서 내 자식들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한 놈도 빠짐없이 전부!”

성벽 위로 무언가 날아올랐다. 그것은 창백한 얼굴의 남자였는데 검은색 망토를 둘렀고 짐승 같은 송곳니가 툭 튀어나와서 반짝거렸다.

날개도 없으면서 공중에 떠있는 남자는 누가 보아도 심상치 않았다. 그가 망토자락을 휘날리며 손을 휘두르자 새빨간 칼날이 날아와서 성벽 위의 병사들의 허리를 끊었다. 순식간에 다섯 명의 병사들이 죽었고 다음에 날아온 공격은 세 명의 병사들을 죽였다.

병사들이 화살을 쐈지만 그것은 남자에게 아무런 상처도 남기지 못했다. 그레이가 철퇴로 바닥을 찍으며 크게 외쳤다.

“이 빌어먹을 놈아! 너는 또 누구냐!”

남자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잘 물었다. 나는 남작 탈리온! 한때 악마숭배자였으나 내 주인을 잡아먹고 새로운 악마가 된 탈리온이다! 너희들 따위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날 이길 수는 없으니 그만 항복해라! 그러면 몇 명 정도는 내 부하로 삼아줄지도 모르지!”

“개소리 집어치워라! 무슨 항복이야! 우리 놋쇠 잔 기사수도회는 항복을 모른다!”

“굳이 다 같이 죽겠다면 어쩔 수 없지. 바라는 대로 해줘야지.”

탈리온이 손을 들자 어디선가 또 날벌레처럼 생긴 악귀들이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그레이는 입술이 바짝 말랐다. 솔직히 말해서 이쪽은 성벽 위에서 항쟁하는 것이 고작인데 또 한 번 날아다니는 악귀들이 온다면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여기서 항복한다면 일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레이는 입술을 꽉 깨물면서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사람답게 죽어야 했다. 구차하게 개돼지로써 목숨을 부지할 게 아니라.

“싸워라! 토르델을 지켜라!”

커다란 외침을 들으면서 엔디미온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도 하늘 위에 떠있는 탈리온의 모습이 보였다.

“좀 힘들어 보이는군. 우리가 좀 도와야겠소.”

“······.”

엔디미온은 아무 말도 없이 성벽까지 뛰었다. 그는 뛰면서 생각했다.

성배기사 엔디미온은 사악한 것들과 싸워야 한다. 그것이 그의 의무니까. 성배기사를 움직이는 것은 의무에 대한 강박과 맹목이었고 거기에 어떠한 욕망도 없었다.

“여기 좀 도와줘!”

“이쪽! 이쪽 뚫린다! 몇 명 더 붙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왜 싸우는지에 대해서 끝없이 탐구했다. 백 년 전의 그는 의무를 행하는 인형이었다. 다른 것에는 관심도 없었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언제나 전진하며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백 년의 시간은 길었다. 너무 길었다. 엔디미온은 자신이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잘 만든 인형도 세월이 지나면 관절에 문제가 생기는 것처럼 약간의 고장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이 썩 마음에 들었다. 사람은 완전무결할 수 없다. 흠결이 있기에 비로소 사람이다.

지금 성벽 위로 올라가는 엔디미온은 의무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다.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자기 자신의 마음에 따랐을 뿐이다. 똑같은 행동이라도 마음가짐이 다르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전장에 섰다.

“자네는······.”

성벽 위로 올라온 엔디미온을 보고서 그레이가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를 도와주겠나?”

엔디미온은 대답하는 대신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쓰러져 있는 병사들, 신음 하고 있는 병사들,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병사들.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엔디미온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성검을 빼들고서 성벽의 난간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비릿하게 미소 짓고 있는 탈리온을 향해 외쳤다.

“이 개 같은 새끼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사람들을 괴롭히느냐! 덤벼라, 이 벌레 녀석아! 내가 상대해주마!”

“저건 또 뭐야?”

탈리온은 엔디미온을 보고서 혀를 찼다. 그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둘러서 엔디미온의 목을 따려고 할 때였다.

“들어라! 나는 전능자의 화신이자 번뜩이는 칼날이며 무자비한 징벌자다! 이 벌레 같은 놈아! 날 보아라! 내가 누구인지 똑똑히 보아라!”

번쩍이는 빛이 성벽을 감쌌다. 빛은 둥근 구의 형태로 점점 커지면서 날아오는 악귀들을 모두 태워버렸다. 구 안의 병사들은 몸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고 고통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신기하게도 다시 일어날 힘을 얻었고 무한한 용기로 가슴이 충만해졌다.

엔디미온은 당황하고 있는 탈리온을 향해 성검을 휘둘렀다.

“성배기사가 돌아왔다!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몰아내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다. 영웅도 아니고 구원자도 아니다.

“싸―우―자!”

단지 희망과 용기일 뿐이다. 백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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