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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또 뭐……. 끄아아악!”
탈리안은 성벽 위에서 뛰어내리는 엔디미온을 보고서 코웃음을 쳤다가 시야를 전부 가릴 정도로 커다란 빛의 칼날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반사적인 행동이었지만 눈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 그의 안구를 태워버렸다. 안구가 타버리고 공간이 텅 비자 자연스럽게 눈두덩이 아래로 꺼졌다. 녹아내린 눈두덩은 그대로 다물려서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때문에 탈리안은 자신의 몸을 가르는 빛의 칼날을 끝까지 보지 못했다. 절반으로 잘린 그의 몸은 좌우로 떨어져 나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악귀들은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고깃덩어리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먹었다. 우적우적 씹고 있는 그들 위로 떨어진 엔디미온은 크게 성검을 휘둘렀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열 마리도 넘는 악귀들의 몸이 잘려나갔다. 또 한 번 휘두른 공격에 거대한 덩치를 가진 악귀가 반으로 갈라지고 대지에 기다란 상흔이 남았다.
엔디미온은 거친 물살을 가르는 선지자와 같았다. 그의 손짓에 따라 성검이 움직였으며 한 번의 움직임은 대지를 가득 메운 사악한 것들을 쓸어버렸다.
성벽 위의 병사들과 성기사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엔디미온의 무용을 쳐다보았다.
“덤벼라, 이 개 같은 것들아!”
검을 한 번 휘두르면 열 마리도 넘게 죽는다. 발을 한 번 구르면 빛이 번쩍인다. 수많은 악귀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으나 그 어떤 것도 이빨 자국 하나 남기지 못했다.
번쩍이는 빛은 뜨거운 징벌이었고 날카로운 검은 자비 없는 천벌이었다. 방금 전까지 불리했던 전황이 단 한 사람에 의해서 뒤바뀌는 것은 정말로 깜짝 놀랄 만한 경험이었다.
“싸워라!”
엔디미온은 성검을 크게 휘둘러 수십의 악귀들을 베었다. 그의 몸은 악귀들의 몸에서 튀어나온 액체들로 물들어 초록빛을 띄었으나 더럽다는 느낌은 없었다. 엉망진창의 모습임에도 그는 고결했다.
그의 머리 뒤로 떠오르는 태양은 마치 후광과 같았다.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며 전능자에 대한 기도를 올렸다.
우리 아버지, 전능하신 분이여. 우리를 가엽게 여기시고 당신을 믿고 따르는 어린 양에게 무한한 용기와 커다란 힘을 내려주시옵소서……. 우리는 오늘 이곳에 성전을 세우리라.
“싸워라! 무기를 들고! 나와 함께!”
엔디미온은 성검을 크게 들어 올렸다. 병사들은 감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눈부신 후광이 얼굴을 가려버렸으니까.
“영주님, 어찌 할까요?”
“어쩌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나?”
그레이는 철퇴를 들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격렬하게 싸우느라 땀범벅이 된 얼굴이었다. 손이 한 번 쓸고 내려간 얼굴에는 짙은 미소가 있었다.
“성문을 열어라! 전능자의 화신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는 오늘 승리를 할 것이다!”
와아아아아! 병사들과 성기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성기사들은 얼른 성벽 아래로 내려갔고 성문을 열고서 돌격을 시작했다.
무모한 돌격이었으나 그들의 얼굴에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다. 왜냐하면 전능자의 화신이자 성배의 운반자가 함께 하고 있으니까.
“싸워라! 우리 놋쇠 잔 기사수도회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거다!”
그레이는 가장 선두에 서서 함성과 함께 철퇴를 휘둘렀다. 젊었을 적에 비하면 많이 늙고 무거워진 몸이었다. 그러나 그가 철퇴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악귀들의 머리가 수박 깨지듯 깨졌다.
그는 전투의 흥분으로 기분이 고양됐다. 아무리 철퇴를 휘둘러도 힘든 것을 느끼지 못했다. 악귀들이 달려들어 갑옷 위에 부딪쳐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오직 성기사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만 생각했다.
“다 죽여! 이 빌어먹을 놈들을 죽여! 대가리를 다 으깨버리라고!”
어린 소년이 종자가 되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성기사다운 말씨와 품행이다. 성기사는 성배기사의 적생자이며 사악한 것을 몰아내고 사람들을 구하는 이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성기사들은 종자 시절에 배운 것들을 모두 잊고 야만적인 전사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지금 흥분한 상태였다. 이상하게 자꾸만 몸 안으로 들어오는 신성력이 그들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지난번에 그들의 대장을 잃었던 것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괴롭게 하는 사악한 것들에 대한 분노였다.
성기사들은 종횡무진으로 날뛰면서 수백의 악귀들을 모두 죽였다. 단 한 마리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이 이를 물고서 무기를 휘둘렀다.
그럼에도 아직 악귀들은 많이 남아있었다. 만약 성기사들만 있었다면 그들은 무모한 돌격 끝에 모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엔디미온이 있었다. 성배기사 엔디미온이 있었다.
“덤벼라! 내가 모두 상대해주마!”
그 어떤 홍수가 와도 든든하게 막아주는 벽처럼 엔디미온은 가장 선두에서 악귀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수백 마리의 악귀가 한 번에 덤벼도 모두 쓸려나갈 뿐이었다.
그는 물길을 가르는 바위였다. 적의 기세를 침몰시키는 충각이었다. 수십 마리의 악귀들이 달려들었다가 처참히 목숨을 잃고 또 다음 무리가 달려들었다.
싸움은 그것의 반복이었다. 엔디미온은 단단히 두 발을 딛고 서서 막아내고 악귀들은 달려들었다. 수백 마리 악귀들이 죽어서 남긴 시체는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빽빽했다.
그러나 엔디미온이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그것들은 신성한 빛에 타버렸고 한 줌의 재로 변했다. 그러면 그 위로 또 다른 시체들이 쓰러졌다.
“키, 키에에엑! 키에엑!”
“키에에엑!”
악귀들도 학습이란 것을 했다. 사람을 보면 습격하고 싸우고 잡아먹는 등 본능에 우선해서 행동하는 그들이었지만 이성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이 싸움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깨달았다.
무리는 흐름에 따라가는 법이다. 한 마리가 도망치자 두 마리가 따라서 도망쳤고 그 다음은 열 마리가 도망쳤다.
다음은 수십 마리였고 또 다음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악귀들은 무모한 싸움을 그만두고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엔디미온은 그 뒤를 쫓아서 수십 마리의 악귀들을 더 베었으나 모두 붙잡을 수는 없었다. 하려고 했으면 뿌리를 뽑을 수도 있었지만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성배기사를 뵙습니다.”
뒤를 돌아보자 그레이와 성기사들이 부복해 있었다. 그들은 감히 얼굴을 들어 엔디미온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그 누구도 태양을 똑바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았다.
태양의 빛은 따사로운 자애인 동시에 뜨거운 징벌과 같으니 그 누가 감히 도전하겠느냐.
엔디미온은 성검을 검집에 꽂았다. 그리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한 번 쓸었다. 후 하고서 더운 숨을 뱉어내자 머리카락이 살짝 떴다가 다시 이마에 달라붙었다.
“고개를 들라.”
“그럴 수 없습니다.”
“백 년 전에는.”
엔디미온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는 그레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싸움이 끝나면 성기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나는 성배기사였으나 한 명의 성기사였노라. 너는 놋쇠 잔 기사수도회의 대장이니 내 얼굴을 볼 자격이 있다. 고개를 들라.”
그레이는 한 번 더 거절하다가 그 다음에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엔디미온의 얼굴을 비추던 후광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성배기사가 아니라 한 명의 여행자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방금 전의 싸움과 무용은 한바탕 꿈이었을까. 그레이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는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배기사께 큰 은을 입었습니다. 덕분에 제 백성들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감격했습니다. 전능자는 과연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군요. 이 세상에 다시 한 번 성배기사를 내려주셨으니 말입니다. 과연 영웅다운 무용이었습니다.”
“영웅은 죽었다. 나는 잠들지 못한 망령이니 나를 영웅이라 부르지 말라. 오늘 이 싸움에서 진정한 영웅은 바로 그대들이었다.”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성배기사의 뒤를 따랐을 뿐입니다. 누구나 그리 했을 겁니다. 그것을 어찌 영웅이라 부르겠습니까?”
엔디미온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너희들을 영웅이라 부르는 것은 그 마음가짐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싸울 수 있다. 하지만 남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너희는 기꺼이 그리 했다. 또한 그레이, 너는 영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네 백성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이것이 영웅적 행위가 아니라면 내가 백 년 전에 했던 모든 것들은 그저 의미 없는 살육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날 욕보이려는 것이 아니라면 겸손을 거두어라.”
그 말을 듣고 나서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왜 정체를 숨기셨습니까? 성배기사께서는 분명 다른 곳에서도 똑같이 사람들을 지키고 사악한 것들을 몰아내셨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누구도 성배기사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어째서 돌아왔다는 것을 숨기셨습니까?”
“나는 마지막 의무를 행하는 중이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잠들지 못한 망령이고 마지막 의무를 끝내고 잠들어야 했음으로 내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그럼 어째서 지금은 정체를 밝히셨습니까?”
엔디미온은 숨김없이 바로 말했다.
“확인했으니까. 내가 내 의지로 싸우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내 행동에는 그 누구의 의지도 개입하지 않았음을 알았으니까. 중요한 것은 의무가 아니었다. 내 마음이었다. 나는 이제 내 의지로 싸우겠다. 성배기사 엔디미온으로서.”
불충분한 설명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그레이가 얼른 알아듣기 어려운 설명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엔디미온의 목소리에서 결연한 결심이 느껴져서.
“뜻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그저 전능자의 종으로서 당신을 따를 뿐입니다.”
“그레이.”
“말씀하십시오.”
“너는 네 역할을 다해라. 사람들을 지키고 사악한 것들을 몰아내는 것 말이다.”
“마땅히 제가 할 일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해줄 말은 하나뿐이다. 저항해라. 끝까지. 신념을 가지고서.”
엔디미온은 그레이에게 자신의 말과 짐을 가져와 달라고 말했다. 그레이는 성기사를 시켜서 말과 짐을 찾아오게 했다. 그가 말과 함께 돌아오자 엔디미온은 곧장 떠날 준비를 했다.
“어찌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잠깐 쉬지도 않으시고.”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다. 시급히 끝내야 할 일이지.”
“어떤 일을 하시려는 것인지 저는 감히 알지 못합니다만.”
그레이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부디 무탈하시길 빌겠습니다. 당신은 우리 모두의 희망이니까요.”
엔디미온도 마주 웃었다.
“알고 있다. 곧 내 이름을 다시 듣게 될 거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사악한 것들이 사라지게 되겠지.”
“그러길 바라겠습니다.”
그레이는 힘주어 말했다.
“진심으로 말입니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의 배를 발로 찼다. 그 역시 동감이었다.